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낭 브로델
김응종 지음/살림


0.
내게 페르낭 브로델은 다소 골치 아픈 사람이었다. 대학 1학년 때 들었던 일반경제사 수업에서 선생은 둘씩 짝 지워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을 읽고 요약해 오는 과제를 냈다. 물론 과제는 발표와 연계됐다. 말이 요약이지 그것은 한마디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도록 하는 선생의 폭거였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일상의 이야기가 방대하게 망라된 한마디로 책을 붙잡으면 한숨부터 나오는 책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떻게 요약을 해 발표를 했는지 당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도무지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정말 나와 친구, 그리고 함께 수업을 듣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머리를 싸매 가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1권이라 하지만 상/하 두 권으로 돼 있으며 각 권은 꽤 두껍다)을 읽었다. 그리고 쓸데없이 양만 늘려 가오잡으려 한다며 브로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후로도 브로델이나 아날학파는 그리 좋은 인상은 남지 못했다. 그네들이 말하는 주장은 일면 동감하면서도 요약할 때 느꼈던 그 지난함은 그들을 미워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브로델 이후 아날학파의 거두가 된 조르주 뒤비가 편집한 <지도로 보는 세계사>에 환장하기 전까지는.

그러다 십여 년이 지난 후 나는 <역사철학의 이해>라는 강좌를 들었고, 그 강좌의 한 챕터는 역사이론을 소개하는데, 아날학파는 마르크스주의와 함께 20세기 역사학의 가장 굵직한 흐름이기에 역시나 수업시간 중 많은 부분을 할애해 소개됐다. 특히 아날학파 2세대이자 가장 큰 거목이라 할 수 있는 페르낭 브로델에. G선생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같은 거 읽다가 주화입마 당하지 말고 그냥 책 한 권만 읽으면 아날학파와 브로델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며 김응종의 <페르낭 브로델 | 지중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소개해 줬다. 그리고 나는 수업이 끝난 다음 주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책을 읽었다. 책 읽은 소감은 한마디로 재미있네, 이제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도 읽어 봐야겠군, 이다.

1-1.
나는 본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관심이 많다. 시장은 태초부터 있었고 그 안에서 자본주의가 생겨났다고 믿는 주류경제학과 달리 나는 시장은 근대 초기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가정 아래 논의를 진행하는 실재주의적 경제학, 그리고 그 안에서 시장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다른 형태에 관심이 많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자기조정적 시장체계가 영국에서 형성되는 과정에 초점을 둔 칼 폴라니의 견해를 상당 부분 신뢰하는데, 브로델은 다른 맥락에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관계를 조망한다. 브로델이 바라보는 그 관계의 핵심은 인간의 경제구조는 물질문명의 토대 위에 시장경제가, 시장경제의 토대 위에 자본주의가 위치한다는 삼중구조이다. 이런 점에서 브로델은 인간의 경제생활이 발전하면서 시장이 만들어지고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또 그 안에서 상업자본주의-산업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 식으로 단선적으로 변한다는 일종의 진화론에 대해 강하게 부정한다. 그리고 그는 세 구조의 위계 속에서 그 존재방식에 따라 '복수의 자본주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행 자본주의는 경쟁을 모토로 삼는 시장경제와 달리 독점을 추구하며 "시장경제를 교란시키는 반시장경제"라고 말한다.

1-2.
브로델은 역사학과 경제학에 남긴 엄청난 영향력과 달리 저서가 그리 많지 않으며, 그의 사상체계는 <지중해>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집중돼 있기에 저자인 김응종은 두 권의 궤적을 따라가며 브로델 사상의 핵심을 설명한다. 먼저 브로델의 박사학위 청구 논문을 출판한 <지중해>는 앞으로 그가 말할 구조주의 역사학의 시원이다. 여기서 그는 구조-콩종튀르-사건이라는 삼중구조로 된 역사방법론을 제시하고, 여기서 콩종튀르의 중요성을 논파한다. 이전까지 역사학의 주된 관심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건을 '먼지'에 불과하다며 일부 정치적 사건을 제외하곤 사건 따위는 역사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폄하한다. 대표적인 게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지중해 패권이 이슬람에서 스페인에게 넘어갔다고 외우는 '레판토해전'이다. 하지만 브로델은 레판토해전 이전과 이후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흔히 브로델의 역사관에 대해 듣는 개념은 '장기지속'이다. "가장 느린 변화가 가장 중요한 변화"라는 테제에서 알 수 있듯 아주 서서히 구조가 변하는 데 브로델은 초점을 두고, 인간은 그 구조의 감옥 안에 수형된 '죄수'라며 구조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 주력한다. 물론 브로델의 이러한 인간을 자유롭지 않는 존재로 보며 구조의 꼭두각시 정도로 취급하는 방법론에 대해서 처음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논란이 일고 있으며 브로델의 견해는 철저히 소수의 견해로 존재한다. 하지만 브로델의 이러한 주장은 분명 당시로서는 신선한 것이었으며 그 신선함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브로델은 구조를 읽는 데 사건과 연결시키는 '콩종튀르'를 중요하게 여긴다. 브로델에게 거의 전가의 보도로 쓰이는 콩종튀르는 본디 '여러 상황circustums들이 만나 생겨난 '국면situation'으로 한 변화의 출발점'을 뜻하는 말로 "변하되 주기적으로 순환하면서 변화가 예측 가능하도록 경제활동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주기"를 뜻한다. 대표적인 콩종튀르가 콘드라티에프가 이야기한 '50주년 주기' 같은 장기적 콩종튀르이다. 콩종튀르는 경제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인구변동, 국가의 크기, 전쟁 같은 다양한 콩종튀르가 존재하며, 주기의 폭도 세기 단위의 장기부터 수년의 단기까지 폭넓게 존재한다. 브로델은 이렇게 다양한 콩종튀르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설명이라고 말했다.

1-3.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세계-경제'와 '세계-제국'을 비교하며 현행 자본주의 발전을 이야기한다. 브로델이 말하는 세계-경제는 세계적인 경제를 말하는 세계경제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로서 다른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경제권을 의미하는데 정치제국과 상응하는 경제제국이라 할 수 있다. 세계-경제는 교환을 매개로 움직이며, 국가로부터 자유로웠던 도시는 세계-경제의 상층부에 위차하면서 이러한 세계-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에너지원이다. 브로델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 시골로부터 분리돼 형성된 (자유)도시는 원거리무역을 바탕으로 시골 또는 타 도시와 끊임없이 교환을 행하며 세계-경제를 움직여 왔다. 여기서 브로델은 수위가 같으면 물이 흐르지 않듯이 도시로 상징되는 교환체계의 위계가 위계적일수록 전압 차이가 발생해 교역이 활발해진다는 비유를 통해 세계-경제가 활기차게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에는 교환이 이루어지며 이는 전적으로 불평등한 교환이다. 경제는 이러한 불평등을 더욱 확대시키며 세계-경제의 구성원을 양극화시킨다.

