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출판사 편집장이 자기 블로그에 최근 출판가 불황에 대해 자기 회사의 방침에 대해 포스트를 올렸다. "지금보다 생산량(출간 종수)을 두 배로 늘려서, 원활한 자금회전을 도모"하자는 게 회의 결과의 논지인데, 그 편집장은 그것에 대해 "회의를 통해 얻어진 것이라기보다는 회사에서 우리 부서에 내린 오더에 가깝다"라고 말한다. 책의 만듦새나 마케팅 전략을 종종 까던 출판사인데 아예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한마디로 사장에 대해 '이뭐병'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집 없는 사람이 많으니 집을 많이 지어야겠네'라는 말도 이렇게까지 비현실적이지 않다. (대부분 실용서와 자기계발서겠지만) 팔릴 만한 책만 골라 내겠다는 말이 차라리 낫다 싶다. 책을 고르고 만들고 팔면서 영혼을 괴롭힐지라도 기약도 대가도 없이 야근과 특근을 잔뜩 쳐 바른 막장의 길로는 안 이끌 수 있으니.
사장의 독단적 결정이 아닐지라도, 편집장이 악의적으로 왜곡해 포스팅했다 해도, 공급량을 늘려 금융과 시장을 활성하겠다는 그 어떤 정책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미 80여 년 전에 공급이 수요를 이끈다는 세이의 법칙은 무용지물이 됐다. 무용지물을 다시 되살리려 했던 레이거노믹스도 파산했고, 그마저도 다시 되살리려 한 신자유주의는 지금의 경제 불황의 근원이 됐다. 왜 이토록 반복되는 기본적인 패턴을 자꾸 망각하는가?
<사마르칸트의 황금궁전>을 끝으로 국내에 발간된 코르토 말테제 시리즈를 모두 구입했다. 보르헤스 전집(아내의 것)과 땡땡의 모험 시리즈 미구입분을 함께 매달 한 권씩 다섯 달에 걸쳐 샀는데, 시리즈 물을 한 달에 한 권씩 사는 맛도 은근 쏠쏠하다. 다음 주에 땡땡의 모험 중 <일곱 개의 수정 구슬>마저 사면 땡땡의 모험 시리즈 구입도 완결이다.
코르코 말테제 시리즈는 사실 위 다섯 권이 전부가 아니다. 위키에서 찾아본 코르토 말테제 시리즈는 모두 12권이며, 거기에 비공식 작품인 <코르토 말테제-회상록>(이건 만화가 아닌 듯)이 있다. 하지만 이 다섯 권이 아닌 다른 시리즈는 아마 한국어판으로는 보기 힘들 듯하다. 알라딘 기준으로 다섯 권 다 세일즈포인트가 500을 넘지 못한다. 즉 초판 초쇄도 못 팔았다는 이야기이다. 기 출간작이 이러한데 새 출간작을 내놓을 간 큰 출판사 사장은 없다. 아쉽다....
풍성한 고고학과 민속학 지식, 놀라운 용맹성과 위기 대처 능력, 어떤 이념과 국적에도 소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항해와 모험을 거듭했던 코르토는 ‘인디아나 존스’ ‘마스터 키튼’ ‘툼 레이더’를 탄생시킨 원초적 DNA다.
내 본디 방랑벽 따위는 없어 자유로운 영혼의 보헤미안이나 대양을 넘나드는 마도로스에게 취미는 없으나, 역사와 픽션의 틈바구니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설정은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산 <켈트 이야기>(서점에서 검색되는 순서가 아닌 위키에서 본 연도에 근거해 샀다)상상했던 것과 좀 달랐다.
도대체 뭔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는 몽상담(특히 스톤헨지에서으 낮잠)에 잘못 샀단 생각도 들었으나, 두세 번 더 읽어 보니 (일부) 사람들이 코르토 말테제에 빠져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종일관 비비 꼬아 대는 시니컬한 독설의 장광설, 거친 펜선, 그리고 유럽인들에게만 축적된 역사적 맥락을 살짝 걷어 내면, 앞서 말한 역사와 픽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를 벌이는 내러티브가 드러났다.
영 인디아나 존스나 마스터 키튼 시리즈를 좋아했던 이들은 능히 빠져들 만했다. 단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다섯 권 다 없다 볼 수 있다. 재미는 징그럽게 없는데 이상하게 빠져드는... 마치 팜므파탈인 줄 빤히 알면서도 그에게 빠져드는 순진한 청년 같다고나... 에쿠.
앞서 말했듯, 앞으로 코르토 말테제의 새 시리즈는 한국어판으로 볼 일은 없을 게다. 그렇다고 영어판을 아마존 등에서 사서 볼 일도 없다. 그저 애니메이션인 <코르토 말테제: 비밀의 궁전>(이마저도 내가 알기론 국내에서 정식으로 DVD 출시되지 않았다)정도나 구해서 보겠지. <염해의 발라드>를 비롯한 나머지 7권이 나를 애타게 찾을지라도.
초등학생 3학년 아들을 둔 한 선배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위기탈출 시리즈나 살아남기 시리즈라 한다. 책 사 주는 데는 인색하지 않지만, 선배는 도대체 왜 아이가 공룡 세계나 곤충 세계에서 살아남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다. 이번에 <바이러스에서 살아남기>가 나왔다는데, 앞으로 어떤 데서 살아남아야 하는 책이 나올까? 물론 아이도 그런 데서 살아남으려 읽는 게 아니라 그저 재미있으니까 사달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맘때쯤 여자아이들이 동화책을 읽는다면, 남자 아이들은 대체로 이런 책들 좋아한단다. 그런데 난 그때 어떤 책을 좋아했는지 기억이 가물하다. 초등 고학년 즈음에는 추리소설에 빠져들었는데, 중학년 시절은 위인전 말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나 또한 이런 종류의 책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 나이 때부터 씨잘데기 없는 데 참 관심이 많았던 나이기에 있었다면 분명 좋아했을 게다.
