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4학년 때 뜬금없이 사학과 3학년 전공수업인
한국사회사상사를 들었다. 별로 사학과에서도 인기 없는 과목이었던 듯한데, 난데없이 나타난 경제학과 학생에게 그다지 관심도 무심도
없이 그냥 한 명의 학생으로 대해 줬다. 강사는 꽤나 술을 좋아하던(그래서 숙취로 강의하기를 힘들어했던) 88학번이었는데 대학
시절 배웠던 선생 중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세밀하게 강의했고, 심도 깊게 질문했다. 원고 때문에 율곡을 검색하다 문득
호락논쟁에 대해 텀페이퍼를 썼던 기억이 났다. 내 컴퓨터에는 보존돼 있지 않기에 혹시나 해 그냥 한번 올려 봤던 레포트 사이트를
조회해 보니 남아 있다. 게다가 평가도 괜찮았고 무엇보다 사용료도 지불돼 있었다. 으하하.
이 페이퍼는 기말고사 대체로 제출하도록 한 과제였는데, 수업 중에 호락논쟁이라는 게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남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을 만한 주제였다고 생각해 페이퍼 주제로 선정했다. 막상 쓰는 데는 힘들었는지 안 그랬는지 별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학점은 잘 나온 편이라 비교적 괜찮은 평가를 받은 듯싶다. 하지만 당시는 절대평가와 학점폭격이 이루어지던 거의
마지막 시기였다. 하지만 수업을 두 번 빼먹지 않았으면 더 좋은 학점을 받았으리라. ^^;
사실 이 글은 쓸 때 당시 참고한 자료에 대해 명확히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이리저리 짜깁기해 만든 저작권법에 심히 위배되는 글이다. 게다가 지금 보면 심히 부끄러운 오자가 많지만 개인 자료 보존 차에 기본적인 것은 교정을 보고선 이곳에 그때 페이퍼를 올려 둔다. 이 글을 스크랩해 간 사람이 종종 있는데, 올려놓고선 스크랩해 가지 말라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으면 한다. 애초에 이 블로그의 글은 부분 인용이나 이미지 스크랩 이외에는 퍼 가는 것을 허용치 않기도 하거니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서이다. 이해와 양해를 구한다.
조선 후기 시대적 상황에서 바라본
호락논쟁의 의의 1. 서론
정묘, 병자 양란은 당시 조선 사회에 예전에 없었던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거의 금수만큼이나 천하게 여기었던 오랑캐에게 왕이 친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당했다는 것은, 그간 조선을 개국 이래로 지배해 왔던 기존의 성리학적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삼전도의 치욕 이후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중화의 패자가 되는 상황 속에서 그간 조선을 지탱해 왔던
성리학적 세계관은 그 새로운 상황에 적절하게 재해석되어야 했다. 정치권에서는 북벌론을 통해 상처 입은 자존심의 회복과 중화의
복구를 꾀하려 했지만, 이것이 진정 청을 치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당시에 실추된 조선 왕실과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정치적 의도인지에 대해서는 분분한 가운데, 차츰 이미 천하를 재패한 청을 두고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조선의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학계의 논쟁이 이른바 호락논쟁이다.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어 근 200여 년간 지속된, 게다가 난다
긴다 하는 학자들의 대부분이 한마디 정도 했을 정도로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로 진행된 이런 학계의 논쟁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16세기에 벌어진 이황과 기대승에서 시작되어 퇴계학파 대 율곡학파의 대립으로 치다뤘던 사단칠정 논쟁은 이에 역사적 이유는 더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호락논쟁은 소론과 퇴계학파 계열의 남인 등이 거의 배제되는 속에서 집권붕당이라고 할
수 있는 노론 내에서 율곡학파 안에서 이기에 관한 치열한 논쟁을 걸친 독특한 사례이다.