이러한 세계-경제의 개념은 세계-제국과 대비된다. 세계-제국은 본디 브로델의 충실한 동반자였던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창안한 개념으로 중국, 인도, 이란, 러시아 등에서 존재했던 정치적 강압에 의한 전제적인 제국을 의미하며, 마르크스가 언급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기반한 정치 중심의 체제로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어떤 상인도 자본가도 자유롭게 활동할 여지가 없어 교육을 활성화시키지 못해 자본주의로의 발전이 저해된다. 물론 세계-경제는 세계-제국으로 변질된 가능성이 많으며, 그렇지 않고 지속적으로 팽창하면 16세기 유럽처럼 자본주의가 팽창적 발전을 꾀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브로델의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은 유럽 자체의 고유한 역동성 때문이라 읽히며, 이는 다분히 유럽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의심받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프랑크 같은 반유럽중심주의자들로부터 공박당했다.

2.
브로델은 유럽 세계-경제의 발흥시점을 상파뉴 정기시(상설시장)가 열린 13세기로 잡는다. 이미 그때부터 유럽이 동일한 가격의 콩종튀르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본래 영역은 생산이 아니라 '교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브로델의 교환우위론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천착하는 마르크스의 '생산양식론'과 크게 다르다. 이 지점에서 브로델은 교역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면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의 차이를 분명히 이야기한다. 앞서 말했듯 경쟁을 원천으로 하는 시장경제는 독점을 원천으로 하는 자본주의 - 정확히 말하면 숫한 자본주의 중 지금의 자기조정적 시장을 가지는 근대적 자본주의 - 는 명확히 다르다는 것이다. 김응종은 브로델이 정의하는 자본주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에 자리 잡고 그곳에서 변영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시장 경쟁의 '경쟁'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게ㅔ 유리하도록 교환을 왜곡시키며 질서를 교란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에서 나왔지만 시장경제와 대립한다. 시장경제가 합리성의 영역이라면, 자본주의의 영역은 계산과 투기의 영역이다. 시장경제는 투명한 데 반해 자본주의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시장경제를 토대로 삼는 것이기에 시장경제 없이는 생성될 수 없다. 자본주의는 가장 높은 층에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 경제생활의 세 요소인 물질문명-시장경제-자본주의 가운데 자본주의만이 잘율적이다. 자본주의는 때에 따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리하여 교대로 또는 동시에 상업이익이나 산업이익, 지대, 국가에 대한 대부, 고리대금업 등 어는 것이든 추구한다. 자본주의는 진입해 들어갈 영역이아 포기할 영역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 "선택한다는 것,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비록 그 선택이 아주 제한적이라고 해도 그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자본주의는 단 하나의 선택 속에 갇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하나의 영역에 전문화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익의 추구, 이익의 극대화는 자본주의의 무언의 법칙이다. 자본주의는 높은 이익이 나는 곳으 향해 수시로 변신한다. 자본주의는 이익을 좇아 자유롭게 선택하고 민첩하게 움직인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165-116쪽)


브로델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본질을 규명하면서 흔히 알려진 것처럼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시대에서야 시작된 게 아닌 전산업화시대, 즉 상업자본주의시대부터 존재했음을 이야기하고, 상업자본주의는 여러 자본주의주의 가운데 하나임을 이야기한다. 상업자본주의시대 대상인들은 이후의 자본가들과 달리 국가권력과 공모해 시장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원거리무역을 통해 오히려 거꾸로 시장을 조종한 이들이다. 하지만 19세기 초 이들을 대신해 산업 자본가가 등장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의 시대를 연다. 하지만 이들의 등장과 새 시대의 도래를 인정하면서도 브로델은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심대한 위기가 닥쳤을 때 혹은 이윤율이 현자하게 떨어졌을 때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거의 순간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능력이다"라면서 자본주의의 특징을 정의 내리며, 산업자본주의 또한 복수의 자본주의 중 하나임을 분명히 역설한다. 때문에 과다한 경쟁으로 인한 이윤율의 하락으로 붕괴될 거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을 부정하고, 본질적인 불평등을 인위적으로 제거한 사회주의는 "자본의 독점을 국가의 독점으로 대체한 것이며, 하나의 해악 위에 다른 또 하나의 해악을 더한 것"에 불과하다며 현실성 없는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며 공박한다.

3.
앞서 말했듯 브로델은 인간의 경제생활을 물질문명-시장경제-자본주의라는 독창적인 삼중구조로 설명한다. 특히 이 부분에서 자본주의는 시장경제 위에 존재하는 하나의 형태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경쟁을 추구하는 시장경제와 독점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대립시킨다. 이는 시장경제를 자본주의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보는 주류 경제학과 상당히 다르며, 산업이 아닌 교환을 시장경제의 중심에 두고 사회주의 역시 독점의 한 양식이라 주장하면서 마르크스 경제학과도 명백한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현재의 자본주의는 무수한 자본주의와 경제양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점에서 경제와 시장의 실재성을 따져 묻는 칼 폴라니의 경제관과 어느 정도 맥을 함께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시장경제 위에 자본주의를 두면서 거대한 물질의 교환시스템으로서 시장을 이야기하면서 시장을 자본주의의 주요 메커니즘으로 보는 폴라니의 견해와 달리 경제구조를 이야기한다. 물론 주류/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칼 폴라니의 시장 개념과 브로델의 시장은 전적으로 같지 않다. 브로델의 시장 개념은 다른 경제학자들과 달리 좀 더 크고 광활한 개념인데,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이런 점에서 브로델이 말하는 시장의 개념이 다른 경제학의 개념과 비교해 명확하게 설명돼 있지 않다. '시장'이라는 말이 달리 쓰인다면 그것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정의와 쓰임새를 비교, 대조해 개념을 명확히 인식하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 브로델의 사상에 대해 어렵지 않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브로델과 아날학파에 대한 개론서로는 나무랄 데 없지만, 경제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좀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는 데서는 개론에 그쳐 다소 아쉽다. 물론 이러한 아쉬움은 살림출판사의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가 갖는 전체적인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권을 더 읽어야겠다는 욕망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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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10점
정희진 지음/교양인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듣는 소통의 시발점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굳이 페미니즘의 ‘페’자가 나오지 않아도 여성에게 유리하거나 거꾸로 남성에게 불리하다 싶은 뉴스가 나오기가 무섭게 기사에는 수십 개의 답글이 달린다. 그 답글은 안타깝게도 본래의 목적인 상호간의 소통을 꾀하는 게 아닌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한 맺힌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다. 사실 남성들도 다 안다. 한국사회는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체제가 강고히 들어선 경직된 사회이며, 여성은 그 안에서 소수자이며 피해자라는 사실을. 하지만 아는 것과 인식하는 것은 다르다.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끼치는, 아니 이익을 가져가는 순간 다수자는 마치 자신이 소수자가 된 양 입에 거품을 물며 자신들이 피해 입은 바를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로한다. 깨놓고 말하면 자신들만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전에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어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는 사실은 과감히 휴지통에 넣어 버린 채.

여성학자 정희진은 그런 한국사회와 그 안에서 도사린 남성중심적 가부장체제를 지적하며 페미니즘이 이에 도전할 수밖에 없음을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도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남자들을 못 잡아먹어 혈안이 된 ‘꼴페미’들의 한 맺힌 전투적인 자기방어가 아니다. 정희진은 이 책에서 이리 말한다.
나는 페미니즘은 저항이론․저항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의 목소리들도 들리게 된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제까지 잘 들리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존재, 특히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다양한 가치를 창조해 세상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고 이를 통해 서로 성장하자는 거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그러기에 앞서 (남성들에게) 너무 익숙해져 육안이 돼 버린 색안경을 벗을 것을 주문한다. 그래야 비로소 남성들에 의해 타자他者화됐던 여성의 현실이 보인다. 그러면서 동시에 계급, 인종, 민족, 학벌, 외모, 출신지, 나이, 장애, 성정체성 같은 우리 사회에서 차별을 자행하는 억압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서서히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 더 하면 인간은 누구나 어느 측면에서는 차별받는 소수자이며 누구도 모든 면에서 ‘성골’일 수 없다는 게다.

