우주의 고아 - 8점
모리 에토 지음, 고향옥 옮김/생각과느낌
 
짜릿한 이웃집 지붕 오르기
 
1.
내가 기억하는 첫 집이자 열네 살 때까지 살았던 집은 단층 혹은 이층 단독주택들이 밀집한 동네 한가운데 있었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 시 외곽에 위치한 중산층도 저소득층도 아닌 말 그대로 서민들이 주로 살던 신흥 주거지에, 일명 '집장사'들이 비슷한 설계도에 따라 집을 지어 수요자들에게 팔았던 집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기에 이웃한 집은 대개 집의 구조나 모양새가 비슷했다.  '국민학교' 시절 - 분명 초등학교라 해야 하지만 왠지 '국민학교'가 더 어울린다 - 성격상 동네 친구들과 몰려 노는 데 한계가 있었던 나는 책을 읽거나 몽상으로 부모님이 일하느라 계시지 않은 시간을 많이 때웠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뒷집 지붕에 올라가는 데 재미를 붙였다. 이웃한 바로 뒷집은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딱 붙어서 어린아이도 쉽게 집을 건너다닐 수 있었는데, 온전히 옥상으로만 된 우리 집과 달리 뒷집은 장독대 놓는 공간을 제외하곤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 나는 그 뒷집 기와가 덮인 지붕에 자주 올라가 어딘가 멀리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각종 담을 타고 옆집과 앞집을 가리지 않고 넘나들었고, 이따금 동네친구들까지 꾀어 옆집 안에 있는 공터에서 놀기까지 했다. 내게 그럼 담타기 혹은 지붕 올라가기는 넘는다는 희열감과 함께, 어딘가 멀리 본다는 기대감, 동네 누구보다 높은 데 선다는 우월감 같은 여러 복잡한 감정을 뒤섞은 묘한 정서를 가져다줬다.
 
2.
인쇄소를 운영하는 부모가 일이 많아 거의 둘만 지내다시피 하는 연년생 중학생 남매 요코와 린은 남의 집 지붕에 오르는 데 재미를 붙인다.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오르다 차츰 지붕 오르는 데 원칙을 세우고, 난이도를 높여 가며 슬슬 재미를 붙여 갔다. 부모의 실질적인 부재와 재미없는 학교 생활, 친구들 사이에 존재하는 따돌림에 이르기까지 내내 갑갑하게 때로는 우울하게 청소년 시기를 보내야 했던 남매에게 일탈이 주는 묘한 쾌감은 삶의 팍팍함을 날려보내는 에너자이저였다. 그리고 여기에 친구들로부터 은근히 따돌림당하던, 요꼬네 반 아야코가 함께한다. 이들에게 지붕을 오르는 행위는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탈 행위이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가 흔히 대중매체에서 접하는 흡연, 음주, 가출, 약물, 섹스 은 일반적인 범주에서는 다소 벗어난 다소 '얌전한' 일탈을 감행한다. 물론 남의 집 지붕에 집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오르는 행위는 가택침입죄에 해당하는 불법 행위이다. 아직 '성숙'되지 못한 중학생이기에 설사 이들을 교도소로 보낼 만한 건수는 아니라 해도 어른들, 에컨대 집주인이든 부모이든 하다못해 우연히 이들의 행동을 목격한 이웃의 어른들이 이러한 아이들의 불법 행위를 보면 길길이 날뛸 것이다.
 
만약 붙잡혔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밤중에 아무 볼일도 없이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간 것이다. 용서를 비는 일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고 울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색을 하고 놀이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아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요코는 이리 말하지만 이들은 차츰 지붕 오르는 일에 중독된다. 대부분의 일탈은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또는 호기심으로 시작되지만 이내 중독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모종의 질서와 어긋날 경우 발생하는 묘한 불협화음은 여느 스릴러 영화보다 짜릿한 재미를 선사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웃집의 담은 내게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출입구였으며 넘기 힘들수록 고단함이 가중되는 통과의례였다. 또한 그렇게 통과의례를 밟으며 오른 이웃집 지붕은 새로운 세계를 내다보는 전망대 내지는 갑갑한 현실과 동떨어진 나만의 해방구였다. 조심조심 기와를 밟을 때 발에 느껴지는 묘한 감촉과 뿌지직하는 소리 때문에 느낀 짜릿함은 그것의 덤이었다. 나 또한 담타기와 지붕 오르기에 중독됐었다.
 