본 고에서는 湖洛論諍, 특히 人物性同異 논쟁, 未發心體有善惡 논쟁, 聖凡心同異 논쟁을
중심으로 호론과 낙론의 견해를 비교․분석한 후, 노론 이외의 학파에서 이 논쟁과 관련된 견해를 함께 살펴본 후, 이 논쟁이 조선
후기 사회상에 어떤 면에서 부합하고 어떻게 해석했으며, 이후 조선 후기 사회사상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됐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또한 이 논쟁을 살피는 것은 다만 한국 성리학의 이론 세계의 한 특성을 파악하게 되는 의의를 지닐 뿐 아니라 주자 철학의 한
특성까지 파악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호락논쟁의 발발과 배경
1)논쟁의 발발 원인
문제의 발단이 되는 원인은 性에 대한 다의적 해석을 혼용하고 있는 朱子에게서 비롯된다. 주자는 「中庸」의 주석과
「孟子集注」「大學或問」에서 性을 각각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주자철학에서의 性이란 인간 또는 사물 안에 내재된 理를 가리킨다.
性은 구성상으로는 氣 안의 理(氣中之理)인 셈이지만 이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중용의 해석에서는
인간과 사물의 성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맹자집주에 의하면 부여받은 理의 차이에 의하여, 대학혹문에 의하면 기의 차이에
의하여 인간과 사물이 달라진다고 한다. 性이란 理와 氣가 결합되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의 차이에 의하든 기의 차이에
의하든 기와 결합된 理는 다 똑같은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만물 생성의 우주 원리로서 우주 전체를 관통하고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각 개체내의 理인 性도 동일하다. 그러나 각 사물의 특성을 이루고 개체이도록 하는 원리를 성이라고 할 때는 人間과 事物, 事物과
事物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性을 보는 관점에 따라 본원적인 理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개별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문제는 그중 어느 관점을 택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人性과 物性이 같은가 다른가의 보편논쟁에서 동일한 본성을
놓고, 한원진은 다르다고 하고 이간은 같다고 한다.
2)논쟁의 배경
人物性同異의 논쟁은 율곡 이이(1536~1584)에서 우암 송시열(1607~1689)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적통인 수암
권상하(1641~1721)의 문하에서 제기되어 본격화된다. 그의 문하에는 이른바 江門八學士로 불리는 8인의 학자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남당 한원진(1682~1751)과 외암 이간(1677~1727)이 가장 뛰어나 江門爭論의 장본인이
된다.
한원진은 1705년에 지은 <시동지성>에서 인물성론에 관해 이미 상당히 정리된 입장을 밝히고 있고 이간은 1709년 최성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五常과 未發에 관한 논의를 한 바 있다. 즉 1712년에 본격적인 논쟁을 벌이기 이전에 이미 이들은 자기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토론은 외암 이간(1712)이 스승인 수암 권상하에게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의
마음이 純善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는데 처음에 수암은 외암의 설에 수긍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미발 때 선악이 있다고 하는 남당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남당이 찾아와서 자기의 의견을 자세히 설명하자 수암은 이번에는 남당의 설을
인정하였다. 즉 사람이 태어나면서 氣質之性을 가지게 되니 이것은 선악의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발시
항상 악한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되자 수암은 이전의 외암의 설이 옳은 것이 아니고 남당의 설이 옳다고 하면서
율곡의 理通氣局의 해설까지 덧붙여 숙종 38년(1712) 외암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자 외암은 그의 스승 수암
권상하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과 남당의 설에 대해 조목조목 의의를 제기하였고, 이통기국에 대해서도 서로의 의견을 달리하게 되면서
그들의 논쟁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남당은 외암이 스승 권상하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스스로 스승을 대변해서 외암의 설을
반박하게 되었고, 여기에 외암은 직접 남당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의 논쟁은 더욱 가열화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남당도 외암의
설을 직접 반발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들의 이론적 논쟁은 한 개인적 논쟁으로 당대에 끝나지 않았고, 집단적 논쟁의 성격을 띠면서
조선말까지 계속되었다.