이쯤에서 남자들만 군대에 간다고 억울해하는 당신, 억울함을 토로하기 전에 이 사회가 얼마나 남성들에 의해 재단돼 있는지, 그 속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힘겹게 세상을 대하는지부터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자신의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 여자친구의 입장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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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공화국
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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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아파트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 이유야 빤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파트에 살 만한 형편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파트에서 살 일이 있을까 싶다. 형편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는 계층이라는 말로 바꿔 써야 맞을 듯하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아파트는 중간-중상류 계층이 집단적으로 서식하는 사회문화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1.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쓴 <아파트 공화국>은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의 아파트 문화에 대한 보고서이다. 원래 한국에서 체류하면서 한국의 아파트문화에 관심을 가진 그는 전 세계적으로 무척이나 독특했던 이 문화를 가지고 결국 박사학위를 받았고, <아파트 공화국>은 이에 바탕을 두고 한국 독자의 눈높이에 맞도록 다시 서술한 책이다. 신간소개에서는 박사학위 논문이 원문이라는 말에 프랑스인의 저작이라는 선입견에 다소 딱딱하고 고답스러울 줄 알았는데, 술술 읽히는 게 프랑스는 한국처럼 학위논문을 짜증나게 쓰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한국사람에게 "한국에는 왜 아파트가 많을까"라고 물으면 백중 구십구-팔은 "좁은 땅에 인구는 많으니까"라고 답할 게다. 내게 물어도 마찬가지일 듯. 적어도 줄레조의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러나 한국사람이 아닌 타자의 시선으로 이러한 질문을 한 줄레조는 과연 그럴까 싶었나 보다. 게다가 지도상에서 나타난 한국의 아파트단지를 군사단지라고 오해하는 동료의 말에 그는 열심히 왜 한국 땅에는 이리도 아파트가 많을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 탐구의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계층 상승 혹은 계층 확인을 목표로 하는 '중산층의 외형적 표시'라는 것이다.
 
3.
사실 한국의 아파트에 중산층이 산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사실 아파트에서 산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 자신도 중산층임을 대내외적으로 확인받는 장치이다. 박정희 정권 이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중소 상공인, 자영농 같은 기존의 구중간계급이 아니라 대기업 사원이나 고위 공무원, 전문직 종사자 등으로 이루어진 신중간계급이 늘어났고, 정부는 주로 이들을 대상으로 중대형 아파트를 공급했다. 기존의 한옥 구조와 달리 서구화된 구조의 아파트는 이들의 기호와 욕구를 충족시켜 줬고, 이러한 이들이 집중적으로 특히 강남의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는 이들의 계층을 공공히 해 주는 도구가 됐다. 반대급부로 아파트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중산층의 전유물, 혹은 중산층이 되고 싶은 하류층의 희망사항이 됐다.
 
4.
줄레조는 단순히 좁은 땅에 인구가 많아 아파트가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을 서울의 구별 인구밀도에서 밝힌다. 기존의 통례대로라면 아파트가 밀집한 강남구와 서초구 등에 인구밀도가 높아야 하나, 반대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은 하류층 밀집지역인 동대문구와 영등포구였고 서초구와 강남구는 매우 낮았다. 결국 서울의 인구밀도와 주택구조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는 이야기이며, 그저 아파트단지는 "주거공간을 조직하고 조밀화시키는 국토개발의 해결책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아파트 건설 초창기에는 하류층을 위한 중소형 아파트가 여타의 이유로 실패해 중산층을 위한 중대형 아파트 위주로 개발된 것, 그리고 장기임대보다는 임시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단기임대와 소유를 목적으로 분양 위주로 개발된 사례를 거론한다. 하류층이 밀집했던 지역(이른바 철거촌)을 재개발한 후에 그들이 아닌 타지의 중산층을 위한 중대형 아파트가 지어졌다는 사실만 봐도 줄레조가 밝히는 논리는 설득력 있다. 여기에 투자와 투기의 수단으로서 아파트가 지니는 역할은 일종의 확인사살이다.
 
5.
주로 5장에서 중산층 거주지로서 아파트를 이야기한 줄레조는 7장에서는 "아파트는 정말 '현대적'이고 '서구적'인가"라며 묻는다. 줄레조의 답은 한국의 아파트는 외형적으로는 서구적/현대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공간의 활용을 보건데 이는 한국의 전통적 생활양식과 서구적공간구조가 결합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줄레조는 "한국에서 아파트의 성공 요인은 현실로서의 아파트가 인기를 끌었다기보다는 한국인들이 '현대적 주택'에 대해 만들어 낸 이미지가 인기를 끈 결과"라고 말한다. 아파트의 생활양식에서 드러난 기술의 진보는 순수하게 한국적 산물이었지만, 아파트=서구화=현대화라는 단순한 도식 속에서 아파트에 서구화/현대화 모델로서 독점적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대척지점에는 불편했던 과거 한옥의 구조이다.
 
6.
책을 읽다 보면 줄레조는 사실을 밝혀냈다기보다는 정리했다는 게 맞다. 그동안 한국 내에서 이러한 연구가 없었던 이유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고정된 시선이었을 게다. 게다가 대부분의 내용은 이미 다들 아는 내용이지만, 그 내용들은 따로국밥으로서 분절돼 있었다. 하지만 한국사람이 아니었기에 줄레조는 한국사람들의 이 결정론적 사고방식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외국인이 왜 이런 데 관심을 갖느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힘들게 인터뷰를 하고 자료를 조사해 이러한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알라딘 이 주의 TTB리뷰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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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이정익 지음/길찾기
 
암울함을 인지할 때 느끼는 먹먹함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갔을 때,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덮었을 때 순간 내게 던져진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먹먹함에 한참을 멍할 때가 있다. 이정익의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는 그러한 책이다.

이 책은 만화책이다. 그리고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인권사'라는 부제가 달렸다. 만화라는 형식이 손 쉽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어 선뜻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전달하기 쉬운 까닭에 그동안 '인권'을 다룬 만화책은 적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내용을 전달하는 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다루는 내용인 한국현대사도 인권도 많다고는 할 수 없어도 비교적 다루어진 편이라 그닥 새롭지도 않다. 게다가 이 책에 그려진 만화 아니 그림은 온통 어둡고 칙칙하고 음울하다 못해 암울하기까지 하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러한 암울함이다. 70년대 광주대단지사건부터 동일방직분뇨사건, 인혁당재건위사건, 유신정권이 자행한 고문들, 그리고 극악에 달한 한국현대사의 가장 암점인 광주민주화항쟁. 시대가 암울했는데 그것을 묘사하는 그림이 암울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게다. 밝고 맑은 그림에 암울한 내용은 가당치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인 이정익은 그래서인지 철저하게 어둡고 칙칙하고 음울한 그림 속에서 자기 스스로가 그러한 사건들을 글로 접했을 때 가졌을 법한 먹먹함을 그림에 담아냈다. 그리고 이러한 과거의 일들이 보스니아와 팔레스타인, 이라크 등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잔혹한 권력에 대해 두려움을 표출해 낸다.
 
