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학교의 행복 찾기 - 여태전 지음/우리교육 |
간디학교에서 학생들은 정말 행복할까
- 《간디학교의 행복찾기》, 여태전 | 우리교육
#1
간디학교는 비록 특성화고등학교와 자율학교 시범학교라는 정부가 붙인 딱지를 붙이고 있지만 그 본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안학교이다. 점점 대안학교를 표방하는 학교가 늘어나면서, 간디학교 사태를 통해 대중들에게 대안학교 내지는 대안교육이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일상화된 하나의 교육담론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 대안이 도대체 무엇에 관한 대안이냐?" 하고 물어오면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렵다. 종종 이런 말을 받고 나름대로 설명하긴 하지만, 왠지 뒷맛은 개운치가 않다. 그 까닭은 '대안'이라는 말이 '어떤 것을 대신하는 다른 방법'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육'이라는 말 앞에 붙은 까닭에 더욱더 쉽게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18p).사실 대안학교라는 말 앞에는 기존의 학교가 대신해야할 무언가가 있는, 깨놓고 말하면 문제 학교라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말을 꺼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문제 학교는 어떤 학교를 말하는가? 저자는 간디학교의 창립자인 양희규 선생의 입을 빌려 말한다.
고등학교 시절은 악몽 같았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중략) 학교를 '수용소'라고 생각했고, (중략) 양희규 선생은 잘못된 교육제도 때문에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이 상처 입는 꼴을 견딜 수가 없었다(59p).양희규 선생은 왜 자신이 다닌 학교를 '수용소'라고 고백했을까? 저자는 그에 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우리 사회의 일류병과 학력주의는 온 국민의 생활 전반을 '식민화'하고 있다. 일류병은 필연적으로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패배의식과 열등의식을 갖고 하고 나아가 '들러리 인생'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억압한다. 이 같은 교육 상황을 사회 구조악(구조화된 악)으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그 대안을 찾고자 간디학교를 연 것이다(67p).양희규 선생을 비롯한 대한민국이라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 다녔거나 다니고 있는, 아니 다녀야만 하는 학교를 양희규 선생은 '사회 구조악'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이자 근원이 '입시 위주의 교육'이며 이는 "학부모, 교사, 교육 관료, 정치가 모두가 공모자가 되어 '입시 위주의 교육 체제'라는 철옹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기 때문(74p)"이라고 주장한다. 거칠게 말하면 기존의 학교는 앞에서 말한 '문제 학교'이자 '불행한 학교'라는 것이다.
좀 더 나은 교육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입시 위주의 교육 체제'를 부정하거나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교육 체제를 구성하는 지금의 학교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학교라는 존재가 근대 교육의 산물이자 공교육의 전형이다 보니, 그것의 효용성과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그것들을 위협할 수 있는 부메랑으로 작용될 수 있을까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경쟁과 효율성만을 강조하며 사이비 교육인 사교육의 입김이 점점 세지는 상황에선 더욱더 위험한 행동으로 생각되고, 또한 그렇게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학교를 바라보는 서너 가지의 생각이 들어난다. 하나는 '학교'란 공간 자체를 부정하며 '배움'의 공간을 학교에 한정시켜선 안 된다는 이른바 '탈학교론'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학교의 문제점을 인정하지만, 공교육의 전형이며 교육의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선 학교란 공간은 불가피하게 존재한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엔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 우리 사회를 좀 더 행복한 사회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도 있다. 양희규 선생은 그런 '행복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간디학교를 만들게 된 것이다.
#2
그렇다면 현직 일반학교 교사인 저자는 대안학교인 '간디학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세상에 관해, 교육에 관해, 내 삶에 관해 서서히 체념과 냉소에 젖어들 무렵 간디학교를 만났다. 간디학교는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여전히 교육에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흔들리던 나는 간디학교를 만나면서 다시 곧추서게 되었다(19p).간디학교를 좋아하니깐 책을 썼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저자는 간디학교를 통해 '행복한 학교'가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음을 책 전반에서 담담히 고백한다. 그리고 간디학교를 비롯한 대안학교의 '행복한 학교' 만들기 실험이 계속되면 일반 학교도 언젠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이 책에서 간디학교의 탄생에서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기존의 학교가 '행복한 학교'로 변모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그것을 통해 오늘날 공교육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한다.
저자는 왜 간디학교를,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대안학교를 기존의 학교에 대한 '대안'이라고 생각했을까? 저자는 간디학교의 교육철학을 설명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유를 간접적으로 밝힌다. 간디학교 교육철학의 핵심은 '사랑과 자발성의 교육'이다.