3.
소설 속 아이들은 함석지붕을 잘못 디뎌 소리를 내 주인을 깨우긴 했지만 끝내 적발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창밖의 '등산객'을 요코네 반 왕따 키오스코가 맞닥뜨리면서 이들의 지붕 오르기는 위기에 봉착한다. 어른이 아닌 친구, 그것도 왕따 친구에게 적발된 이들은 친구를 자기네 패거리로 꾀어 내는 수법으로 자신들의 불법 행위를 만회하려 한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거나 재미있으면 놀이가 되는 거라고!"
"지붕에 올라가는 게 재미있니?"
"글쎄 재미있다니까!"
"이해가 안 가."
절망, 내가 넌덜머리가 나서 발밑의 낙엽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옆에서 린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올라가 보면 알아."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극히 소심하기 일쑤이고, 키오스크 또한 그렇다. 비록 일탈을 위한 불법 행위일지라도 아이들에게는 "뭔가를 시험한다든가, 극복한다든가, 그런 거창한" 행위가 아닌 그냥 놀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세기말의 우울함을 떨치지 못하던 왕따 소년 키오스코 - 그의 본명은 가즈오이지만 역내 매점인 키오스크처럼 아이들에게 이용만 당하다 보니 어느덧 별명으로 자리 잡았다 - 는 일탈과 안주, 스릴과 공포 속에서 지붕 오르기를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키오스크는 등교를 3주 넘게 거부하다 어느 날에는 자살하다 실패했다는 소문이 돈다.
 
4.
키오스크를 포함해 네 명의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지붕에 오르던 날, 키오스크는 인도로 떠나 버린 전임 담임교사인 스미레가 한 말을 다른 이들에게 읊어 준다.
 
"우리는 모두 우주의 고아이기 때문에, 따로따로 태어나서 따로다로 죽어 가는 고아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반짝반짝 빛나지 않으면 우주의 어둠 속으로 삼켜져 버린대."
 
지붕에 오르는 '비행청소년'을 다루는지라 자못 뜬금없던 소설의 제목인 '우주의 고아'는 누구나 힘들 때 헤쳐 나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이들은 갑갑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려 기꺼이 불법 행위를 감행했다. 또한 자살하려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친구의 오해를 풀어주려 기꺼이 자신들의 행동을 고백하려 한다. 직장, 돈, 연애 같은 어른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오리 아줌마와 대화를 나누며 위안을 얻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반면 직접적으로 뒷집 지붕을 비롯해 이웃집 담을 넘던 내 행위는 적발되지는 않았더 하더라도 이웃들이 그것을 몰랐을까? 아마도 부모님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압박을 넣었을 게다. 그래서였는지 어머니에게 혼난 기억도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즉 내 스스로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인지했더라도 부조화를 일으키며 내 행동에 제동을 걸지 못했고, 결국 나는 그저 일탈을 감행한 문제아가 돼 어른들의 제재를 받은 수동적인 존재가 돼 버렸다. 반면 소설의 네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혼날 것을 각오하고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한다.
 
5.
 이 소설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성장소설의 일반적인 공식과 관습을 충실히 이행한다. 이 시대 아이들이 겪는 성장통을 지나치게 극단적인 상황을 부각시키며 풀어가는 방식 대신 소소한 일탈을 보여 줌으로써 무겁지 않게 풀어간다. 때문에 오늘날 아이들에 당면한 왕따 같은 심각한 문제도 자못 가볍게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갈등상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데다 너무나 쉽게 해결하는 인상을 주어 소설을 읽는 맛인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데는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껏 일탈한다는 게 남의 집 지붕 오르는 거라는 아이들의 귀여움, 그리고 어떻게든 문제상황을 스스로 해결할 것을 선포하는 외유내강적인 그네들의 꿋꿋함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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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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