어제 모 1인출판사 사장과 점심을 함께할 자리가 있었다. 이제 과학/경제 교양 서적 10권 낸 신생 출판사 사장이신데, 얼마 전 모 인터넷서점의 본부장급 사람이 했다는 말을 읊어 주신다.
"인문교양 서적? 그거 사치품이죠."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단순한 텍스트 분석보다는 사장 분이 전해 주는 맥락 아래 해석하면 다음처럼 바꿔 이야기할 수 있다.
"인문교양 서적? 요즘 안 팔려요. 작년의 절반 수준밖에 안 팔려요. 불경기가 촛불 정국이다 사람들이 책을 통 안 사 봐요. 이런 마당에 자기계발서나 실용서가 아닌 인문교양 서적이요? 그런 책은 이제 돈 좀 있고 한가한 사람들이나 사서 읽는 사치품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살기 바빠서 책 못 읽어요. 이게 우리 현실이에요."
그러면서 사장은 5년 후 위기를 이야기하신다.
"5년 후가 문제예요. 5년 후면 386세대들이 모두 40대가 돼요. 지금의 인문교양 서적의 주 독자층은 30대인데, 그네들이 40대가 되면 책 못 읽어요. 먹고살기 팍팍하죠, 애들 크면 자기 책은 못 사 줘도 애들 책은 사 줘야 하죠."
실질적인 386의 끝 자락인 88학번이 이미 40대가 됐으므로 굳이 5년 후가 아니라 올해 이미 인문교양 서적 시장의 위기는 시작됐다. 불경기와 촛불 정국은 그저 하나의 변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장은 한 가지 희망을 이야기한다.
"지금의 10대가 20대가 되면 달라질 수 있어요. 이 세대들은 386 초기 세대의 자녀들이거든요. 어렸을 적부터 양질의 어린이책을 읽으며 자라난 세대예요. 촛불 시위의 초두에 10대들이 앞장선 거 다 나름 배경이 있는 거죠."
물론 장밋빛 환상일 수 있는 게 지금의 10대가 20대가 됐을 때 지금처럼 경기가 나쁘면 말짱 도루묵이 될 수도 있다. 악화된 불경기에서는 지금의 20대와 다를 바 없어질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의 10대와 20대는 질적으로 다른 세대이다. 입시지옥과 멸사봉공의 산업화 시대를 산 20대들의 부모인 70년대 학번과 10대들의 부모 세대인 386세대의 차이만큼이나.
리퍼러로그를 역추적하다 우석훈의 블로그에서 척추골반전위증(대부분의 검색은 척추전방전위증)이 우유와 관련 있다는 가설이 있다는 말에 이것저것 검색하다 발견한 책이 프랭크 오스키의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 이다. 저자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10장과 11장의 제목인 "우유를 당장 끊어라!"와 "송아지만 우유를 먹어야 한다"이란다. 특히 몇몇 리뷰를 훑어 보니 정말 먹어선 안 될 것이다. 특히 책의 뒷표지에 나온 걸 옮겼다는 다음 구절에서 질겁.
- 평생 우유 마신 사람 동맥 경화 앓는다!
- 우유는 철분 결핍성 빈혈의 원인!!
- 우유 지방은 콜레스테롤 덩어리다!!
- 아토피 피부염의 원인은 독성 탓이다!!
학교에서 먹는 우유도 모자라 하루에 1000ml 한 팩을 단숨에 마시던 네 살 아래 동생이 고등학생인 내 키를 훌쩍 넘겼음에도, 내 위가 우유를 썩 잘 소화하지 못하는 바람에(그리고 우유의 비릿함을 싫어해) 나는 우유 마시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준강제 급식으로 매일 우유를 마셔야 했던 시절에는 이래 뺀들 저리 뺀들 하며 우유를 곧잘 버리는 등 잘 마시지 않았던 게 천만 다행이다 싶다. 그리고 아내가 임신과 출산의 와중에 골반이 심하케 틀어졌음에도 모유 수유를 고집해 아이가 분유를 먹지 않아 아내가 무척 고맙다. 앞으로 아내가 얼마나 더 모유만 먹일 수 있는지, 아이가 평생 우유를 안 마시며 살 수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우유팩을 드는 순간 나를 엄습할 불안감을 나는 당당히 맞아드릴 것이다.
2003년에 나온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태이다. 언제 절판된 지는 잘 모르지만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가 1228 정도 되고 리뷰가 9개 달린 정도에 출판사 역대 판매량의 11위 정도면 굳이 절판시킬 만한 책은 아니다 싶다. 입시 전략과 주식 투자 관련 서적을 주종으로 삼는 출판사라 회사의 출간 경향과 안 맞아 정리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낙농업자와 정치인의 결탁으로 우유 소비를 권장하는 비도덕성을 고발한다."라는 책 소개의 마지막 구절을 볼 때, 낙농업계가 모종의 압박을 가한 건 아닌지 의심이 살짝 든다.
덧.
'오래 살고 싶으면'이라는 문구가 다소 마음에 안 들긴 한다. 하지만 목수정의 <뼛속까지 자유로운 치맛속까지 자유로운>에 나온 일화가 하나 생각난다. 요지는 목수정이 딸 칼리를 임신했음을 남자친구 희완에게 알리자 아나키스트로 가족 제도를 부정했을 법한 희완이 대뜸 담배를 끊겠다 선언했다고 한다. 이유는 "앞으로 자기는 오래 살아야 한다."였다.