외암이나 남당은 모두 수암 권상하의 문하에 있는 사람들로서 기호지방인 충청도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 이후 외암의 논쟁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주로 김창협, 김창흡의 계열을 잇는 김원행, 박윤원, 홍직필의 계열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주로 서울, 경기
지방의 洛下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들을 낙론(洛學派)라하고 반면에 수암과 남당의 이론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병계, 윤봉구, 매봉,
최징후, 봉암등 주로 충청도 근방에 살았기 때문에 호론(湖西學派)이라고도 한다.
3. 호락논쟁의 전개과정
1)人物性同異 논쟁
한원진은 人物性異論을 주장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릇 성을 논하는 이는 모두 기질을 따라서 이름을 붙였다. 性은 理가 氣中에 隨在한 뒤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인성과 물성은 각각 다르다. 만물이 각기 天命의 전체를 갖추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모두 五常의 全德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다. 천명을 超刑器한 것을 말하고, 오상은 기질을 따라 붙인 이름이다. 천명은 太極인데, 태극은 陰陽五行의 理이다. (중략) 오상은 모두 物을 따라서 定體를 갖고 일을 따라서 定名을 갖기 때문이다. (중략) 태극 즉 천명과 오상은 서로 다른 두 理가 아니지만 명목이 다르므로 지적하는 내용도 동일하지 않다. 또 性이 있으면 情이 있고, 體가 있으면 반드시 用이 있다.” 이러한 한원진의 견해는 사실상 “동물도 오상을 갖고 있다”라고 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이는 물성과 인성이 다르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성만이 오상이라고 할 수 있지 物의 성은 오상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에 반해 이간은 인성과 물성이 동일하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요지는 이렇다.
“
이른바 健順五常은 덕은 음양오행의 理이다. 음양오행이 갖추어진 뒤에 조화가 이루어져 만물이 난다. 人과 物이 만나서 이 氣를
고르게 얻었으니 또한 이 理를 고르게 얻었음이 분명하다.... 理는 一原이지만 氣는 고르지 않다. 그러므로 음양오행 중 正通한
것을 얻으면 사람이 되고 偏塞한 것을 얻으면 物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사람이 人理를, 物이 物理를 얻음이 이른바
各得이다.”
이간은 이렇게 한원진의 의견에 반대한다.
이러한 한원진과 이간의 대립은 서로 간에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한, 특히 오상에 대한 개념적인 분석의 차이에서 기인하며, 인과
물의 지위에 대해 논한 것은 아니다. 한원진은 본연지성에서 태극․천명을 오상과 나누어 생각했다. 그는 태극․천명은 형기를
초월한다고 하고, 오상은 단지 본체가 사람의 形氣 중에 수재하여 따로 속성이 된 것이어서, 오상의 완전히 갖추어진 人과 그렇지
못한 物을 다르다고 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이간은 본연은 하나의 보편적인 근원 즉 一原을, 氣質은 異體로 지적하고, 一原으로 볼 때 人과 物은 서로 같으나,
異體로 볼 때는 서로 氣質之性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하였다. 인과 물은 각각 오상의 성을 갖는데, 다만 기질의 차이에 따라서
사람은 순수한 오상을, 物은 잡된 오상을 가진다고 하였다. 이에 인과 물의 형기가 이미 다르므로, 그에 깃든 性도 따라서 같지
않다고 하였다.
