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다니던 데에서 논술고사 대비용 단행본을 만든다고 해서 썼던 글인데, 아주 당연하게 예상했던 대로 계획이 엎어지면서 졸지에 오갈 데 없게 된 글이다.


 시장의 신화를 벗겨 내다
― 칼 폴라니, 《거대한 변환》
 
칼 폴라니와 그의 경제이론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일반적으로 경제학 안에서는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칼 폴라니의 경제이론은 애덤 스미스로부터 출발해 알프레드 마샬에게서 체계적인 틀을 갖춘 학문이 된 자본주의 경제학은 물론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체계화된 사회주의 경제학과도 모두 차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이나 상품을 비롯한 경제학에서 언급되는 경제학적 개념의 기원과 인간의 살림살이livelihood로서 경제활동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기에 경제 자체에 대해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간과하고 넘어가기 힘든 인물이다.
먼저 서울대에서 2005학년도 모의고사와 2008학년도 예시문제로 두 차례 출제된, 칼 폴라니의 대표적인 저작인 《거대한 변환 : 우리 시대의 정치적․경제적 기원》을 발췌한 제시문을 중심으로 칼 폴라니의 경제이론을 살펴보자.
2005학년도 모의고사에 출제된 제시문에서 눈에 띠는 것은 ‘자기조정적self-regulating시장’과 ‘허구적 상품’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 시장은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적정 가격을 스스로 찾는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칼 폴라니는 그러한 시장을 ‘자기조정적’ 시장이라고 지칭한다. 그런데 칼 폴라니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시장이 존재하며 이에 따라 경제구조가 성립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장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속에서는 무엇이 왜 거래되고 있는지를 인류학anthropology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경제학에서는 시장이든 자본주의든 인간의 경제활동에서 종착점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사회주의 경제학에서도 자본주의 이후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며 결승점을 설정한다. 하지만 폴라니는 시장이나 자본주의 같은 경제학적 개념과 구조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경제현상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다시 이야기할 형식주의와 실재주의 논쟁에서 다시 설명한다.

자기조정적 시장과 허구적 상품의 출현
먼저 《거대한 변환》의 주된 내용인 시장체계에 대해 폴라니의 이론을 들여다보자.
우선 우리가 흔히 시장market이라고 단순하게 말하는 자기조정적 시장은 본질적 형태가 아닌 전제조건으로서 기존의 거래 상품인 재화와 용역뿐만 아니라 노동, 토지, 화폐 같은 허구적인 개념까지도 상품으로서 교환이 가능하고, 이러한 개별 상품이 각각 교환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시장의 형성을 방해해서도 안 되며 판매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소득이 형성되어서도 안 된다.

시장경제란 시장들로 이우러진 하나의 자기조정체계를 가리킨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오로지 시장가격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경제이다. … 자기조정이라는 것은 모든 생산활동이 시장 판매를 위해 수행되고 모든 소득이 그와 같은 판매로부터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생산요소에 대해서, 그러니까 재화(항상 용역도 포함)뿐 아니라 노동, 토지, 화폐에 대해서도 시장이 존재한다. … 국가와 국가정책에 관련된 몇 가지 전제가 따른다. 시장 형성을 방해하는 것이 없어야 하고, 판매 아닌 다른 방법으로 소득이 형성되어서도 안 된다. 또한 재화의 가격이든 노동이자 토지, 화폐의 가격이든 시강 상태의 변동에 따른 가격조정을 방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일단 경제영역과 정치영역이 분리되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중상주의와 그 이전 시대처럼 정치와 경제가 혼합된 혹은 경제가 정치에 종속된 상태로부터 경제영역이 분리disembeded된 상태가 되어야 한다. 예컨대 중상주의시대에는 산업에 대한 중앙 정부의 간섭이 일상적이어서 시장은 자기조정이 불가능했으며, 지주나 길드 같은 전통적인 이해집단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노동과 토지가 상품으로서 거래되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식민지 경영과 산업혁명에 따른 무역과 산업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계층인 상공인들은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상품은 물론 노동력과 부존자원이 자유롭게 거래될 수 있기를 원했다. 또한 과거처럼 중앙집권형 정부의 간섭 아래서는 이전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난 교역량을 일일이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시대와 사회의 변화 요구에 따라 시장 스스로가 공급과 수요를 조정하며 가격과 공급량을 결정할 수 있는 자기조정적 시장이 만들어졌으며, 그러한 시장에서는 노동과 토지, 화폐 같은 허구적인 상품도 자유롭게 거래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등장한 자기조정적 시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시장시스템의 성립됨에 따라 정치영역으로부터 분리된 경제영역은 바야흐로 인간의 살림살이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내 인간사회 전체가 경제체제의 부속물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경제에 있어서 ‘거대한 변환’이다.