W. H. 월쉬의 <역사철학>이 도착했다.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역사철학 강의를 듣기 전에 워밍업 차원에서 읽어 봐야
할 것 같은 모종의 불안감 때문에 구입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알뤼르님이 역사철학에 관한 책을 여섯 권이나 주문하시면서 불안감을
팍팍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똑같이 갈굼을 받아도 답변에서 차이가 나면 갈굼의 가중치가 높아질 듯한 불안감에 예습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예습이라는 것을 하다니. --; 복습도 안 하는데 말이야. 몇 권 찾아보니 일단 월쉬의 책으로 워밍업 하는 게
낫다 싶어 주문했다.
알라딘의 설명에서는 일단 좀 옛날 책처럼 보였는데, 역시나 그렇다. 표지의 "(수정판)"이라는
문구에서부터 80년대 책에서 주로 볼 수 있던 식자 인쇄한 티가 팍 난다. 본문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책에서는 볼 수 없는
글꼴. 촌스러운 듯하지만 정겨운 느낌도 난다.
판권을 찾아봤다. 수정판 7쇄 펴낸날 2006년 11월 30일. 책에
비해 인쇄는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수정판 1쇄의 펴낸날은 1989년 6월 20일. 맙소사 7년 동안 판갈이를 한 번도 안 했단
말이야? 그런데 2판도 아니고 수정판이다. 그렇다면 초판에서 오타 정도만 수정해 다시 찍었다는 말일 텐데, 초판 1쇄 펴낸날은
1979년 8월 5일이다. 거의 내 나이만큼 나이 먹은 책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뒤쪽 책날개를 보다 이번에는
껄껄 웃고 말았다. 자사의 도서목록을 적어 놨는데, 여기에는 "역사철학 W. 월쉬 김정선 6000원"이라고 적혀 있다. 참고로
이 책의 정가는 9,500원이다. 아마 "6000원"은 초판 또는 수정판 1쇄의 가격일 게다. 이런 것도 수정하지 않고 책을
내놓다니. 그것도 작년 연말에 말이다.
공부하려고 산 책인데도 서문이나 차례부터 볼 생각은 안 하고, 외적인 것
가지고 시비 중이다. 책을 만들면서 는 것은 남이 만든 책 흠잡는 법이다. 내가 만드는 책의 오타는 못 잡으면서 남의 책(특히
전 직장) 오타는 기가 막히게 찾지는 못해도 꼭 발견하면 그거 가지고 갈군다.
어제는 문득 추리소설에 대해 궁금해졌다. 발단은 다른 사람의 책을
찾느라 헌책사랑에 등록된 개인책방을 뒤지던 중 황금가지판 셜록 홈즈 전집을 발견해서였다. 물론 그것은 품절 상태라 구매할 수
없었지만, 인터넷서점에서는 정가보다 30% 할인된 가격으로 팔고 있어, 헌책과 새책의 가격 차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셜록
홈즈 전집을 황금가지에서만 파는 것도 아니고,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전집이나 애거서(아가사가 익숙한데...) 크리스티
전집에도 관심이 갔다. 게다가 그것뿐이겠는가?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전집도 나와 있고, 레이몬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나
엘러리 퀸의 저작도 기억 났다.
고등학교 때는 음악과 라디오, 중학교 때는 피시통신에 꽂혔더라면 초등학생 고학년부터
중1 정도까지 내 관심사는 추리소설이었다. 이웃동네 사는 한 살 많은 육촌형과 나는 틈만 나면 추리소설을 돌려봤다. 생각해 보면
그리 많은 종수를 읽은 것 같지는 않지만, 애거서 크리스티, 모리스 르블랑과 엘러리 퀸의 주요작이나 셜록 홈즈의 단편은 어짓
읽었던 듯싶다. 다른 작가의 작품은 그다지 접하기는 힘든 시대였을 듯싶지만, 그래도 추리소설가를 소개하는 다른 책들을 통해 얼추
지형도 정도는 알고 있었던 듯싶다.
얼마 전 <필름2.0 >을 보는데 까치에서 아르센 뤼팽을 번역해 낸
성귀수의 인터뷰가 실렸었다. 역시나 검색을 해 보니 황금가지판과 까치판을 가지고 인터넷 지식검색에서는 전쟁이었다. 대체로 번역의
퀄리티와 상세한 역자 해설이 실린 까치가 우세하나, 표지 디자인이 예쁘다며 황금가지판을 추천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체로 7:3
정도? 내친 김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도 찾아보니 해문판과 황금가지판이 역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귀가해 두 출판사 중 한
곳에서 일했던 아내에게 물으니 해문판이 낫다는 평을 한다. 물론 크리스티재단에서는 황금가지판을 인정해 주고, 저작권 문제로
해문판은 80권에서 더 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전집이 될 수 없고 베스트선집일 뿐이라는 비판도 검색된다. 내침 김에 브라운
신부와 필립 말로도 검색해 봤는데 그럭저럭 주요작은 한 곳에서 다 출간된 듯싶다. 엘러리 퀸은 여러 군데에서 나와 다소
헛갈리지만...
읽지 않아도 왠지 서가를 채우고 싶은 추리소설의 주요작들. 본디 장르문학은커녕 문학도 잘 읽지
않는데 왠지 추리소설만큼은 어렸을 적 기억 때문인지 눈길이 간다. 그 참에 서가에 있는 단편선을 읽어 봤다. 딱 펴 본 스티븐
킹의 단편 <금연주식회사>. 오우... 으스스하군. 담배 끊길 잘했어. 검색해 보니 할리웃에서는 옴니버스로,
국내에서는 베스트극장에서 단막극으로도 만들었다고 한다.