2)未發心體純善有善惡 논쟁
人物性同異의 논쟁은 發하기 이전의 심체의 문제로 옮겨져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는 未發한 心體는 純善한 것인지 아니면 선과 악을
모두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 한원진은 心의 작용에 역점을 두면서 미발은 선악의 가능성을 가진다고 보고,
이간은 心의 본체에 역점을 두어 미발을 순수한 理로서의 선이라고 보았다. 이는 양측 간에 미발한 심체 자체에 대한 불일치 때문에
발생하는데, 이간은 미발심체를 오직의 심의 湛然虛明한 것으로만 보고, 한원진은 미발심체를 湛然虛明한 것뿐만 아니라 氣稟不齊의
淸濁美惡까지 내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다시 또 심체를 보는 차이에서 발생하는데, 이간은 그것을 기질이 배제된 순수한
明德이라고 이해하고, 한원진은 명덕과 함께 기질의 차이까지를 내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3)聖凡心同異 논쟁
이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물성동론자들은 未發心體純善을 주장하면서 心의 본체를 明德이라고 보아, 명덕은 인간이면 성인과 범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까닭에 명덕을 지니는 인간의 마음은 한결같이 동일한 것이지, 심체는 기질에 관련하여
해석할 수 없이 항상 선하며, 다만 범인은 그 기질지성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성인과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 동론자들의 주장이다.
이에 반하여 한원진을 중심으로 한 인물성이론자들은 未發心體有善惡을 주장하면서 心이 비록 명덕과 같은 허령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본바탕이 기로 이루어기기 때문에 그 기질이 가진 淸濁秀拔의 차이라 고려하면 선악의 가능성을 함유한다고 생각하여 선악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즉 성인은 淸秀한 기질을 가져 가장 허령한 심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그 마음은 텅 빈 거울과 평형된 저울과
같이 항상 선의 본질을 유지하나, 범인의 심체는 기질이 탁박하여 선행으로 발휘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4)호락논쟁의 종합
人物性同異에서 시작된 호락 각 학파의 논쟁은 未發心體有善惡 논쟁과 聖凡心同異 논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성범심동이
논쟁에서 성인과 범인의 차를 구별할 때, 호론 측은 기질을 먼저 고려하기에 성인과 범인의 구별을 확고히 하였다. 이에 범인도
성인이 될 수는 있으나, 범인은 그 기질이 나쁘기에 성인에 이르기가 힘들다고 보았다.
한편 낙론은 성인이나 범인이나 같은 명덕을 가지기에 그 심체는 동일하나, 기질지성이 다르기에 성인과 범인이 구별된다고 봄으로서,
즉 기질의 고려를 나중에 하기에 범인도 기질을 좋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낙론은 상대적으로 호론에 비해
실천적인 경향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인물성동이에서 호론은 人과 物이 다름을 역설하여, 倫理와 物理가 분리되어야 하며, 윤리를 더욱 중시하는 경향을 지니게
되는데, 이는 퇴계학에 상당히 근접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호론은 율곡학파의 맥을 이으면서 이를 더욱 심화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낙론은 인과 물이 다르지 않음을 주장하기에, 윤리 또한 물리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율곡의 기발일도설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理의 지위를 고양시키는 이른바 친퇴계학적 형태로 나타나는 율곡학의 비판적 계승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4. 조선 후기 사회에서 호락논쟁의 의의
1) 조선 후기 시대 상황과 호락논쟁
서론에서 밝혔다시피 정묘, 병자 양 호란은 조선 후기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고, 이는 그동안 조선을 구성해 오고 운영해 오던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충격으로도 볼 수 있다. 그간 조선은 기자동래 이후 小中華를 자처해오며 오랑캐를 멀리하는 華夷論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양 호란에서 무참히 패배하며, 삼전도에서 인조가 굴욕을 당하는 순간 최고조에 이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벌론의 등장은 당연한 것이었다. 임금이 굴욕을 당한다는 것은 곧 나라가 온 백성이 굴욕을 당한다고 인식되는 상황에서,
그 굴욕을 씻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청의 명을 멸하고 중화의 패자가 되고, 조선의 예상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도 멸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번영해 나가는 과정이 있었다. 즉,중화의 청 저항 세력과 힘을 합쳐 청을 치려던 북벌론은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일이된 것이다. 북벌론이 이렇게 실현 불가능해지자, 북벌론은 애초의 명분론적인 모습보다는 동원 체제 하의 왕실의
실추된 명예의 회복과 내부 단속을 통한 왕권 강화의 실리적인 모습을 띠어갔다.