그렇다. 다시는 그러한 두려움을 느끼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이 여전한 폭력 앞에 작가는 어두운 과거를 또한 어둡게 그림에 담아낸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드러나듯 사람들은 그저 옛날일, 불가피했던 일, 자기와 관련 없는 일로만 치부하며 한 때의 이야기로만 치부한다. 저자는 그래서 더더욱 슬퍼한다. 그래서일까? 제목은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이다.
 
대학 신입생 때 선배들은 으레 80년 광주에 관한 사진을 보여 주곤 했다. 그리고 세미나 주제도 그러한 암울한 현대사였고, 종종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그것이 여전함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도록 했다. 참혹함을 알게 됐을 때 가졌던 그 먹먹함. 이 책은 그 먹먹함을 내게 되살려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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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볼 효과 - 8점
제임스 버크 지음, 장석봉 옮김/바다출판사

도끼장이의 선물 - 8점
제임스 버크 외/세종서적

화이부동님께서 제임스 버크의 <핀볼효과>를 사셨다는 말에 마침 요즘 읽고 있는 책인지라 한마디 거들었다. 흥미로운 책이다. 마치 핀볼게임기 안의 공이 여러 가지 트랩과 스틱의 조종에 따라 조합되는 여러 가지 우연성에 의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듯, 인류 문명 특히 근대의 물질문명 역시 수많은 사건의 발생과 사물의 발견/발명으로 만들어지는 우연성의 카오스 안에서 그것들이 상호연관되며 발전해 왔다고 말한다.
저자 제임스 버크는 그러한 사소함에서 기인하는 문명의 발달과정을 '나비효과'와 비슷하면서 다른, 말하자면 영화 <수면의 과학>에서 스테판이 주창하는 평행적-동시적-임의적parallel-synchronous-random한 사건이 상호연관되는 '핀볼효과'라는 말로 설명한다. 예컨데 파마기술의 발명으로 인해 붕사가 필요했고 이는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의 원인이 되고... 뭐 이런 식으로 하면서 뜬금없이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점프하면서 나아가 정기우편선이 도입된 역사적 사건을 끄집어 내는 식이다. 사무실에서 한 장씩 틈틈히 읽고 있는데, 너무 자주 점프하는 바람에 맥락을 놓치기도 하지만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저자 제임스 버크는 <우주가 바뀌던 날 그들은 무엇을 했나>로 한국에 소개됐다고 한다. K씨도 지성사가 중요하다면서 이 책을 추천하곤 했는데, 품절된 지 오래이고, 헌책방에서도 도무지 발굴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 제임스 버크가 로버트 온스타인과 함께 쓴 <도끼장이의 선물>라는 책을 우연히 한 인터넷 개인 헌책방에서 발견해 냈다 샀는데, 이 책 또한 제임스 버크의 손길을 탄 책인지라 매우 흥미롭다. 이 책은 우선 인류사 전반에 대한 문명 발전의 궤적을 따라가며 통사적으로 기술한다. 책 뒤편에 적힌 소개글을 옮겨 본다.
 
<도끼장이의 선물>은 지금과 같은 문명세계를 주는 대신 우리의 의식을 빼앗아 간 사람들(도끼장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사장, 천문학자, 인쇄업자, 추기경, 기술자, 과학자 등으로 대표되는 그들은, 최초로 숲속에서 돌을 쪼아 도구로 사용하던 도끼장이로부터 오늘날 슈퍼컴퓨터를 이용하는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에 걸친 발견과 혁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수많은 문명의 이기라는 도구를 선사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양날을 가진 선물이었다. 편리함과 함께 '인류 파멸'을 가져왔넌 것이다. 이렇게 인류가 인식하지 못한 채 파멸로 치닫는 여행을 계속했던 이유는, 새로운 도구들이 정신을 잃게 하는 매력과 전문성, 그리고 내밀함을 가지기 때문이다. 또한 도구 발달을 통한 혁신과 그에 따른 인간의 두뇌 발달이라는 상호관계가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켜 왔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고방식을 만들어 왔는지를, 뛰어난 상상력과 치밀한 논리성, 그리고 인류역사와 서양문명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풀어낸다. <도끼장이의 선물>은 한 세기를 마감하는 중대한 시기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류의 현안 문제와 그 해결방안을 희망적으로 모색한다.
 
 
'도끼장이axmaker'라는 개념부터 흥미롭다. 책의 부제인 '양날을 가진 인류문화의 역사'에서 보이듯, 도끼장이가 가진 도끼는 발전과 파멸이라고 하는 양날을 가진 문명을 말하며, 도끼장이는 이러한 문명을 일구어 낸 사람이자 이용하고 전파하는 사람으로, 도끼를 바탕으로 인류를 지배하는 집단을 일컫는다. 예컨데 현생인류에게 최초로 기술로 나타난 도끼 제조, 문자의 발명, 논리학의 성립, 신학을 통한 신앙의 권력화, 인쇄술을 통한 언어권 통합, 신대륙 발견으로 인하 세계질서의 재편 같은 일련의 문명발전과 그로 인한 파장의 명암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를 통한 인쇄술이다. 이전까지 책은 오로지 필사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게다가 라틴어로만 쓰였기에,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돼 있었다. 하지만 손 쉽게 책을 만들 수 있게 되자 각종 기록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게 됐고, 이는 또한 라틴어가 아닌 자국의 지배적인 언어로 쓰이면서, 프랑스는 파리, 영국은 런던, 이탈리아는 토스카나 지역의 방언이 국어로 채택돼 그곳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영토국가의 성립을 예견했다. 또한 문자화된 라틴어를 통해 유럽세계를 지배하던 가톨릭교회는 반대급부로 급속도로 세력이 약화됐고, 그것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한 달만에 전 유럽을 떠돌 정도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또한 루터가 성서를 독일어 번역하면서 결정적으로 가톨릭교회의 권위는 급속도로 약화됐다. 반면 대중은 자국어로 손 쉽게 성서를 비롯한 각종 서적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특정 소수에 집중됐던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됐으며, 이를 강화하고 또는 재지배하기 위해 대중교육이 나타나게 됐다. 인쇄업자라고 하는 도끼장이는 대중에게 자유로운 지성을 선물했으나 또한 중세세계의 몰락을 앞당기기도 했다.
 
두 권 다 절반쯤 읽었는데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갈지 사뭇 궁금하다. 덕분에 수업과 세미나에 제출할 페이퍼 작성을 못하고 있다. 이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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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문제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코믹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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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남들처럼 무난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럭저럭 평범한 가정에서 생활해 온 나이지만, 나는 콩가루집안 이야기와 대안가족을 비롯한 다채로운 가족을 포함해 이른바 '비일상적인 가족'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일까? 2005년 내가 꼽은 최고의 한국영화는 <다섯은 너무 많아>였고, 2006년은 <가족의 탄생>이었다. 이런 내가 마감의 와중 사무실에서 굴러다니던 만화책 한 권을 읽었다. 그림체부터 전형적인 소녀 취향의 일본만화가 연상돼 그냥 넘어갈 법했지만, 마감인지라 머리 좀 식히려 펴들었는데 의외로 재미있다.
 