'도서관은 여전히 살아있나 봅니다'라
는 글을 읽으니 착잡하다. 도서관 확장 계획에 1억 달러를 기부한다는 뉴스는 그렇다 쳐도 clio님이 정리한 뉴욕과 서울의 공공
도서관 실태 비교 자료를 보니 한숨이 다 나온다. 이미지를 퍼 오기는 좀 뭐해 표를 따로 만들었다. clio님에 따르면 이
자료는 "한국 도서관 협회에서 발행한 2006년판 한국도서관연감과 뉴욕 공공 도서관에서 발행한 Fact Sheet 2006 (for FY 2005) 중의 일부를 비교한 것"이라는데, 이 자료에는 별개의 도서관 시스템이라는 퀸즈와 브루클린의 도서관 시스템은 누락된 자료라고 한다.
뉴욕 공공 도서관
서울 공공 도서관
도서관 수
89
54
직원 수
3206
1050
소장 권 수
5060,0000
569,1448
이용자 수
1360,0000
3067,0409
연간 이용비
2854,1862,0000
434,5442,4000
지역 내
도서관 수야 뉴욕과 서울의 규모와 인접 지역 차에 따라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이다. 일단 이용자 수는 두
배 - 물론 열람 및 대출 이용자가 아니라 일반열람실 이용자 수가 대부분이겠지만 - 가 넘는데 직원은 반토막도 안 되며, 소장
권 수와 연간 이용비는 당최 비교 자체가 민망하다. --; 거기에 뉴욕은 1억 달러를 기부하는 부자도 있다. 서울은? 답글을
보니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을 제외하곤 갈 만한 도서관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짜증나지만 수긍한다. "10만 권이래야
일반적인 서가 간격으로 학교 교실 두 개 면적이면 다 찹니다"라는데 뭐 더 할 말이 있겠는가.
갑자기 내
사는 동네에 소재한 마포도서관(정식 명칭은 마포평생학습관)은 소장 권 수가 얼마나 되나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아동서 포함 도서만
193,419권이다. 직원은 별정직과 기능직 포함해 41명인데(TO는 42명이며 수영장 등 주민편의시설 직원이 포함돼 있다)
이중 사서는 15명뿐. 그래도 서울 평균인 10,5397권, 19.4명에 비하면 꽤 큰 도서관이다. 하지만... 뉴욕에
비하면... 한숨 나온다. 그래도 마포구는 마포평생학습관과 그곳의 아현분관을 제외하고도 마포구립 서강도서관(어린이도서연구회 위탁
운영)이라도 있으니 1구 1도서관인 구보다는 좀 나을 듯. 구 내 소재 대학인 서강대와 홍익대 도서관이 주민에게 개방됐더라면 좀
더 좋겠지만 뭐 택도 없는 생각이라는 것 안다. 그러고 보니 월드컵공원 부지에 박정희기념관 대신 어린이도서관 만들기 운동이
있었는데, 그게 서강도서관으로 전환된 건가? 모르겠다.
아무튼 뉴욕과 서울의 사례를 비교하니 암담하다. 정말
clio님 말대로 대운하 판다고 삽질할 돈 10%만 공공도서관에 투여한다면 달라져도 많이 달라질 게다. 진보신당이든 민노당이든
이런 부분 좀 신경 써 줬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민주당이 관심 가져준다 하면 영혼이라도 팔지 모르겠다. --; 2MB의
한나라당은 절대 이런 데 신경 안 쓸 것이기에 영혼 팔 일은 없어 보인다.
은연중에 나를 교도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은 교주가 된 선배가 책을 냈다. 교주께서 교도에게 30% DC해 줄 테니 20권을 팔아 오시라 계시를 내리셨다. (저자가 현재 한국에 없는 관계로 복잡하게 꼬여 일단 저자 할인 구매는 보류입니다. --;) 버는 돈을 온전히 기저귀 사는 데 쏟아 부어야 하는 교도는 대신 블로그에 광고성 포스트를 남기기로 했다. 참고로 서문에는 교주의 가장 충성스런 교도였던 내 이름도 나온다
프롤로그: 낡은 투쟁과 연대가 무너지다 청년실업: 24시간 직업을 구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난민: 하루짜리 비자가 평생이 되다. 이주노동: 내일 또 누군가의 하인이 된다 성노동: 산업은 있지만 노동자는 없다 슬럼과 성채도시: 웅크리고 앉아 다음 재난을 기다린다 해방신학과 빛나는길: 국가가 사람을 악마로 만든다 공정무역과 혁명세: 그래도 마오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교육권:그들을 가르치고 싶다 식량주권: 내 이웃에게 닭을 팔고 싶다 건강권: 이윤보다 생명이다 에필로그: 다만 싸움이 충분하지 않다...
국
제연대운동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미련 없이 보따리를 싸서 비행기를 탄지 10여년이 되어간다. 그때는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영국으로 유학을 준비하려던 때였다. 마침 한국 사회는 IMF 금융위기가 터져 그동안의 성장에 대한 낙관적인 분위기는
일거에 사라지고 패닉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접해왔던 신자유주의니 세계화니 하는 단어가 한순간에 책속에서 기어
나와 모든 사람들의 삶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길거리에는 노숙자들이 넘쳐나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계속해서 보도되었다. 대학생들도
등록금 때문에 휴학을 대거 하고 있었고, 취직을 할 수 없게 된 졸업생들은 도피형으로 대학원을 오거나 졸업을 일부로 미루고
있었다.
이즈음 국제가톨릭학생운동IMCS 아시아 태평양 사무국의 활동가들이 서울을 방문하였다.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 연합회(서가대연)의 교육간사를 자원으로 맡고 있던 터라 이들을 따라다니면서 일정도 짜고 되지도 않는 영어로 세계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어나서 외국이라고는 일본을 달랑 두주정도 갔다 온 경험밖에 없는 나에게
그들이 전하는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에 불을
지폈다. 그들이 떠날 때 혹시 내가 유학을 ‘포기’하고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사무국에 와서 일을 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봤다.