자본주의의 도래, 보편적 결과인가 특수한 과정인가
이러한 자기조정적 시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간섭의 배제 말고도 앞서 말한 허구적 상품인 노동, 토지자원, 화폐자본의 상품으로서 거래가 요구되었다. 흔히 생산의 3대 요소라고 불리는 이들 생산요소는 각각 임금, 지대, 이자라고 하는 요소가격이 주어졌으나,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자유롭게 거래될 수 없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의 율법에 의해 고리대금행위가 금지되는 것은 물론 이자를 받는 행위조차도 금지된 시기가 있었다. 또한 산업화 이전 대부분의 인간은 노예나 농노처럼 토지에 귀속되어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이 지주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토지도 상속을 통한 제한적인 주인의 변동이 있었을 뿐 거래 자체는 그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태인들에게 부분적으로 대부업을 허용했던 것처럼 차츰 이자의 부여가 사회적으로 통용되었고, 인클로저운동을 통해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여겨지면서 대지주와 중소지주, 그리고 농민들 사이의 거래가 있게 되었으며, 스피남랜드법구빈법의 폐지 등으로 토지로부터 종속이 풀린 농민들은 지주나 국가의 보호 없이 스스로가 도시에서 임금노동을 통해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는 순간 노동력은 마치 상품처럼 거래되기 시작했다.
칼 폴라니는 애덤스가 《국부론Wealth of Nation》을 쓴 1776년이 아닌 스피남랜드법의 폐지1834로 인해 인민들이 먹고살 길은 오로지 임금노동으로만 가능하게 되면서, 즉 노동시장이 형성되면서부터 자기조정적 시장이 완성되어 지금의 자본주의가 도래했다고 한다. 《거대한 변환》의 4장 〈사회와 경제체계〉를 보자.

시장경제란 시장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자기조정체계를 가리킨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망하자면, 이것은 오로지 시장가격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경제이다. 외부의 도움이나 간섭 없이 전체 경제생활을 꾸려 낼 수 있는 경제라면 대체로 자기조정적이라고 할 만하다. … 역사와 민족지를 보면 대개 시장제도를 갖추고 있는 경제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 시대 이전에 비슷하게나마 시장에 의해 지배되고 규제되는 경제는 없었다. … 출발점으로서 우리는 먼저 원시인의 이윤추구 편향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가설 저변에 깔린 19세기적 편견을 제거해야만 한다. … 최근의 역사학적, 인류학적 탐구 결과에 의하면 인간의 경제는 대개 사회적 관계 속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재화를 소유한다는 개인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회적 입장, 사회적 요구, 사회적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한다.

여기서 폴라니는 애덤 스미스가 언급한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이 원시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가설에 반기를 든다. 이를 위해 그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태평양의 도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경제활동을 탐구한다. 앞서 말했듯 인간의 경제활동은 정치활동 등에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각 부족/민족의 사회적 특성에 따라 각각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특히 생산과 분배라는 경제활동마저도 호혜recoprocity와 재분배redistribution, 집안살림householding통해 공동체적 원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발표했다. 그렇기에 애초에 인간의 “경제체계는 사회조직의 일개 기능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지점에서 칼 폴라니가 말하는 경제는 각 시대와 사회상에 따른 ‘재화와 용역을 제공하기 위한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이외에 다양한 형태의 경제체계가 존재했고, 각각의 경제체계를 하나의 실재實在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실질주의/실재주의substantialism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애덤 스미스 이후 자본주의, 특히 자유주의 성향의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형식주의formalism과 다르다. 이들의 형식주의적 관점은 시대와 사회의 다양성을 불문하고 시장체계는 인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의 이론적 기초는 애덤 스미스의 호모 에코노미쿠스처럼 ‘조금 써서 많이 얻으려는’ 합리적인 행동원리, 즉 이윤극대화의 원리에 입각해 경제체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애덤 스미스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저마다 손해 보지 않으려 하기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격과 공급량이 균형점을 찾는다고 하고, 그것을 시장이라고 규정지었다.