1.
이마 이치코의 <어른의 문제>는 한 아버지가 뒤늦게 게이임을 깨닫고 이혼하는 데서 시작한다. 마치 TV시리즈 <프렌즈>가 아내 수잔이 커밍아웃과 함께 이혼하면서 버림받은 로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듯 말이다. 그리고 나서는? 아버지는 동성의 파트너와 관계를 맺고, 아들과 전 아내는 나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아들은 이런 부모의 제멋대로 선택으로 괴로워하는데... 과연 그럴까?
 
2.
보통 이런 스토리에서는 캐릭터의 색깔이 중요하다. 주요 인물들에 대해 한번 읊어 본다. 먼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하라시마 나오토는 다섯 살 때부터 이혼한 어머니와 쭉 둘이 살아오고 있다. 그런데 나오토의 고민은 아버지의 성적 취향인 동성애가 자기에게 유전될까이다. 어렸을 적부터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 20살 어린 나이에 원형탈모증이 생겨 항상 모자를 쓰고 다닌다. 어느날 아버지가 결혼하면서 부인을 자신의 형으로 입적시켰는데, 나이가 자기와 여섯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새 '부인'일까? 의붓형일까?
 
이 만화의 모든 소동의 근원인 나오토의 아버지 하라시마 유지는 나오토가 다섯살 때 게이임을 자각하고 합의이혼 한 뒤 여러 애인을 전전하다 결국 한참 연하인 스물여섯 살 에비 고로를 자기 호적에 양자를 입적하는 형식으로 일종의 동성 간 결혼을 한다. 이전의 배 나온 아저씨 스타일에서 꽃미남 스타일로 취향을 바꾼 셈인데, 이 관계는 얼마나 오래갈까?
 
아버지의 새 '부인'인 에비 고로는 유지와 결혼하면서 그의 호적에 양자로 입적돼 하라시마 고로가 된다. 하지만 유지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도 있지만, 고로의 속셈은 보석디자이너로서 성공을 위해서는 새우라는 뜻의 에비보다는 하라시마라는 성이 더 보기 좋아서 그런 것. 그런데 이자 꽃미남에 능력 있는 보석디자이너이지만, 심술 궂기는 이루 말할 데 없기니와 매사에 거짓말과 신경질적인 말을 툭툭 던지는 왕싸가지이다. 대신 요리를 비롯한 가사에 능하다. 이것은 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에게 가사를 전담시켜서 그런 것. 아닌가? 스스로 택한 것일까?
 
나오토의 어머니인 (하라시마) 스기야마 유미코는 남편과 이혼한 뒤 아들을 데리고 여자가 아닌 그저 어머니로만 살다가 늦은 나이에 연애전선에 뛰어들었다. 간만에 뛰는 연애전선 그리 녹록치 않다. 이러저러 하다 얽힌 상대는 전 남편의 '부인'인 고로의 형 에비 하지메. 전 남편과의 관계도 관계이거니와 10살 연하에 여섯 살 배기 딸이 있는 유부남. 이른바 불륜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고, 심지어 법률로 넘어선다. 
 
고로를 다시 집으로 불러드리려 하다가 생활설계사인 유미코에게 발목 잡혀 버린 하지메는 지금 최악의 상태. 훤칠한 외모에 명석한 두뇌, 뛰어난 스포츠감각과 방정한 태도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전형적인 엘리트. 하지만 아내는 걸핏 하면 집을 나가고 딸은 왕따이다. 게다가 남동생은 게이이며, 다른 누이 셋은 전부 미혼. 이런 그에게 제멋대로 고집불통인 유미코는 고로와의 요상한 관계, 열 살 많은 나이라는 문제와 상관없이 꽂혀 버렸다. 게다가 현재 유부남 신분이니 말하자면 불/륜/관/계.
 
3.
이거 지난번 이야기한 <미스 리틀 선샤인>과 또 다른 종류의 콩가루집안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집안도 사실상 세 군데. 게다가 이 복잡한 관계 맺기는 또 뭐일까? 이야기는 유지가 커밍아웃하면서 집을 나가고, 다시 결혼할 사람이라고 데리고 나타나면서 시작한다. 원만하게 이혼해서인가? 아니면 유미코가 재혼하지 않아서인가? 나오토와 유미코, 그리고 유지의 관계는 그럭저럭 괜찮다. 가끔 유지가 남자친구에게 채였다고 징징대지 않는다면. 그런데 결혼할 거라고 데리고 온 남자는 나오토보다 여섯 살 차밖에 안 되는 젊은 꽃미남, 고로. 그가 나타나면서 유지와 고로 사이에 나오토와 유미코가 끼어들고, 다시 고로의 형 하지메와 그의 가족까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한층 복잡해진다.
 
4.
이 만화는 단행본 1권으로 된 일본 망가치고는 무척 짧다. 그래서 이 복잡한 관계와 캐릭터는 지면에 쏟아지기가 무섭게 타오르고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현실에는 있을 것 같지 않은 해피엔드. 하지만 이마 이치코는 마지막에 가서 한마디 툭 던진다. "가족은 증식해 가는 것이다"라고... 그렇다 처음에는 그저 다른 두 가족의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이 두 가족은 서로 관계 맺음을 해 가면서 얽히고 새로 관계 맺음을 해 가면서 서서히 가족의 관계를 증식시킨다. 이것은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얽히며 살아가는 모습, 특히  '어른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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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실일까?’ 과학기사를 읽는 우리의 자세

‘과학시대를 사는 독자의 주체적 과학기사 읽기’라는 부제에서 이미 저자는 지금의 과학기사가 어떠한지, 독자는 어떻게 그것을 읽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사실을 전한다는 매스미디어, 그중에서도 엄밀한 데이터를 근거로 과학 현상을 분석하는 신문의 과학기사야말로 사실을 그대로 보도한다고 믿기 쉽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대학에서 과학사회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신문지상에 실린 숱한 과학기사를 하나하나 뒤적이며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사실과 확률의 혼동, 첨단기술에 대한 미신적 숭배, 영웅에 대한 열광을 부추기는 선정적 홍보 같은 과학기사의 뒷모습을 밝혀낸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성찰하며 읽을 것을 제시한다.
과학기사는 어떻게 사실을 왜곡하는가? 흔히 나노기술 하면 새로운 과학의 미래로 칭송된다. 하지만 모든 기술에는 명암이 있는 법. 특히 작은 크기로 인체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나노입자는 아직 그 위험성 여부가 확인되지 못한 미완의 기술이다. 하지만 나노기술에 대해 과학기사는 ‘장밋빛 전망’ ‘찬란한 미래’를 내세울 뿐 그것이 지닌 위험성을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으려 한다. 또한 암모니아합성법으로 노벨상을 받은 화학자의 업적을 이야기하면서 인류가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기사에 대해 저자는 암모니아합성법이 화약 생산과 연관되며 그 화학자 또한 독가스 개발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거론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인류 중 일부는 여전히 기아로 고통받고 있음에도 신기술이 전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선동적 수사만 가득한 기사의 행태를 고발한다.
과학기사 하나하나 조목조목 뜯어보며 저자는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책 제목이다. 독자가 과학기사의 선정적 보도에 휘말려 신화에 열광하지 않고, 기사에서 다뤄진 과학기술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스스로 성찰해 왔다면, 이른바 ‘황우석 사태’ 같은 국가적 차원에서 벌어진 이성의 집단적 마비상태가 일어났을까 하고 의문을 던진다. 다시 줄기세포 연구 지원 재개가 보도되는 이 시점에 우리는 그 기사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비단 과학기사, 신문기사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미디어를 통해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드는 이 시대, 우리는 쏟아지는 정보를 어떻게 가려내야 할까?
조금은 빤한 대답이지만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일단 제목을 잊고 기사 후반부도 꼼꼼히 읽으며, 숫자를 의심하며 돈과 관련된 문제를 생각하고, 기사의 분량과 빈도로 연구의 중요성을 판단하지 말고, 여러 신문의 기사는 물론 지난 기사도 되새겨 읽으며 비교하고, 권위에 의존하지 않은 채, 논리적 사고에 기반해 자기 자신만의 시각을 구축하라고. 모두가 이미 알고 있으나 잊기 쉬운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열광하지 않고 성찰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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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어 사전 - 6점
남경태 지음/들녘(코기토)
 

