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 - 조르주 뒤비 지음, 채인택 옮김, 백인호 외 감수/생각의나무 |
어느 ‘아틀라스키드’의 지름질
얼마 전 나는 ‘헐리우드키드의 생애’를 본떠 ‘아틀라스키드’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정의를 내려보면 “어렸을 적부터 사회과부도를 가지고 지도를 보는 재미에 빠져들어 성인이 돼서도 틈만 나면 지도를 보며 뉴스나 책에서 지리적 사실, 역사상 위치와 관련된 사안이 나오면 낼름 지도부터 들여다보는 사람.”
이런 정의에 의하면 나는 ‘아틀라스키드’라고 할 수 있다. 농담 삼아 “사회과부도로 한글을 깨우쳤다”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책은 동화책도 그림책도 아닌 ‘사회과부도’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사회, 역사, 지리였다. 그리고 좀 더 좋은 사회과부도(역사부도와 지리부도를 포함)를 볼 수 있다는 점은 행복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내용면에서 고등학교 사회과부도를 넘어서는 지도책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부동산정보와 도로운전용을 제외한 지도책은 국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이 세계지도책도 변변한 게 없어 대형서점의 해외서적 코너를 뒤져야 했고 차츰 나는 지도를 보는 데 공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2년 전 지오프리 파커의 《아틀라스 세계사》가 번역돼 출간되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지도에 대한 열기가 이미 식은 뒤였다.
올해 들어 뒤늦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e북으로 읽는 바람에 당시 지리적 배경이 궁금해 목이 마르던 나는, 어느 날 한 인터넷 서점에서 프랑스 백과사전 출판의 명가 라루스(Larousse)의 《Grand Atlas Historique》 2002년 판을 번역한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에 대한 대대적인 광고를 봤다.
… 520장의 섬세한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사의 현장들. … 아날학파의 거장 조르주 뒤비가 책임 편집하고 프랑스 최고의 전문가 70여 명이 함께 저술한 초대형 역사 이해 프로젝트.
아마 다른 책이었으면 그냥 빤한 과장 광고라 생각해 무심히 지나쳤겠지만,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사’라는 말에 눈이 번쩍 띄었다. 낼름 사기에는 턱없이 비싼 가격이었지만, 제대로 된 지도책이 나온다는 말에 눈이 먼 나는 “또 지르냐”라는 주위의 만류와 뒤비의 책은 가격대 만족비가 나쁘다는 평을 무시하고 기어이 ‘지르고야’ 말았다.
생각 이상으로 두껍고 커다란 책을 받았을 때, 그리고 책 한 쪽을 펼쳤더니 ‘30년 전쟁과 그 결과’라는 지도가 보였을 때 이미 승부는 끝나 버렸다. 좋은 지도책 하나 건졌다는 흐뭇한 마음에 그 어떤 문제점이 보일지라도 이 책은 처음으로 보는 사회과부도를 넘어선 제대로 된 지도로 된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모든 것이 용서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한계, 유럽 편향적인 편집
먼저 목차를 보자. 각각의 지도를 하나의 장(章)으로 봐 목차에 명기한 이 책은 크게 ‘서기 1000년까지의 고대 세계’ ‘서기 1000년 이후 유럽의 역사’ ‘서기 1000년 이후 유럽의 국가들’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1990년 이후의 세계’로 구성됐다. 서기 1000년을 역사의 큰 구분점으로 삼는 아날학파의 역사관과 유럽사를 중심으로 하면서 다른 대륙사를 덧붙인 다분히 유럽 중심적인 세계관이 먼저 엿보인다.
이러한 유럽 중심적 세계관에 대해서는 ‘지도로 보는 세계사’가 아닌 ‘지도로 보는 유럽사’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유럽을 벗어나면 70여 명이나 되는 편집진의 규모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관련 지도가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한국은 중국사의 한 귀퉁이에서 속국으로 묘사돼 있기 일쑤며, 한반도만 나온 지도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3장과 북한의 핵위협과 관련된 지도가 달랑이다. 목차에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로 명시돼 있지만 지리상의 발견 때 태평양 항로를 제외하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딱 2장만 실린 오세아니아에 비하면 감지덕지(?)이다. 아메라카와 아프리카도 마찬가지다. 유럽인의 침략과 그 후의 사건을 제외하곤 실린 지도가 적어 편집진의 의도적 누락 내지는 타문명권에 대한 무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철저히 사료를 중심으로 역사 변화의 큰 흐름에 주목하는 아날학파의 주관심사로 볼 때 아날학파의 거두인 조르주 뒤비가 책임 편집한 이 책이 유럽 편향으로 쓰였다는 것은 애초에 예상된 이 책의 태생적 한계이다.