간디학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서로에 대한 믿음, 서로의 행복과 기쁨을 비는 순수한 마음, 그것을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사랑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적절한 교육과 습관과 노력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다. (중략) '자발성'의 원리는 모든 가르침과 배움은 자발성을 가질 때만 그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강제로 혹은 타의로 마지못해 이루어지는 가르침이나 배움은 결코 기쁨을 주지 못라며 오히려 불행과 고통을 초래한다고 본다(72p).간디학교는 이런 교육철학과 함께 추구하는 학교의 모습을 '행복한 학교'라고, 그것의 교육목표를 '전인적인 인간, 공동체적인 인간, 자연과 조화된 인간'이라고 정의내린다. 그런데 이런 교육목표는 일반학교에서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이러한 말들이 교과서 안에만 있을 뿐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 있다. 아무리 좋은 이념과 교육목표라고 하더라도 현장의 실천 원리로써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한낱 구호로만 그치는 것은 문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대안교육은 이 같은 이념과 현실의 불일치를 어떻게 하면 더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 데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중략) 지난 반세기 동안 유지되어 온 공교육 체제는 이와 같은 이념과 교육목표를 실천하기에는 처음부터 그 시스템이 잘못 짜여졌다고 볼 수 있다. (중략) 게다가 '물질적 근대화(또는 압축 근대화)'가 낳은 우리 사회의 갖가지 사회병리현상 특히 교육 영역에서만 본다면 우리 사회의 학력주의와 과잉 교육열 속에서 전인적인 인간을 육성한다는 것은 말뿐인 구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안학교는 바로 이러한 근대화 과정이 낳은 '구호뿐인 어두운 그늘'을 걷어 내고자 하는 의지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78∼79p).#3
대안학교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있지만 간디학교를 일반학교의 '대안'이라 생각하는 것은 섣부르다. 저자 또한 "간디학교는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 진행형'이다"라며 밝히고 있으며, 간디학교의 아쉬운 점과 문제점을 솔직히 지적하고 있다.
간디학교가 처한 가장 큰 문제점은 아마 기존의 공교육 체제와의 갈등과 긴장이 아닐까 한다. 기존의 미인가 학교에서 특성화고교로 인정받고 자율학교 시범학교 지정 받으면서,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지정된 교육과정 이수 요구 등을 받아들여야 함은 자유와 자발성을 추구하는 대안학교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재정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공교육의 위기 상황 속에서 이를 극복할 새로운 교육을 열어 보자는 뜻에서 제도권으로 들어온 것이다(68p).하지만 2000년 경남교육청이 간디중학교 해산 명령을 내렸던 것처럼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름에서 기인하는 수많은 난관을 맞닥뜨려야 했다. 교육청의 양희창 교장에 대한 고발과 학교-학부모-시민단체의 연대 투쟁의 대결 구도 속에 간디학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대안교육에 관한 담론을 생성시켰지만, 결과적으로 중학교 과정을 타지로 옮기면서 사실상 교육 당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만다.
아직도 공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행정기관은 중도 탈락자들을 위한 대안교육 기관은 허용하면서도 간디중학교와 같이 새로운 교육철학과 교육방법을 주장하는 대안학교는 공교육 체제로 들어오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반면에 자립형 사립학교의 형태로 운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현실이다(147p).저자가 말한 것처럼 교육 당국은 부적응아를 위한 대안학교는 골칫덩어리를 대신 맡아줄 기관으로 인식하지만, 대안적 가치와 체제를 지향하는 대안학교는 그들이 구축한 시스템을 거부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이단아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점은 학교가 국가의 일관된 시스템과 철학에 의해 운영되어야 하는 것인가, 특히 교육이 의무이자 권리라는 점에서 의무교육을 단순하게 '의무취학'으로만 해석할 것인가 같은 문제이다. 알다시피 근대 교육의 핵심은 국가에 의해 통제된 공교육 체제이다. 공교육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무엇을 배우는 것인지를 이야기해 보기도 전에 국가(정부)는 교육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보편성과 공공성만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저자는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는 보편성과 공공성의 추구는 자유 없는 평등을 추구하는 왜곡된 사회주의와 다를 없다(220p)"라며 다양성과 보편성의 두 축이 조화와 상생의 원리로 작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4
저자는 5장과 6장에 거쳐 간디학교 내부, 특히 교사와 학교 공동체가 어떠한 문제점에 직면해 있는지를 설명한다. 간디학교의 교사는 좁게는 기존의 학교라는 공간이 가진 구조악을, 넓게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한계에 대한 불복종과 도전을 위해 모인 집단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공동체를 지향하며 '자발적인 가난'을 통한 청빈한 삶을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이런 이상과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의 간극은 크다. 특히 '잘 가르쳐야 한다'라는 사명을 갖고 학생들을 만나가는 대안학교의 교사들에게 그 간극은 더더욱 크다. 그렇다면 간디학교가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은 무엇일까?