관념론, 노동, 담론, 리비도, 무의식, 변증법, 신자유주의, 오리엔탈리즘, 절대정신, 차이, 콤플렉스, 트라우마, 패러다임, 헤게모니. 논술을 공부하다 보면 생소한 개념이 제시문에 자주 나와 곤란에 처하곤 한다. 더욱이 종종 말은 들어본 것 같은데, 정작 그 개념의 정의가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몰라 논술문에서 개념어를 사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하기 마련이다. 무엇을 써야 할까? 그런데 그 뜻은 뭐지?
《개념어 사전》은 오랫동안 인문학 책을 쓰고 옮겨 온 저자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경계를 오가는 일련의 ‘개념어’를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은 비록 ‘사전’이라는 이름을 취했지만, 여느 사전처럼 객관적으로 딱딱하게 구성되지 않고, 정반대로 저자의 개인적 관점에 바탕을 두고 용어 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하나의 개념은 그 개념에 딸린 여러 가지 속성들의 요약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라는 개념에는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발전하고 변형되어 온 과정, 경제제도로서 가지는 여러 가지 특성 등이 요약되어 있다”라며, 개념어는 사전적인 ‘정의’를 기술하는 게 아니라 개념과 이론의 상호작용 또는 그 관계에 대해 통찰하도록 전반적인 ‘이미지’를 그려 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개념어 사전》은 압축된 분량 안에 인문․사회과학의 주요개념들의 ‘이미지'를 그려 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논술참고서나 인문학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라고 신간소개를 했지만 약간 사기치는 구석이 보인다. 뭐 받지도 않고 사기쳐 주려니 좀 아깝다. 사고 난 다음에 이벤트가 떠 손해 보는 느낌도 드는데. ^^;
 
~사전이라는 말에 일단 혹해 인터넷서점에서 책 소개를 보니 괜찮다 싶어 낼름 샀다. 일단 판형도 작고 글도 개념어 단위로 쪼개져 있어 출퇴근 시간에 짧게 짧게 읽기 좋다.
 
저자 스스로 사전적 정의가 아닌 개념 간의 상호관계를 통찰한 이미지를 보이려 했다는 점에서 개념어와 개념어는 링크되어 있으며, 개념에 대해서는 기본적 정의와 다른 이론/개념과의 연관관계, 개인의 가치관 등이 적절하게 버무러져 있다. 물론 그런 점에서 이론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학제적 체계도 없고 개념들과 그 관계의 맥락을 조망하는 통찰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등,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다. 하지만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넘나드는 혹은 그 경계에 존재하는 개념어들에 대해 너무 쉽게 설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렵게 파고들지도 않아 개념을 바탕으로 궤적을 따라 가며 세상과 혹은 책과 접속하려 시도하는 데는 그만인 책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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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 - 10점
조르주 뒤비 지음, 채인택 옮김, 백인호 외 감수/생각의나무
 


어느 ‘아틀라스키드’의 지름질
얼마 전 나는 ‘헐리우드키드의 생애’를 본떠 ‘아틀라스키드’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정의를 내려보면 “어렸을 적부터 사회과부도를 가지고 지도를 보는 재미에 빠져들어 성인이 돼서도 틈만 나면 지도를 보며 뉴스나 책에서 지리적 사실, 역사상 위치와 관련된 사안이 나오면 낼름 지도부터 들여다보는 사람.”
이런 정의에 의하면 나는 ‘아틀라스키드’라고 할 수 있다. 농담 삼아 “사회과부도로 한글을 깨우쳤다”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책은 동화책도 그림책도 아닌 ‘사회과부도’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사회, 역사, 지리였다. 그리고 좀 더 좋은 사회과부도(역사부도와 지리부도를 포함)를 볼 수 있다는 점은 행복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내용면에서 고등학교 사회과부도를 넘어서는 지도책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부동산정보와 도로운전용을 제외한 지도책은 국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이 세계지도책도 변변한 게 없어 대형서점의 해외서적 코너를 뒤져야 했고 차츰 나는 지도를 보는 데 공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2년 전 지오프리 파커의 《아틀라스 세계사》가 번역돼 출간되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지도에 대한 열기가 이미 식은 뒤였다.
올해 들어 뒤늦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e­북으로 읽는 바람에 당시 지리적 배경이 궁금해 목이 마르던 나는, 어느 날 한 인터넷 서점에서 프랑스 백과사전 출판의 명가 라루스(Larousse)의 《Grand Atlas Historique》 2002년 판을 번역한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에 대한 대대적인 광고를 봤다.

… 520장의 섬세한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사의 현장들. … 아날학파의 거장 조르주 뒤비가 책임 편집하고 프랑스 최고의 전문가 70여 명이 함께 저술한 초대형 역사 이해 프로젝트.

아마 다른 책이었으면 그냥 빤한 과장 광고라 생각해 무심히 지나쳤겠지만,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사’라는 말에 눈이 번쩍 띄었다. 낼름 사기에는 턱없이 비싼 가격이었지만, 제대로 된 지도책이 나온다는 말에 눈이 먼 나는 “또 지르냐”라는 주위의 만류와 뒤비의 책은 가격대 만족비가 나쁘다는 평을 무시하고 기어이 ‘지르고야’ 말았다.
생각 이상으로 두껍고 커다란 책을 받았을 때, 그리고 책 한 쪽을 펼쳤더니 ‘30년 전쟁과 그 결과’라는 지도가 보였을 때 이미 승부는 끝나 버렸다. 좋은 지도책 하나 건졌다는 흐뭇한 마음에 그 어떤 문제점이 보일지라도 이 책은 처음으로 보는 사회과부도를 넘어선 제대로 된 지도로 된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모든 것이 용서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한계, 유럽 편향적인 편집
먼저 목차를 보자. 각각의 지도를 하나의 장(章)으로 봐 목차에 명기한 이 책은 크게 ‘서기 1000년까지의 고대 세계’ ‘서기 1000년 이후 유럽의 역사’ ‘서기 1000년 이후 유럽의 국가들’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1990년 이후의 세계’로 구성됐다. 서기 1000년을 역사의 큰 구분점으로 삼는 아날학파의 역사관과 유럽사를 중심으로 하면서 다른 대륙사를 덧붙인 다분히 유럽 중심적인 세계관이 먼저 엿보인다.
이러한 유럽 중심적 세계관에 대해서는 ‘지도로 보는 세계사’가 아닌 ‘지도로 보는 유럽사’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유럽을 벗어나면 70여 명이나 되는 편집진의 규모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관련 지도가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한국은 중국사의 한 귀퉁이에서 속국으로 묘사돼 있기 일쑤며, 한반도만 나온 지도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3장과 북한의 핵위협과 관련된 지도가 달랑이다. 목차에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로 명시돼 있지만 지리상의 발견 때 태평양 항로를 제외하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딱 2장만 실린 오세아니아에 비하면 감지덕지(?)이다. 아메라카와 아프리카도 마찬가지다. 유럽인의 침략과 그 후의 사건을 제외하곤 실린 지도가 적어 편집진의 의도적 누락 내지는 타문명권에 대한 무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철저히 사료를 중심으로 역사 변화의 큰 흐름에 주목하는 아날학파의 주관심사로 볼 때 아날학파의 거두인 조르주 뒤비가 책임 편집한 이 책이 유럽 편향으로 쓰였다는 것은 애초에 예상된 이 책의 태생적 한계이다.
대신 이 책을 유럽사만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대적으로 사료 확보가 용이해 그렇겠지만 다양한 지도가 실려 있어 역사적 사건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요긴하다. 가령 2차 포에니전쟁 당시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알프스산맥을 어디로 넘었으며 이후 어떻게 이탈리아반도를 헤집고 다녔는지, 영국의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인구밀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근세 주요 사건 때마다 프랑스에서 주요 정당의 지지율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로마네스크와 고딕 그리고 바로크 예술의 영향력이 어디까지인지 한눈에 보인다.