그때 ‘하늘’인지 ‘마음’속인지 모르겠지만 소리가 들렸다. 이게 내 길이라고. 당시 서가대연의 지도신부였던 나승구 신부도
유학보다 백배 낫다고 격려했다. 미련 없이 보따리를 쌌다.
처음 IMCS 선배들을 만나 ‘아시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고 뭐라고 한동안 대답을 해야할지를 몰랐다. 60이 넘은 스리랑카 출신의 신부인 그에게 ‘나에게 아시아는
어불성설’이라고 대답했다. 사실 지금까지 나에게 스리랑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해봤자 달나라보다 더 먼 나라인데,
아시아라는 말이 그 스리랑카를 포함하고 있다면 나는 아시아를 모른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였다. 선배들은 껄껄
웃으면서 IMCS 사무국에 있는 동안 많이 배우라고 했다. 공식적으로는 아시아의 가톨릭대학생들을 연결하고 행사를 치르고 유엔과
같은 곳에서 그들을 대표하는 역할이지만 사실은 아시아를 배우고 세계에 대한 나의 이해를 넓히며 그 후에 전문적인 국제연대활동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제일 잘하는 것이라는 그들의 말은 엄청난 격려였다.
그
후 유엔 인권위원회(지금은 유엔인권이사회로 격상된)에서부터 세계사회포럼까지, 아프리카의 빈민가에서부터 엄격한 불교식 실천으로
대안을 실천하고 있는 태국의 산티아속 불교공동체까지, 전후 최대라고 한 2006년 청년실업에 반대하는 프랑스의 백만 시위에서부터
초국적제약회사의 선전물을 급습한 에이즈감염인들의 시위까지, 하루하루가 ‘세계’를 경험하고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경험뿐만이
아니다. 이 시간은 또한 내 눈앞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사건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언어를 필사적으로
만들어가는 공부의 시간이었다. 어느 때보다 많은 책을 읽고, 마이클 하트, 사이드 아민, 월든 벨로 등 저명한 학자들부터
풀뿌리활동가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세계를 설명하는 그들의 ‘언어’속에서 헤엄치며 내 언어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아래로부터의 경험과 백가쟁명식 논쟁에 참여하며 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 있었다. 흔히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데올로기의 가장 핵심에는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가 있다고 말을 한다.
공식적으로는 신념에 가득 차서 이것이 대안이다고 외치는 사람들조차 돌아서서는 대안은 없어라고 중얼거리고 있다. 그래서 많은
좌파들이, 특히 지식인들이 가장 과격한 언어로, 그러나 패배주의에 가득찬 태도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비판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한 것처럼 인간이 만든 체제인 자본주의의 끝은 상상할 줄 모르면서 차라리 손쉽게 지구의 종말을 상상해버리고 마는
불쌍한 존재이다.
그러나 세계화의 바닥에서부터 지금까지 관리되고 통제되기만 하던 사람들이 직접 싸움에 나서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싸움을 하며 희망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에이즈에 감염되어 사회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어 자기하나도 못
챙기고 죽는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태고적부터 농노이기만 하였던 사람들이 싸우며 희망을 만드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도저히 싸움이 가능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세상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고 가장
절망적인 곳에서조차 활동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대안마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념에 대한 엄격한 실천으로 삶의 가능성에
대한 강렬한 영감을 주었다. 이들이 나에게 보여준 것은 세계는 냉소와 패배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가능성이, 여전히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대안은 그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이런 점에서 맑스의 말을 뒤집어보면 우리는 세계를 변혁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세계를 설명할 수 없는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에 내가 쓴 글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세계를 바꾸어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계를 바꾸어내고 있는 그들이 말하는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을 보고 듣고, 참여하며 내가 얻은 영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글에서 나는 세계화를 세 가지의 얼굴을 가진
과정으로 나누었다. ‘세계화의 망명객’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의 세계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를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이주노동, 성노동을 중심으로 한 주변부 노동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노동의 세계의 변화는 사랑과 연애,가족과
친밀성의 구조, 심지어는 사람의 마음도 바꾸어 내고 있다. 삶, 인간 자체가 구조변동을 겪고 있다.
두 번째
장인 ‘국가의 경계와 새로운 중세’는 세계화가 밀어내고 있는 경계 밖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근대 국가가 형식적으로라도
세계를 빈틈없이 국가로 분할하고 국가 안에서는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이들을 통치하고 ‘보호’하려고 하였다면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국가안에 성채를 치고 성채밖의 사람들을 비국민으로 몰아내고 있다. 부르조아-성안의 사람들-과 성밖의 사람들로 국민들이
이분화되고 있는 셈이다. 싸센이나 하우만 등의 개념을 빌리면 글로벌 엘리트라는 새로운 부재지주들과 글로벌 하인들Global
Servants로 인류가 이분화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슬럼가의 도시빈민들과 안데스산맥의 인디오들의 해방신학과 빛나는 길,
그리고 필리핀 플렌테이션 농업노동자들과 그들을 둘러싼 필리핀 공산당의 마오주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계화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중세의
풍경을 전하려고 하였다.
마지막 장은 근대의 시민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다. 근대의 시민들은 국가에 복속하는 댓가로
‘권리’라는 것을 보장받았다. 누구나 교육을 받을 권리, 교육을 통해서 스스로의 사회적 신분을 이동시킬 수 있는 권리, 누구나
최소한의 의료보장을 통하여 생명을 지킬 권리, 그리고 굶어죽지 않을 권리는 근대 시민의 권리중에서 가장 중요한 권리이다. 이
장에서는 교육권과 의약품접근권, 그리고 식량주권이 어떻게 세계화에 의해 공격을 받고 시민들의 삶이 파괴되고 있으며 아래부터 어떤
저항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스케치하였다.
