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주 편집자인 아내가 일거리를 받아와 열심히 교정을 본다. 세계의 명화를 소개하는 책인데 나름 꽤나 번역 좀 하신 분이 하신 거란다. 하지만 출판사 담당자에게 화가의 이름은 다 찾아봤으니 안 찾아봐도 될 거라 했던 번역자의 말은 Murillo를 '무리요'가 아닌 '무릴로'라 한 데서 이미 뻥임이 드러났다. 에스파냐에서 모음 앞에 오는 'll'은 'ㄹㄹ' 아니라 반모음 [y]라는 건 에스파냐어를 배우지 않은 나도 아는 외래어표기법이며, '무릴로'가 아닌 '무리요'라는 화가의 이름은 이제 겨우 미술사 책을 뒤져 보기 시작한 나도 아는 이름이다.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무리요'에 관한 건 일을 막 시작할 때 발견한 사안이니 얼마나 더 많은 문제점이 발견될지 알 수 없다는 우려는 금세 또 증명됐다. Immaculate Conception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원죄 없는(무원죄) 잉태' '무염 시태' '동정녀 잉태' '성모 수태' 정도로 번역해 쓰이는 말로, 가톨릭에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려 뜻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처녀로써 잉태했음을 일컫는 종교 용어이다. 기독교가 사회 전체에 깊숙히 뿌리 내린 서구 사회에서는 상당히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기에 미술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번역자는 conception이라는 말에 경도된 나머지 '순결 개념'이라 번역했다. Immaculate Conception은 위키피디어에도 등재된 단어이며, 필리핀에는 Immaculate Conception 대학교도 있다. 한마디로 번역자는 미술에 대한, 기독교 혹은 종교에 대한 기본적 소양이 없는 사람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인터넷서점에서 검색해 보니 72건이 나온다. 대부분 국내 유수의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작이다. 게다가 어린이용 영어 교재도 쓰는 사람이다. 아내 말로는 영어를 번역한 문장의 질은 높다 한다. 즉 딱 전문 번역가이다. 하지만 그는 미술 책을 번역할 만한 사람은 못 된다. 앞서 말했듯 영어 이외의 외국어에 대해서는 확인하고 수정하려는 노력이 불성실하며, 미술과 종교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문외한이다. 이런 번역자의 원고를 대하는 편집자, 그것도 외주 편집자의 심정은 미치고 환장하겠다 정도 되겠다. 아내는 차라리 문장 번역의 수준은 낮아도 미술 전공자가 한 게 훨 낫겠다 한다. 어법도 말도 안 되는 문장 뜯어고치는 일 역시 미치고 환장할 일인데, 차라리 그게 낫다 하니 할 말 다했다.


아무래도 앞으로 책을 살 때에는 반드시 번역자의 이름을 확인할 듯싶다. 문장의 오역도 큰 문제이지만 인명이나 지명 같은 고유명사가 틀린 책을 사 봤다 나중에 알면 나 역시 미치고 환장할 테니까.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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