역사 공부의 필수품, 역사지도
전체적으로 이 책에는 각 쪽마다 한두 장의 지도, 그리고 그에 관련된 해설과 사진이 실려 있다. 지도는 생각 이상으로 지명 표기가 꼼꼼히 돼 있어 어떤 지도는 너무 많은 표기로 한눈에 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해설은 한눈에 읽기에 좀 작은 크기로 인쇄돼 있지만, 마치 노트 정리 잘하는 학생이 수업내용을 딱 요점만 잡아 노트에 적은 것처럼 별 다른 사관의 개입 없이 사건의 개요로만 깔끔하게 정리돼 있으며,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따로 빼어 설명한다. 단순히 지도만 보기에는 적잖은 배경지식이 요구돼 역사를 공부하는 데 먼저 펴들고 볼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의 존재의의는 역사를 공부하는 데 꽤나 유용한 참고자료라는 것이다.
사건사 중심으로 명료하게 정리된 해설에서 보듯이 이 책의 편집 방향은 특정 역사적 사건에 대해 대체로 공평하게 접근했다. 사실 역사지도는 역사가가 말로 떠드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거짓말이 덜하다. 지도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말의 편견이 작용할 가능성도 있지만, 대체로 역사지도는 사료를 바탕으로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사실과 그 방향성을 지도에 담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파리가 어디에 있고, 영국인들이 지금의 프랑스 땅을 얼마만큼 잠식했는지는 공통된 사료로서 존재하니까.
역사는 현 시대 사람들이 경험하지 않은 과거의 사실이기에 개인 혹은 집단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역사는 R. G. 콜링우드가 이야기한 것처럼 역사가에 의한 구성적 상상력(constructive imagination)에 의한 스토리텔링의 결과물로서 존재하기 마련이다. 역사수업에서 사건사와 연대기만 줄줄 외우는 데 식상한 아이들은 공상을 하든 책이나 드라마를 차용하든 저마다 스토리텔링을 하며 자신의 역사관을 확장시킨다. 그런 아이들에게 역사지도는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뜀틀이면서 상상에 몰두해 비약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매트리스의 역할을 한다. 저자인 조르주 뒤비는 이를 반영하듯 서문에서 “지도는 … 역사교육의 보조수단으로서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 지도를 이용한 수업은 지구상에서 벌어진 과거의 일들의 전체적인 의미망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라고 말한다. 흔히 역사와 지리는 시간이라는 씨줄과 공간이라는 날줄을 엮어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지도로 보는 세계사, 혹은 세계사지도로서 이 책은 각 학급마다, 아니면 학교도서관에라도 반드시 비치돼야 할 책이다. 아이들이 역사수업이 끝나마마자 쪼르륵 지도책 앞으로 달려가 ‘영국이 전 세계를 이렇게나 많이 지배했어’ ‘뭐야,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잖아’를 외칠 수 있을 때 역사는 비로소 암기과목의 오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설사 그렇지 않아도 도서관에 가져다두는 순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책을 빤히 들여다보는 아틀라스키드들이 줄을 설 것은 불을 보듯 빤하다. 그들의 상상력에 우리는 경배의 잔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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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다니던 데에서 논술고사 대비용 단행본을 만든다고 해서 썼던 글인데, 아주 당연하게 예상했던 대로 계획이 엎어지면서 졸지에 오갈 데 없게 된 글이다.


 시장의 신화를 벗겨 내다
― 칼 폴라니, 《거대한 변환》
 
칼 폴라니와 그의 경제이론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일반적으로 경제학 안에서는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칼 폴라니의 경제이론은 애덤 스미스로부터 출발해 알프레드 마샬에게서 체계적인 틀을 갖춘 학문이 된 자본주의 경제학은 물론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체계화된 사회주의 경제학과도 모두 차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이나 상품을 비롯한 경제학에서 언급되는 경제학적 개념의 기원과 인간의 살림살이livelihood로서 경제활동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기에 경제 자체에 대해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간과하고 넘어가기 힘든 인물이다.
먼저 서울대에서 2005학년도 모의고사와 2008학년도 예시문제로 두 차례 출제된, 칼 폴라니의 대표적인 저작인 《거대한 변환 : 우리 시대의 정치적․경제적 기원》을 발췌한 제시문을 중심으로 칼 폴라니의 경제이론을 살펴보자.
2005학년도 모의고사에 출제된 제시문에서 눈에 띠는 것은 ‘자기조정적self-regulating시장’과 ‘허구적 상품’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 시장은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적정 가격을 스스로 찾는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칼 폴라니는 그러한 시장을 ‘자기조정적’ 시장이라고 지칭한다. 그런데 칼 폴라니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시장이 존재하며 이에 따라 경제구조가 성립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장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속에서는 무엇이 왜 거래되고 있는지를 인류학anthropology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경제학에서는 시장이든 자본주의든 인간의 경제활동에서 종착점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사회주의 경제학에서도 자본주의 이후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며 결승점을 설정한다. 하지만 폴라니는 시장이나 자본주의 같은 경제학적 개념과 구조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경제현상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다시 이야기할 형식주의와 실재주의 논쟁에서 다시 설명한다.

자기조정적 시장과 허구적 상품의 출현
먼저 《거대한 변환》의 주된 내용인 시장체계에 대해 폴라니의 이론을 들여다보자.
우선 우리가 흔히 시장market이라고 단순하게 말하는 자기조정적 시장은 본질적 형태가 아닌 전제조건으로서 기존의 거래 상품인 재화와 용역뿐만 아니라 노동, 토지, 화폐 같은 허구적인 개념까지도 상품으로서 교환이 가능하고, 이러한 개별 상품이 각각 교환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시장의 형성을 방해해서도 안 되며 판매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소득이 형성되어서도 안 된다.