청이 시간이 갈수록 강성해지고, 북벌론은 실현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청에 대한 시각의 변화, 즉 종래 화이관의 변화 및 새로운
세상을 위한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그동안 조정은 예송논쟁 등을 통한 붕당간의 대립 속에서
각 학파와 그에 따른 정치적, 사상적 견해의 차로 분화되어 가는 시기였다.
이때 등장한 호락논쟁은 人物性同異論과 聖凡心同異論을 통해 청을 중화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논쟁하지는 않았지만,
이 같은 해석을 할 수 있게 하는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즉 호론의 인물성이론과 성범심이론은 인성과 물성은 다르며, 범인이
쉬이 성인이 될 수 없게, 성인과 범인의 차를 엄격히 구별함으로써, 청에 대한 관점을 기존의 화이관에 따라 분명히 하였다. 즉,
기존 주자의 화이관에서 인과 물 사이에 오랑캐가 존재한다는 관점으로 청을 여전히 오랑캐로 보며, 조선은 여전히 화로 보아
북벌론의 정당성과 추진을 역설하였다. 반면에 낙론의 인물성동론과 성범심동론은 인성과 물성을 같게 보고, 범인도 노력하여 기질을
변화함으로써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을 하여, 비록 오랑캐인 청이 명을 치고 중화를 차지하였으나 ,중화의 문화를 받아들여
교화될 경우 중화가 될 수 있음을 보여, 기존의 화이관에 대한 수정을 가능하게 하였다.
2)조선 후기 사상사적 발전과 호락논쟁
호론은 현실적으로 당시 상황에서 당면한 예학적 질서를 재편하는 데 필요한 理氣心性說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특히 그들은 인성의
五常과 물성의 天命은 그 의미에서 차이가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인성의 고유성을 강조하며 그러한 고유성의 구현인 오륜적 질서의
타당성과 그 합리성을 강조하려는 입장의 차이를 보여 주었다. 결국 호론의 주장은 기질의 차이를 신체적인 차이뿐만 아닌 도덕적
의식의 차이로까지 연장해서 파악할 것인가의 문제에 귀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의 전개과정 속에서 율곡학을 더욱 심화시켰으나,
결과적으로는 명분과 윤리를 강조하는 퇴계학에 유사한 관점을 갖게 되었다.
낙론은 그들의 학문적 근원인 율곡학을 전면적이기보다는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어, 퇴계학과 율곡학을 절충하는 모습을
띄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낙론의 일각에서는 이기심성론에 국한되지 않고 名物道修之學이라고 하는 객관세계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이들은 주자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하는 학풍이 태동되게도 하였다.
이런 학풍 속에서 구체적으로 들어난 것이 박지원, 홍대용 등의 북학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만물은 균등하다고 주장하며,
사람의 입장에서만 세계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사물의 입장에서도 사물을 바라보는 객관적, 상대적 관점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과점의
상대화, 객관화는 중세 사회의 계층적 질서를 부정하고 근대적인 사회 질서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중요한 사고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화이론에 기초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세계의 시각에서 재검토하는 사고의 전환을 이루는데 인물성동이
문제의 탐구가 중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3)조선 후기 성리학 발전과 호락논쟁
성리학에서의 성이 동일한 용어임에도 각기 다른 차원에서 개념정의가 가능하다는 것은 주자철학 내의 모순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중시해야 할 것은 이것이 어떤 의미로 말하여지든 간에 단순히 사실적으로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상으로도
고려된다는 것이다. 맹자에 의거한 本然之性이 五常이고 그 五常이 善한 것이라는 점, 즉 善惡의 관점에서 고려된 것임은 분명하다.