나는 내가 태어나서 받은 소명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저곳으로, 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곳의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하는 것. 때로는
저곳과 이곳을 하나의 맥락으로 묶고 이어주는 이야기꾼의 역할이 내가 잘 할 수 있고, 잘 해야 하는 일인 것 같다. 이건 한
선배의 말처럼 배운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이다. 이 책을 통해 얼마만큼 이 의무에 충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10년간의 경험을 나누는 첫 걸음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데 선동적인 제목에 비해 표지 디자인이 약하다. 저래서 책 좀 팔 수 있을까 싶다. 천 권 팔아야 인세로 백만 원 번다는, 사회과학 책 1천 권 팔면 대박이라는 한국사회에서 말이다.
프로그레시브락 밴드 Camel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많은 이들은 1975년작 <The Snow Goose>를
꼽는다. 폴 갤리코의 동명 소설 <The Snow Goose>를 모티브로 삼아 가사 없이 연주만 담은(여기에 관해서는
참 비극적인 사연이 있는데 뒤에서 따로 이야기) 앨범인데, 캐멀 라이브의 주된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어제 들은 이들의 첫 번째
라이브 앨범 <A Live Record>의 두 번째 시디에서는 <The Snow Goose>을 통째로
라이브 연주로 들을 수 있다. 캐멀의 연주는 라이브로 들으면 그들의 진가를 좀 더 알 수 있다.
캐멀의
<The Snow Goose>를 들은 지도 한 십 년이 넘는데, 오늘에서야 이 앨범의 원작 소설인 <The
Snow Goose>에 관심이 갔다. 'A Story of Dunkirk'라는 부제를 단 폴 갤리코의 <The
Snow Goose>는 영국 동부 에섹스 지방의 해안가 습지의 버려진 등대에서 세상 사람들과 절연하며 사는 외로운 장애인
레이아더(사람마다 발음이 다른데 책에는 '리야더'라고 나온다)와 그에게 상처 입은 흰기러기(스노 구스)를 데려온 어린 소녀
프리다의 우정을 다룬 어린이 단편소설이다. 영국 전역에서 100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스테디셀러란다. 하지만 이탈리아 출신의
영국 작가라는 누군가의 말에 영국식 발음인 '폴 갈리코'로 알라딘에서 검색하니 절판된 책과 일러스트가 없을 것만 같은 외서 한
권씩 딱 걸린다. 이런... 오기가 생겨 아침에 아마존을 검색했던 김에 다시 찾아보니 역시 주루룩까지는 아니어도 몇 권 나온다.
하지만 표지 일러스트가 공포물이다. 웩. 이것은 교보 외서 코너에서도 구할 수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구글로 검색하니 원문에 일러스트 몇 컷이 함께한 PDF를
구할 수 있었다. 역시 오래된 해외저작물은 PDF로 공개된 게 가끔 있다. 한 문단 정도 읽어 보니 호기심이 살살 발동한다.
이참에 이걸 한번 번역해 봐? 아내가 거의 수업료라 할 수 있는 과제로 얄팍한 책 한 권을 번역해 선생에게 제출해야 하는데,
아이 돌보는 것도 힘든데다 번역이라는 게 쉽지 않아 거의 손도 못 되고 있는데, 옆에서 함께 번역하는 것도 아내에게는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적 소양은 개나 줄 정도라 말끔한 번역은 못 되겠지만, 스토리를 보니 교과서에 실어도 될 듯싶기도
하고...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폴 갤리코'로 검색하니... 아놔 욕나온다. 있다. '갤리코'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등록돼 몇 권 검색되는 데다 내가 찾던 <The Snow Goose>도 <흰기러기>라는 이름으로 모
출판사에서 작년 말에 딱 내놓았다. 이런...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나 전에 다니던 회사를 꼬셔 출간까지 생각했던 나의 철없던
꿈은 이렇게 무너져 버렸다. 나도 용접하고 모래주머니 채워 넣고 철심까지 박아 놓을 걸.... 하여튼 이미 출간된 책이 있으니
쓸쓸한 마음은 소주 대신 커피 한 잔으로 달래고 주문. 교과서 지문으로 검토라도 해야 하니까. 그래도 호기심이 서린 책을 영문이
아닌 한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책을 읽으며 다시 캐멀의 연주를... 이번에는 스튜디오 버전으로 들어볼까?
책 한 권 달랑 들고 화장실에 갔는데 휴지가 없다. 핸드폰도 두고 와 외부와 연락할 길도 요원하면, 남은 것은 어떻게든 종이를 구해 처리하든지 아니면 자연건조 하는 법뿐. 차라리 신문을 들고 갔으면 괜찮을 터이지만, 하필이면 들고 간 책은 새로 산(정확히는 증정받은) 단행본. 책 좋아하기에 앞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은 책을 훼손하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화장실에서 탈출해야 하는데.
1/3쯤 읽은 책을 앞뒤를 들춰 본다. 다행히도 면지가 앞뒤 두 장씩 있다. 항상 책이라는 꼴을 보면서 불필요하다 여겼던 면지. 기껏해야 저자나 역자가 독자에게 사인해 주는 칸 정도로만 인식되는 면지. 그런 이유로 일부러 면지를 두지 않는다 말하는 출판사도 있었다. 이 사족 같던 면지도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보이기 마련. 그러나 대부분의 면지는 본문 용지보다 빳빳하다. 그리고 면지 한 장 뜯어 내려다가 본문 용지까지 함께 뜯어져 책 전체의 제본 상태가 흐트러질 수도 있다.
조심스레 면지 한 장을 뜯어 낸다. 최대 4장의 면지 중 그나마 한 장이라도 건지려면 조심스레 뜯어 내야 한다. 앞서 말했듯 다른 종이까지 뜯어지면 안 되니, 천천히 조심스레 뜯는다. 한 장의 노랗고 빳빳한 면지가 몸체에서 유탈했다. 다음은 휴지 대용으로 사용하도록 종이의 빳빳함을 없애야 한다. 옛적 신문지를 구기던 시절을 회상하며 뜯어 낸 면지를 구긴다. 종이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구기되 절대 찢어져서는 안 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은 언제나 힘든 법이다. 종이를 구길 때도 마찬가지.