대신 이 책을 유럽사만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대적으로 사료 확보가 용이해 그렇겠지만 다양한 지도가 실려 있어 역사적 사건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요긴하다. 가령 2차 포에니전쟁 당시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알프스산맥을 어디로 넘었으며 이후 어떻게 이탈리아반도를 헤집고 다녔는지, 영국의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인구밀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근세 주요 사건 때마다 프랑스에서 주요 정당의 지지율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로마네스크와 고딕 그리고 바로크 예술의 영향력이 어디까지인지 한눈에 보인다.
역사 공부의 필수품, 역사지도
전체적으로 이 책에는 각 쪽마다 한두 장의 지도, 그리고 그에 관련된 해설과 사진이 실려 있다. 지도는 생각 이상으로 지명 표기가 꼼꼼히 돼 있어 어떤 지도는 너무 많은 표기로 한눈에 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해설은 한눈에 읽기에 좀 작은 크기로 인쇄돼 있지만, 마치 노트 정리 잘하는 학생이 수업내용을 딱 요점만 잡아 노트에 적은 것처럼 별 다른 사관의 개입 없이 사건의 개요로만 깔끔하게 정리돼 있으며,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따로 빼어 설명한다. 단순히 지도만 보기에는 적잖은 배경지식이 요구돼 역사를 공부하는 데 먼저 펴들고 볼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의 존재의의는 역사를 공부하는 데 꽤나 유용한 참고자료라는 것이다.
사건사 중심으로 명료하게 정리된 해설에서 보듯이 이 책의 편집 방향은 특정 역사적 사건에 대해 대체로 공평하게 접근했다. 사실 역사지도는 역사가가 말로 떠드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거짓말이 덜하다. 지도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말의 편견이 작용할 가능성도 있지만, 대체로 역사지도는 사료를 바탕으로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사실과 그 방향성을 지도에 담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파리가 어디에 있고, 영국인들이 지금의 프랑스 땅을 얼마만큼 잠식했는지는 공통된 사료로서 존재하니까.
역사는 현 시대 사람들이 경험하지 않은 과거의 사실이기에 개인 혹은 집단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역사는 R. G. 콜링우드가 이야기한 것처럼 역사가에 의한 구성적 상상력(constructive imagination)에 의한 스토리텔링의 결과물로서 존재하기 마련이다. 역사수업에서 사건사와 연대기만 줄줄 외우는 데 식상한 아이들은 공상을 하든 책이나 드라마를 차용하든 저마다 스토리텔링을 하며 자신의 역사관을 확장시킨다. 그런 아이들에게 역사지도는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뜀틀이면서 상상에 몰두해 비약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매트리스의 역할을 한다. 저자인 조르주 뒤비는 이를 반영하듯 서문에서 “지도는 … 역사교육의 보조수단으로서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 지도를 이용한 수업은 지구상에서 벌어진 과거의 일들의 전체적인 의미망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라고 말한다. 흔히 역사와 지리는 시간이라는 씨줄과 공간이라는 날줄을 엮어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지도로 보는 세계사, 혹은 세계사지도로서 이 책은 각 학급마다, 아니면 학교도서관에라도 반드시 비치돼야 할 책이다. 아이들이 역사수업이 끝나마마자 쪼르륵 지도책 앞으로 달려가 ‘영국이 전 세계를 이렇게나 많이 지배했어’ ‘뭐야,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잖아’를 외칠 수 있을 때 역사는 비로소 암기과목의 오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설사 그렇지 않아도 도서관에 가져다두는 순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책을 빤히 들여다보는 아틀라스키드들이 줄을 설 것은 불을 보듯 빤하다. 그들의 상상력에 우리는 경배의 잔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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