다른 한편 本然之性으로서의 太極 역시 ‘天地萬物之理의 總和’라는 사실적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라 ‘天地萬物에 있어서 지극한 善의
표준’이라는 선악적 가치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고려된다. 따라서 애초에 주자가 논한 인물성론의 의의는 인성과 물성의 동이를
깨달아 인간만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人性의 善하고 고귀한 가치를 깨달아 현실에서 도덕적 실천을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성과 물성의 동이를 각각 주장한 외암과 남당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외암에게서는 本然性이 지닌 善의
본래적 절대성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성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남당에게서는 本然性이 지닌 善의 이질적으로
독특한 고귀성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권의를 확립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南塘은 人性이 物性보다 더 귀함을
巍巖에게 역설한 바 있다. 더욱이 두 사람의 이론이 주자 철학이 가지는 모순의 선별적 편향이라는 측면에서 주자 철학의 특성적
발전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인물성동이 논쟁에서도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미발심체의 문제는 그 성이 현실 속에서 발현되기 직전의 모습을 논의한 것이었다. 이는
理와 性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 것이었지만 성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이제는 급박한 조선말기의 현실
속에서 실질적으로 작용하는 심의 근원 문제로 초점이 모아지게 되었다. 그 심의 핵심문제는 明德의 문제였다. 이에 이항로, 이진상
등은 인물성동이 논쟁을 거쳐 明德, 朱理, 朱氣 논쟁, 또는 심설 논쟁이라 불리는 새로운 문제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5. 결론
이상으로 조선 후기 사회에서 중요한 사상적 논쟁이었던 호락논쟁의 배경, 발발 원인,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조선 후기 사회에서의 시대적 상황, 사상사적 의의, 성리학의 발전 과정에서 의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를 정리해 보면 호론은 율곡의 학풍을 더욱 심화하여, 인성과 물성, 성인과 범인은 기질의 차이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에 당시 청의
존재를 여전히 오랑캐로 한정하고 윤리와 도덕적 의식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는 명분론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퇴계 이후 형성된 남인 중 기호 남인 계열의 명분론적 입장과 다를 바 없기도 하다. 즉 가장 율곡적인 호론과 가장 퇴계적인
기호 남인 계열이 다 같이 명분론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인데, 이는 퇴계와 율곡 이전에 주자학의 본질이 이러한 화이론적 명분론과
윤리와 도덕의식의 강조에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낙론은 율곡의 학풍을 퇴계학과의 절충을 통해, 인성과 물성, 성인과 범인은 다르지 않으며, 다만 기질의 차이가 성인과
범인을 판별하기에 범인은 기질의 개선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음을 밝혀, 양 호란 이후 청을 중화로서 인정하고, 청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개편 속에서 보다 능동적이고 탄력적인 대처를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인성과 물성이 다르지 않음 속에서 윤리와
물리가 다르지 않다고 하여, 객관적, 상대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여, 이른바 북학파를 비롯한 실학사상과 연계되었다.
한편 호락논쟁은 정국의 당시 주도 계층이던 노론 내부에서만 발생하였다. 이러한 호락논쟁에 대해 남인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성호 이익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인물성론이 이야기되었고, 이는 다산 정약용에 이르렀다. 퇴계 이후
남인, 특히 성호학파와 정약용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들의 경세치용적인 학문의 추구는 노론과 낙론을 계승하는
북학파와는 다른 또 다른 실학의 계통을 형성하게 된다.
호락논쟁은 단순히 성리학 내에서의 이론 논쟁으로만 한정시켜 볼 수는 없다. 정묘, 병자 양 호란 이후 조선 사회가 입은 충격과 급변하는 세계질서의 변화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자연스런 사상 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유학사>, 이명수, 아세아문화사
<한국유학사상론>, 윤사순, 열음사
<조선유학의 자연철학>, 한국사상연구회, 예문서원
<조선유학의 학파들>, 한국사상연구회, 예문서원
<한국철학사상사>, 한국철학사연구회,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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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ni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