조심스레 구기고 구긴 끝에 좀 전의 빳빳하기 그지없던 면지는 사라지고 신문지 정도의 경도만 남은 한 장의 휴지가 나타났다. 아, 한 장 아니 두 장을 더 만들어야 하나? 아니면 최대치인 4장을 만들어야 하나? 책으로서 애초에 지닌 의미를 살려야 할까? 지금 필요한 만큼 변용을 해야 하나? 잠시 짧은 선택의 순간이 화장실을 스쳐 간다. 결론은...
책은 본디 읽히려 만들어진다. 하지만 책은 베개로도, 냄비 받침으로 쓰이며, 또한 얼마든지 무기로도 쓸 수 있다. 어찌 됐든 책은 그것의 독창적인 꼴로 세상에 나타남으로써 모종의 구실을 수행한다. 하지만 가장 비참한 용도는 이렇듯 화장실에서 뜯어짐과 구겨짐, 그리고 휴지통 속으로 사라짐으로서 자신의 생을 다하는 것이리라. 뜯겨 나간 책의 한 부분 면지에게 애도를...
로버트 다운스가 쓴 <교과서가 죽인 책들>은 제목부터 인상적이다. 옮긴이는 이 책에 실린 책들이 "교과서에 몇 줄로 축약되면서 원래의 책이 갖는 의미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막았다"고 지적한다. 교과서를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다소 뜨끔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Books That Changed the World, 즉 '세상을 바꾼 책들'이라는 원제를 그딴 식으로 바꿔 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교과서는 애당초 아주 제한된 분량 안에 교육과정에 언급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내용을 균형감 있으면서도 미학적으로 잘 버무려 담아야 하는 특수한 책이다. 물론 분량이나 표현 수준에서 제약이 있고, 어느 정도 수정, 발췌가 용인되는 교과서라고 해서 앞뒤 잘라먹거나 저자의 의도를 제멋대로 훼손해 싣는 것은 응당 부적절하나, 그렇다고 책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사실 우리가 '고전'을 대하는 태도부터 점검해야 하지 않을까? 흔히 고전은 마크 트웨인이 "고전이란 누구나 읽었기를 바라지만 읽기는 싫은 책"이라 나름 내린 고전의 정의를 떠올려 보자. 이 말은 '누구나 내용에 대해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책'이라 다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차례를 읽으며 <교과서가 죽인 책들>에서 거론하는 책을 살펴보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뒤쎄이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 등. 우리는 교과서이든 다른 책에서든 이 책들을 숱하게 듣는다. 하지만 이 책은 교과서로 배우는 초중고등학생 시점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모름지기 고전은 그것을 읽을 만한 소양이 있어야 온전히 읽을 수 있다. 그런 소양을 미처 갖추기 힘든 학생 시절에는 일단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핵심이라도 잘 파악하고 있는 게 장땡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대학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에게 <군주론>이나 <꿈의 해석>을 발췌한 제시문을 가지고 논술문을 쓰라 하는 파렴치한 출제 경향이 외려 고전을 죽이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물론 고전을 고전답게 제대로 설명해야 함을 역설하는 옮긴이의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의도를 주장하는 데 지나쳐 '오바'했다 싶다. 다시 이 책의 원제를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 원제를 우리말로 옮기면 '세상을 바꾼 책'이다. 저자 로버트 다운스는 인류의 역사(물론 이 책은 서구의 역사를 빛낸 고전만 거론했다.)를 통틀어 획기적인 전환점 내지는 시사점을 던진 책에 대해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앞서 말했듯 대입 논술고사를 비롯한 시험을 공부하면서 대부분 고전을 접한다. 이렇게 읽으면 고전이 아닌 화석을 읽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고전을 읽을 바에는 차라리 당대의 현상만을 잘라 이야기하는 일부 사회과학 서적이나 감성적인 에세이를 읽는 게 낫다.
우리는 종종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종종 간과한다. 한마디로 고전은 그 시대와 당대의 지성의 결합체이다. 따라서 고전을 읽으려면 어떤 시대적 맥락에서 이 고전들이 쓰였는지, 시대와 고전이 어떻게 호흡했는지를 읽어 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좋게 말하면 '엑기스'만 낼름 잡숴 왔다. 그리고 고전을 읽으려 하는 사람을 책벌레나 공부벌레 정도로 취급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세계사를 바꾼 책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고전을 접해야 하는 이유를 대략적으로 이야기한다.
한편 책의 저자가 고전(학) 전문가가 아닌 도서관학 전문가라는 점이 눈에 띈다. 고전 전문가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저자는 도서관학을 전공하면서 접한 고전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다시 자리 매김 한다. 어떻게 보면 해당 고전에 정통한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도서관(학) 전문가가 질과 양으로 방대한 고전을 대중에게 좀 더 쉽게 전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고전에 관한 짤막한 맛보기의 묶음이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고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고전을 찾아 읽게 하는 데는 괜찮은 책이다. 다만 이 책 한 권 읽고 수많은 고전을 읽은 체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지금에서 대략 3~5년 전만 해도 가장 존경하는 작가를 꼽으라면 지체없이 신영복 선생을 꼽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때문이다. 근주자적스러운 세미나를 하면서 나름 말랑한 텍스트라 선배들이 생각해 교재로 선정돼 읽었는데 당시 내게는 상당한 충격과 감흥을 줬다. 더군다나 군대에서 신입 소대장이 가지고 있기에 낼름 빌려 다시 읽으며 감옥 생활과 진배 다를 바 없는 군 생활을 사유하는 나름의 매개체로 대했다. 제대 후 누군가에게 넘겨 준 지 오래된 햇빛출판사의 구판을 대신해 돌베개의 신판을 샀으며, 마찬가지로 <더불어 숲>이나 <나무야 나무야>, <강의> 같은 미디어 연재분을 묶은 책도 일부는 헌책일지라도 사두기는 했다. 하지만 사두기만 했을 뿐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에 대한 관심과 열의, 존경 등의 감정은 도서관 서가에서 찾은 빛바랜 햇빛출판사 구판 표지마냥 바래졌다.
