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알라딘 중고샵에 <석양의 무법자 CE>가 나왔길래 적립금과 쿠폰을 탈탈 털어 구매했다. 180분짜리 풀 버전을 극장에서 본 마당에 142분짜리 일반 버전이 눈에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현재 DVD가 유통되는 것은 풀 버전과 다양한 서플먼트가 담긴 CE(컬렉터스 에디션)이 아니라 헐값에, 심지어 다른 영화와 세트로 묶인 일반판이었다. 서플먼트는 전무하고 화질도 조악할 것이 뻔했다. 한국의 초열악한 DVD 시장을 보건대 재출시될 확률은 극히 적은데다, 곧 블루레이 버전이 출시되니 이때가 아니면 언제 구하나 싶어 반성 주간임에도 덜컥 구매해 버렸다. 그래도 현금 지출은 1000원 대이니.

무엇보다 이 영화를 굳이 구매한 이유는 내 인생의 영화 5편 중에 하나로 꼽을 만한 내가 인정하는 걸작이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의 DVD를 안 갖추고 있다는 것은 그 영화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싶었다. 물론 세르지오 레오네의 걸작을 꼽으라면 내 스스로도 <옛날 옛적 서부에서>를 더 쳐 주지만, 거기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징글맞은 찡그린 표정을 볼 수 없다. 레오네의 연출과 이스트우드의 연기가 최고로 잘 배합된 영화는 아무래도 <석양의 무법자>, 즉 영화 '놈놈놈'의 이름을 제공했던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다. 이런 마당에 어찌 안 사고 배기겠는가. 게다가 좀체 구할 수 없는 레어템이 되어 가는데.


이쯤에서 '내 인생의 영화 5편'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을 듯하다. 후훗. 자뻑일까?

내가 고른 '내 인생의 영화 5편'은 다음과 같다. 선정의 기준은 딱히 없다. DVD로 소장해서 이따금 보고 싶어 해야 한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이다. 절대로 자주 봐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한국 영화는 따로 뽑으려 한다[각주:1].



무간도
감독 맥조휘, 유위강 (2002 / 홍콩)
출연 양조위, 유덕화, 여문락, 정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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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가 나온다기에 아무 생각 없이 봤던 영화인데 막상 보고 나서 대박이다 싶었던 영화다. 사실 영화 자체로만 보면 1위로 삼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지만, 도중 황 국장의 죽음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양조위의 표정[각주:2],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다. 내게 이랬던 영화는 별로 없다. http://gile.egloos.com/3232325 참조


석양의 무법자
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1966 / 스페인, 이탈리아)
출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엘리 월러치, 리 반 클리프, 알도 주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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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세르지오 레오네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궁합이 최적화된 영화이다. 180분짜리 풀 버전은 자못 지루한 감이 없지 않으나 마지막 3인의 결투신은 그 지루함을 잊게 했다. http://camelian.tistory.com/50 참조


랜드 앤 프리덤
감독 켄 로치 (1995 / 스페인)
출연 이안 허트, 로잔나 파스터, 프레드릭 피에롯, 톰 길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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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높았던 이상이 냉혹한 현실 앞에서 짓이겨져 버렸을 때의 참담함. 켄 로치는 그것을 아주 낭만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http://gile.egloos.com/3231493 참조


천국의 나날들
감독 테렌스 맬릭 (1978 / 미국)
출연 리처드 기어, 브룩 아담스, 티모시 스콧, 밥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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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아워[각주:3] 대에만 골라 가며 찍은 환상적인 화면이 죽인다. 이전까지 탄탄한 내러티브나 세밀한 심리/감정 묘사에만 천착하던 영화 보는 기준을 송두리째 바꾼 영화. http://camelian.tistory.com/175 참조


타인의 삶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 독일)
출연 울리히 뮈헤, 마르티나 게덱, 세바스티안 코치, 울리히 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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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면서도 가슴 찡한 엔딩 신은 잘 차려진 음식에 황금 소스를 살포시 얹은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http://gile.egloos.com/3232548 참조


사실 좋은 영화가 수십 편 수백 편 있는데 달랑 5편만 고르는 것은 어폐가 있다. 적어도 내가 본 영화 중에서 '내 인생의 영화'로 꼽을 만한 작품을 더 소개해 본다.