간디학교는 작은학교를 지양한다. 그들이 추구하고자하는 교육과정은 다양하게 특성화되고 세분화되어 있다. (중략) 교육과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면 한 교사가 두세 개 교과를 맡거나, 아니면 교과별로 교사를 모두 채용해야 한다. (중략)대안학교 만큼이나 대안적인 교사 공동체를 꿈꾸었던 간디학교의 교사 공동체도 이상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뚜렷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다. 게다가 간디학교 사태 이후 교사들은 갈수록 교육 외적인 일로 바빠져서 쉽게 피로해지고, 정작 '아이들에게 민감한 교사'로서 자기 정체성을 찾기 못했던 것이다.
간디학교는 정부의 재정결함보조금으로 임금을 받는 '발령 교사' 집단과 학교법인이 필요에 따라 자체적으로 채용한 '미발령 교사' 집단으로 나누어졌다. (중략) 외형적으로 볼 때 그들 교사 공동체 내에서는 발령과 미발령의 차이는 없다. (중략) 교사 공동체 내규에 따라서 월급은 똑같이 나누어 가진다고 하지만, 미발령 교사는 일반학교 교사가 누리는 각종 사회복지 정책의 혜택을 누릴 수가 없다. (중략) 무엇보다도 미발령 교사는 사회적으로 교사로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심리적 상실감을 가지는 듯하다. (중략)
또 하나, 간디학교 교사의 임용구조의 현실에서 주목되는 것은 교사들의 '잦은 이직 문제'이다. (중략) 간디학교의 정체성을 놓고 논쟁하다가 교사 여섯 명이 떠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교사들이 간디학교를 떠나는 이유는 개개인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보통 경제적인 이유, 교사 공동체 내의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157∼159p).
간디학교의 교사 조직은 수평적인 관계에서 민주적인 토론문화를 형성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그들의 회의나 연수도 간디학교 사태 이후 '소진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지적하는 교사도 있다. (중략) 전체 교사가 공유하지 못하는 일을 침묵으로 일관하는 회의 풍토는 염려스러운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장차 대안학교인 간디학교도 전통적인 학교 조직의 특징처럼 '관료제화'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중략) 이런 염려 속에서 간디학교 교사들도 갈수록 교직 사회 특유의 '개인주의적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내부 비판도 나온다(164∼165p).
한편, 이런 교사 공동체의 문제와 함께 간디학교를 어렵게 한 것은 대안학교인 간디학교조차 대학 입시와 수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국가에서 인정하는 졸업장조차 별 관심 없었던 학부모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 입시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관해 학교철학을 위협하는 언행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들 또한 그런 욕구를 내보였고, 학교는 교육철학의 기본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범위 안에서 자발적인 보충수업을 실시하기 이르렀다. 물론 일반학교처럼 대학 입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은 아닌 데다, 양희규 선생부터 "대안학교와 대학 입시를 반대 관계로 봐서는 곤란하다. 전인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을 고수하면서 학생들이 원하고 얼마든지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대학진학이라고 판단되면, 열심히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것은 대안교육의 개념에 전혀 배치가 되지 않는다(169p)"라며 대학 입시에 대한 분명한 관점과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하지만 양희규 선생은 물론 저자조차 대학 사회에 대한 불신감을 내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 없이 학생들의 진로와 진학 지도에서 스스로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5
저자는 간디학교가 최종적으로 꿈꾸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자유인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핵심 교육이념인 자유와 자발성 문제는 아직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현재 간디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자유의 첫 단계인 해방의 단계까지는 나아가지만, 그 다음 단계인 선택과 책임의 단계로는 나아가지 못한다는 지적들이 번번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장인의 삶에 기초한 자유인을 기르자고 하는 그들의 교육 이상을 현실로 바꿔 놓기에는 아직도 많은 어려움이 있다(174p).자유와 자발성의 문제 앞에선 교사 또한 마찬가지다. "교사들에게 자유와 자율권이 지나치게 허용되다 보니, 교사들은 일체의 교육활동에 대해서 동료 장학이나, 지도·감독의 시스템이 조금도 없다"라는 일부 교사의 말과 함께 저자는 배성근 서기관의 "대안학교는 아이들의 자유를 위한 곳인가요, 교사의 자율을 위한 곳인가요?"라는 말(183p)을 통해 교사들이 자신의 영역 안에서 전문성과 탁월성을 갖춰 나가야 함을 지적한다. 이런 자성적 비판을 통해 삶과 교육이 일치하는 대안적 삶을 살아야 하며, 그를 통해 진정한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간디학교는 그들의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교육철학인 '사랑과 자발성'을 바탕으로 그들이 꾸려가는 공동체의 특성을 표현한 것이다. 간디학교는 이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관용' '이해' '배려' '신뢰' '정의' '용기' '성실'의 일곱 가지 덕목을 제시하면서 이것들을 생활화하는 실천을 강조한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학생들은 "사랑 받고 사랑하며 사는 사랑의 공동체는 물질적으로 윤택한 생활과 쾌적한 교육환경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188p)"는 것을 깨달아 왔다.