이리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군을 전역하면서 통제된 사회 조직으로부터 나름 독립하면서 감옥이라는 조직이 만들어 낸 독특한 사유를 나와 연계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신영복 선생은 진보, 좌파, 개혁, 운동권 같은 일련의 집단에서 '스타'가 되었기 때문이다. 스타나 히어로에 관심 없는 나로서는 그에게 유명세가 더할수록 관심을 덜 가지게 됐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가 사상전향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그가 얽힌 추문 또한 들었다(특히 이 추문을 들었을 때 나는 충격받았다). 그리고 그는 점점 상품화됐다. 성공회대에 장학금을 준다는 명목 아래 써 준 모 소주병의 제호도 탐탁지 않았지만,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출판사 또한 그를 철저히 상품으로 만들었다. <엽서> 영인본이야 절판돼 레어템이 돼 재발간이 긍정적이라 보이지만, 연말마다 팔아먹는 탁상 달력과 <청구회 추억>, 그리고나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시리즈 중 신영복 편 같은 건 한마디로 재탕에 삼탕이 아닌가?
그중 가장 결정타는 <청구회 추억>이 되겠다. 증보판에 실린 몇 편의 짧은 글을 이런 식으로 단행본으로 만드는 건 아무리 봐도 탐탁지 않다. 증보판에서 '청구회 추억' 편은 분명 처음 구판을 읽었을 때와 다르지 않는 감흥을 줬던 건 사실이다. 제아무리 그림을 더하고 오디오북과 영문 번역문을 더한다 해도 이런 식으로 단행본을 만드는 건 신영복 선생의 팬의 주머니를 털어내려는 꼼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역시나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로 볼 때 적잖게 팔렸다. 사실 요즘 같은 불황기에 출판사로서는 고육지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 신영복이라는 이름 석 자는 잘 팔리는 아이템이다. "이 책으로 재미를 보고 나면 출판사에도 이후 '신영복 우려먹기'에 재미가 들릴지도 모른다"는 나귀님의 우려가 기우였으면 싶다. 하지만 불을 보듯 빤하지 않은가? 신영복 선생의 팬들이 자신들의 글을 모아 책까지 펴내는 마당에. 그리고 여전히 초청 강사와 필자로 최우선 순위로 꼽히는 '스타'이기에.
외주 편집자인 아내가 일거리를 받아와 열심히 교정을 본다. 세계의 명화를 소개하는 책인데 나름 꽤나 번역 좀 하신 분이 하신 거란다. 하지만 출판사 담당자에게 화가의 이름은 다 찾아봤으니 안 찾아봐도 될 거라 했던 번역자의 말은 Murillo를 '무리요'가 아닌 '무릴로'라 한 데서 이미 뻥임이 드러났다. 에스파냐에서 모음 앞에 오는 'll'은 'ㄹㄹ' 아니라 반모음 [y]라는 건 에스파냐어를 배우지 않은 나도 아는 외래어표기법이며, '무릴로'가 아닌 '무리요'라는 화가의 이름은 이제 겨우 미술사 책을 뒤져 보기 시작한 나도 아는 이름이다.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무리요'에 관한 건 일을 막 시작할 때 발견한 사안이니 얼마나 더 많은 문제점이 발견될지 알 수 없다는 우려는 금세 또 증명됐다. Immaculate Conception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원죄 없는(무원죄) 잉태' '무염 시태' '동정녀 잉태' '성모 수태' 정도로 번역해 쓰이는 말로, 가톨릭에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려 뜻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처녀로써 잉태했음을 일컫는 종교 용어이다. 기독교가 사회 전체에 깊숙히 뿌리 내린 서구 사회에서는 상당히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기에 미술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번역자는 conception이라는 말에 경도된 나머지 '순결 개념'이라 번역했다. Immaculate Conception은 위키피디어에도 등재된 단어이며, 필리핀에는 Immaculate Conception 대학교도 있다. 한마디로 번역자는 미술에 대한, 기독교 혹은 종교에 대한 기본적 소양이 없는 사람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인터넷서점에서 검색해 보니 72건이 나온다. 대부분 국내 유수의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작이다. 게다가 어린이용 영어 교재도 쓰는 사람이다. 아내 말로는 영어를 번역한 문장의 질은 높다 한다. 즉 딱 전문 번역가이다. 하지만 그는 미술 책을 번역할 만한 사람은 못 된다. 앞서 말했듯 영어 이외의 외국어에 대해서는 확인하고 수정하려는 노력이 불성실하며, 미술과 종교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문외한이다. 이런 번역자의 원고를 대하는 편집자, 그것도 외주 편집자의 심정은 미치고 환장하겠다 정도 되겠다. 아내는 차라리 문장 번역의 수준은 낮아도 미술 전공자가 한 게 훨 낫겠다 한다. 어법도 말도 안 되는 문장 뜯어고치는 일 역시 미치고 환장할 일인데, 차라리 그게 낫다 하니 할 말 다했다.
아무래도 앞으로 책을 살 때에는 반드시 번역자의 이름을 확인할 듯싶다. 문장의 오역도 큰 문제이지만 인명이나 지명 같은 고유명사가 틀린 책을 사 봤다 나중에 알면 나 역시 미치고 환장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