악마의 맷돌, 시장에 의한 사회통합
2008학년도 서울대 예시논제에 실린 제시문은 “인간과 자연 환경의 운명이 순전히 시장 메커니즘 하나에 좌우된다면, 결국 사회는 폐허가 될 것이다”라는 칼 폴라니의 경고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칼 폴라니는 (자기조정적) 시장을 ‘악마의 맷돌’로 비유한다. 이는 본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밀턴Milton〉에 쓰인 시어로 산업혁명이라는 기술발전과정이 문화를 파괴하는 현상을 지칭한 것으로, 칼 폴라니는 극단적 이윤추구를 위해 스스로 기능하는 시장의 무자비한 속성에 의해 인간의 살림살이가 효율성에 지배당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데 쓰였다.

공업생산은 이제 상인이 매매사업으로 조직하고 있던 상업의 부속물적 지위를 탈피하게 되었다. 공업생산은 이제 그에 상응하는 위험을 갖는 장기투자를 수반하게 되었다. … 이들 생산요소 가운데는 노동, 토지, 화폐의 세 가지가 물론 특히 중요했다. 상업사회에서 이들의 공급은 단지 하나의 방법, 즉 돈으로 구입함으로써 조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생산요소는 매매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것은 시장 시스템의 요구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런 체제에서는 상호의존적이면서 경쟁적인 시장들을 통한 자기조정작용이 보장될 때만 이윤이 확보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 바꿔 말하면 시장 시스템의 발전은 사회조직 자체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사회는 모든 측면에서 경제 시스템의 부속물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칼 폴라니는 “노동이 다른 생존활동에서 떨어져 나와 시장법칙에 종속된 결과, 모든 유기적인 생활형태는 근절되고 전혀 다른 원자적, 개인주의적인 조직으로 대체되었다”라면서 자기조정적 시장에 의해 사회의 총체적인 체계가 통합되면서 그간 인간의 생존을 보호해 온 전통적인 보호체제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발생한 노동력 착취, 환경오염과 자연고갈, 식민지의 빈곤, 과잉공급에 의한 경제공황 같은 문제가 일어나 인간은 물론 자연까지 존재를 위협받게 되었다.
폴라니는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생산물의 자유시장에서 거래가 성장, 확대되어 가면서도 앞서 말한 시장의 폐해로부터 사회를 지키려 하는 반작용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모순이 발생되었고, 이는 다시 제국주의 국가 간 대립, 외환의 압력, 실업, 계급 간 대립, 파시즘의 발현 등을 야기시켰다고 한다. 여기서 폴라니는 기종의 신고전학파 경제학자와 사뭇 다른 의견을 펴는데, 이는 이러한 시장경제가 서구 유럽에서 주도적인 경제체계가 되는 데는 국가의 절대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시장과 같은 경제영역은 정치사회영역에 포함된 부수적인 것이었으나, 자유무역, 금본위제, 구빈법 철폐 같은 국가 차원의 규제를 통해 현대적 개념의 시장과 자본주의가 태어나게 된다. 시장에 의한 자유방임국가의 고전적 모델인 영국이 자유방임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 전체적으로 강력한 규제정책을 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폴라니가 말하는 역설, “자유방임은 국가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이다.

폴라니는 자기조정적 시장에 의해 통합된 사회체제를 허물고 사회의 완결성을 유지하면서도 인간 생존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사회로부터 분리된 경제영역을 다시 사회로 환원reembed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를 필요로 하는 문화적 영역과 통제를 필요로 하는 경제영역을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폴라니의 주장은 미래사회에 대한 명확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장경제와 사회의 관계를 서유럽의 좁은 시각이 아닌 다양한 시대와 사회의 역사적 맥락을 포괄적으로 통찰한 폴라니의 시각은 경제인류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칼 폴라니의 저작 :
《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 박현수 옮김, 민음사 1991(절판)
《사람의 살림살이Livelihood of Man》 1, 2권, 박현수 옮김, 풀빛 1998
《초기 제국에 있어서의 교역과 사상》 이종욱 옮김, 민음사 1994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홍기빈 옮김, 책세상 2002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 제임스 R. 스탠필드 지음, 원용찬 옮김, 한울 1997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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