  1. 즉 한국 영화 관련 글을 따로 쓴다는 것. 물론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요새 일요일에도 출근할 정도로 좀 바쁘다. [본문으로]
  2. 이 장면의 스틸컷은 알라딘의 내 서재에서 쓰고 있다. [본문으로]
  3. 일출, 일몰 전후 30분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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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에 이어 야후가 선정한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100편' 가운데 후반부 50편에 대한 리스트와 짤막한 코멘트를 올린다.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100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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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코리아 말고 야후닷컴에서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100편을 선정했다. 역사적 중요성과 문화적 영향력(historical importance and cultural impact)을 고려했다고 하지만, 명확한 선정 기준은 제시되지 않았다. 결과를 봐서도 <Once Upon A Time In America>나 <Gone with the Wind> 같은 영화가 빠져 있기도 하지만, 두 영화가 누구에게나 절대적 걸작이라고는 꼽힌다고 장담할 수 없으니 누락작에 대한 언급은 일단 팻으. 일전에 엠블에서 포스팅했던 책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에서 선정한 영화와 비교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이글루스로 옮기면서 리스트가 사라져 버려 네온님의 포스트에서 그 리스트를 볼 수 있다. (젠장 다시 작업해야 하나?)

영화 리스트에 짤막한 코멘트를 덧붙였다. 물론 코멘트라고 하기에는 영화에 대한 한 줄 잡담이다. 왜냐하면 대부분 안 본 영화들이기에... ^^; 영화는 중요도나 선호도 순이 아니라 영문 알파벳 순으로 리스트업되었다. 100편에다 코멘트를 다는지라 일단 전반부 50작만 포스팅한다. 후반부 50작도 조만간 하겠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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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不義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의로움이라고 한다. 이러고서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묵자>
 
언론에서는 안성기와 유덕화 같은 동아시아 각국의 스타가 출연한 것으로 떠들지만, 영화 <묵공>은 적어도 내게는 묵가의 이야기를 담아 뇌리에 각인됐다. 묵가는 묵적이라 하는 장인壯人 출신의 한 제자諸子의 사상을 따르는 무리를 말한다. 흔히 겸애설이라고 하는 사해평등주의, 박애주의, 반전평화주의로 알려진 묵가는 유학이 국학으로 자리 잡히면서 거의 박멸됐지만, 맹자 스스로 "양주와 묵적의 말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라고 한탄했을 정도로 춘추시대 당시에는 주도적인 학풍이 아니었나 싶다.
 
묵가는 개인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동일하게 여겨야 한다는 다분히 종교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사는 무리로서, 하나의 수도자로서 자신들을 혹독히 수련하고, 또한 조직적으로 그들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긴 무리였다. <묵공>에서 양나라는 조나라가 침략해 오자 묵가에게 원병을 요청한다. 실제로 묵가는 약소국을 대신해 방어전을 펼치며 그들의 겸애설을 실천으로 옮겼던 이들이다. 조금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자연스레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와 켄 로치의 <랜드 앤드 프리덤>에 묘사된 국제여단을 비롯한 스페인전쟁에 참여한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이 떠오른다.
 
영화가 곧 개봉하면서 슬슬 묵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에 묵가의 책을 읽으려 했더니, 논술문제로 출제되다 보니 대부분 청소년용으로 재단된 책들이다. 훑어 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게 있어 옮겨 본다.
우리는 어떻게 어떤 사람들의 이론이 올바른 대안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가? 반드시 판단기준을 세워야 한다. 판단기준이 없이 주장하는 것은 비유컨대 회전하는 물레 위에서 동쪽과 서쪽의 방향을 정하는 것과 같다. 옳고 그름, 이로움과 해로움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 표준三表’이 있어야 한다. ‘세 가지 표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근본, 증거, 유용성이 있어야 한다. 근본은 어디에서 발견하는가? 저 위의 고대 성왕의 실천에서 발견한다. 그 증거는 어디에서 발견하는가? 저 아래 백성들이 실제로 보고 듣는 것을 살핌으로써 발견한다. 어디에서 그 유용성을 발견하는가? 형벌과 정치에 적용하고, 그것이 국가 백성 인민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살핀다. 이것이 이른바 주장이 가져야 하는 ‘세 가지 표준’이다. - <묵자>

묵가는 중국 고대에서 여느 사상가들과 다르게 합리적인 논증을 중시했다. 모름지기 주장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필요한데, 묵자는 이 판단기준을 세 가지 표준三表, 즉 근본(本), 원인(原), 유용성(用)으로 정리했다. "고대 성왕의 실천"이라는 근본이, "백성들이 실제로 보고 듣는 것"이라는 원인이 반드시 맞다고 보기 힘들며 더욱이 "인민의 이익"이 타국 인민에게도 적용되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근본, 원인, 유용성이라는 삼표는 실제 일국이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데 반드시 요구되는 말 그대로의 표준으로서 판단기준이 아닌가. 겸애설과 함께 이 삼표의 판단기준은 묵가를 좀 더 공부하게끔 이끌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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