한편 교사들은 "결국 사랑의 능력을 가르쳐야 할 개개인의 교사들부터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사는 일이 일상화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아이들과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겠느냐(192p)"라는 질문을 받고 있다. 이는 새로운 학교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교사들조차 "일반학교 교직문화의 특성인 개인주의적 특성이 그대로 영속화되는 것(193p)"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간디학교 사태를 겪으면서 소진된 '토론 문화' 같은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으며 사태가 마무리되면서 점차 나아진다고 하지만, 거꾸로 간디학교가 안정화되면서 찾아오는 안주하려는 욕구 속에서 이 문제는 다시 불거지지 않을까 한다.
양희규 선생은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찾도록 안내해 주는 교육, '자기발견의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을 추구하고자 했다. 저자는 본질적의 교육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을 왜 새삼스레 강조할까?
오늘날 우리의 공교육(일반학교) 체제는 그 원리를 실천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구조화된 악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195p).간디학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발견의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을 만들고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간디학교라고 해서 이러한 문제 해결에 있어서 완벽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열등의식, 패배의식, 또는 냉소주의로 흘러들어 또 다른 불안과 초조를 확대재생산 한다. (중략) 서서히 꿈과 희망을 접으면서 일상성에 깊이 매몰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소외는 바로 여기서부터 싹이 튼다. 이렇듯 자기발견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의 악순환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행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 개개인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기발견을 통해 행복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196p)
실제 운영상에서 자잘한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으며, 아직 그 교육적 효과를 검증할 수 없는 실험 단계에 있다(198p).이런 문제들에 대해 간디학교와 교사들은 내부에서부터 그 진단과 처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거듭나기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을 넘어서 앞으로 그들이 만든 교육과정을 통해 어떻게 '탁월한 개인'을 키워내느냐라는 실천적인 모습이 요구된다. 또한 대안 찾기 과정에서 무엇을 '단절'시키고 무엇을 '연속'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동안 교육과정의 운영에서 인성 교육에 중점을 두다 보니 상대적으로 지식 교과를 소홀하게 다루었으며, 거기에 따라서 지적 탁월성을 이끌어 내는 데는 부족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199p).
현재 우리나라의 대안교육 운동은 기존의 주지주의적 교육 전통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했던 경험주의나 진보주의 교육이 지녔던 한계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한계를 갖는다. 교육과정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 중의 하나로서만 위치하게 될 뿐, 기존 교육의 정당한 대안으로서 작동하는 데에는 명백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된다(최도연, 200p).
간디학교에서조차도 "아이들의 학습 요구는 외면하고 교사의 의도대로 주입하고 가르치려는 전통적인 공립학교식의 수업 방식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배성근, 203p)
#6
저자는 간디학교를 통해 우리의 교육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려보려고 했다며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이것이 대안교육이요, 대안학교다'라며 말하지 못하며, 간디학교 또한 아직도 문제가 많은 학교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간디학교가 그동안 겪은 시행착오를 우리 교육을 살리는 희망과 꿈, 우리 교육의 어둠을 밝히는 '예광탄'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학교는 대안학교로 거듭나야 한다"라는 간디학교 교사들의 메시지를 전한다. 물론 그는 이 말과 함께 "모든 학교가 간디학교를 닮을 이유도 없고, 현실적으로도 그럴 수 없다"라며 우리가 선 위치에서 우리 여견에 맞게 '방향전환'을 하면 된다고 말한다.
학생 수로 비교한다면, 시골 대안학교 열 곳보다는 도회지의 일반학교 한 곳이 제대로 '돌아서기' 또는 '정상화'만 된다면, 우리는 시름에 빠진 아이들을 짧은 시간에 더 많이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221p).결국 저자도 간디학교를 세운 양희규 선생도 교육을 통해 '사회 구조악으로부터 아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간디학교가 지난한 과정 속에서 지금까지 견디어 온 이유이며,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모든 학교가 대안학교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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