시장경제란 시장들로 이우러진 하나의 자기조정체계를 가리킨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오로지 시장가격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경제이다. … 자기조정이라는 것은 모든 생산활동이 시장 판매를 위해 수행되고 모든 소득이 그와 같은 판매로부터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생산요소에 대해서, 그러니까 재화(항상 용역도 포함)뿐 아니라 노동, 토지, 화폐에 대해서도 시장이 존재한다. … 국가와 국가정책에 관련된 몇 가지 전제가 따른다. 시장 형성을 방해하는 것이 없어야 하고, 판매 아닌 다른 방법으로 소득이 형성되어서도 안 된다. 또한 재화의 가격이든 노동이자 토지, 화폐의 가격이든 시강 상태의 변동에 따른 가격조정을 방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일단 경제영역과 정치영역이 분리되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중상주의와 그 이전 시대처럼 정치와 경제가 혼합된 혹은 경제가 정치에 종속된 상태로부터 경제영역이 분리disembeded된 상태가 되어야 한다. 예컨대 중상주의시대에는 산업에 대한 중앙 정부의 간섭이 일상적이어서 시장은 자기조정이 불가능했으며, 지주나 길드 같은 전통적인 이해집단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노동과 토지가 상품으로서 거래되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식민지 경영과 산업혁명에 따른 무역과 산업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계층인 상공인들은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상품은 물론 노동력과 부존자원이 자유롭게 거래될 수 있기를 원했다. 또한 과거처럼 중앙집권형 정부의 간섭 아래서는 이전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난 교역량을 일일이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시대와 사회의 변화 요구에 따라 시장 스스로가 공급과 수요를 조정하며 가격과 공급량을 결정할 수 있는 자기조정적 시장이 만들어졌으며, 그러한 시장에서는 노동과 토지, 화폐 같은 허구적인 상품도 자유롭게 거래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등장한 자기조정적 시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시장시스템의 성립됨에 따라 정치영역으로부터 분리된 경제영역은 바야흐로 인간의 살림살이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내 인간사회 전체가 경제체제의 부속물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경제에 있어서 ‘거대한 변환’이다.

자본주의의 도래, 보편적 결과인가 특수한 과정인가
이러한 자기조정적 시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간섭의 배제 말고도 앞서 말한 허구적 상품인 노동, 토지자원, 화폐자본의 상품으로서 거래가 요구되었다. 흔히 생산의 3대 요소라고 불리는 이들 생산요소는 각각 임금, 지대, 이자라고 하는 요소가격이 주어졌으나,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자유롭게 거래될 수 없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의 율법에 의해 고리대금행위가 금지되는 것은 물론 이자를 받는 행위조차도 금지된 시기가 있었다. 또한 산업화 이전 대부분의 인간은 노예나 농노처럼 토지에 귀속되어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이 지주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토지도 상속을 통한 제한적인 주인의 변동이 있었을 뿐 거래 자체는 그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태인들에게 부분적으로 대부업을 허용했던 것처럼 차츰 이자의 부여가 사회적으로 통용되었고, 인클로저운동을 통해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여겨지면서 대지주와 중소지주, 그리고 농민들 사이의 거래가 있게 되었으며, 스피남랜드법구빈법의 폐지 등으로 토지로부터 종속이 풀린 농민들은 지주나 국가의 보호 없이 스스로가 도시에서 임금노동을 통해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는 순간 노동력은 마치 상품처럼 거래되기 시작했다.
칼 폴라니는 애덤스가 《국부론Wealth of Nation》을 쓴 1776년이 아닌 스피남랜드법의 폐지1834로 인해 인민들이 먹고살 길은 오로지 임금노동으로만 가능하게 되면서, 즉 노동시장이 형성되면서부터 자기조정적 시장이 완성되어 지금의 자본주의가 도래했다고 한다. 《거대한 변환》의 4장 〈사회와 경제체계〉를 보자.

시장경제란 시장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자기조정체계를 가리킨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망하자면, 이것은 오로지 시장가격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경제이다. 외부의 도움이나 간섭 없이 전체 경제생활을 꾸려 낼 수 있는 경제라면 대체로 자기조정적이라고 할 만하다. … 역사와 민족지를 보면 대개 시장제도를 갖추고 있는 경제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 시대 이전에 비슷하게나마 시장에 의해 지배되고 규제되는 경제는 없었다. … 출발점으로서 우리는 먼저 원시인의 이윤추구 편향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가설 저변에 깔린 19세기적 편견을 제거해야만 한다. … 최근의 역사학적, 인류학적 탐구 결과에 의하면 인간의 경제는 대개 사회적 관계 속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재화를 소유한다는 개인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회적 입장, 사회적 요구, 사회적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한다.

여기서 폴라니는 애덤 스미스가 언급한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이 원시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가설에 반기를 든다. 이를 위해 그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태평양의 도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경제활동을 탐구한다. 앞서 말했듯 인간의 경제활동은 정치활동 등에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각 부족/민족의 사회적 특성에 따라 각각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특히 생산과 분배라는 경제활동마저도 호혜recoprocity와 재분배redistribution, 집안살림householding통해 공동체적 원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발표했다. 그렇기에 애초에 인간의 “경제체계는 사회조직의 일개 기능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지점에서 칼 폴라니가 말하는 경제는 각 시대와 사회상에 따른 ‘재화와 용역을 제공하기 위한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이외에 다양한 형태의 경제체계가 존재했고, 각각의 경제체계를 하나의 실재實在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실질주의/실재주의substantialism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애덤 스미스 이후 자본주의, 특히 자유주의 성향의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형식주의formalism과 다르다. 이들의 형식주의적 관점은 시대와 사회의 다양성을 불문하고 시장체계는 인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의 이론적 기초는 애덤 스미스의 호모 에코노미쿠스처럼 ‘조금 써서 많이 얻으려는’ 합리적인 행동원리, 즉 이윤극대화의 원리에 입각해 경제체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애덤 스미스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저마다 손해 보지 않으려 하기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격과 공급량이 균형점을 찾는다고 하고, 그것을 시장이라고 규정지었다.

악마의 맷돌, 시장에 의한 사회통합
2008학년도 서울대 예시논제에 실린 제시문은 “인간과 자연 환경의 운명이 순전히 시장 메커니즘 하나에 좌우된다면, 결국 사회는 폐허가 될 것이다”라는 칼 폴라니의 경고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칼 폴라니는 (자기조정적) 시장을 ‘악마의 맷돌’로 비유한다. 이는 본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밀턴Milton〉에 쓰인 시어로 산업혁명이라는 기술발전과정이 문화를 파괴하는 현상을 지칭한 것으로, 칼 폴라니는 극단적 이윤추구를 위해 스스로 기능하는 시장의 무자비한 속성에 의해 인간의 살림살이가 효율성에 지배당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데 쓰였다.

공업생산은 이제 상인이 매매사업으로 조직하고 있던 상업의 부속물적 지위를 탈피하게 되었다. 공업생산은 이제 그에 상응하는 위험을 갖는 장기투자를 수반하게 되었다. … 이들 생산요소 가운데는 노동, 토지, 화폐의 세 가지가 물론 특히 중요했다. 상업사회에서 이들의 공급은 단지 하나의 방법, 즉 돈으로 구입함으로써 조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생산요소는 매매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것은 시장 시스템의 요구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런 체제에서는 상호의존적이면서 경쟁적인 시장들을 통한 자기조정작용이 보장될 때만 이윤이 확보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 바꿔 말하면 시장 시스템의 발전은 사회조직 자체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사회는 모든 측면에서 경제 시스템의 부속물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칼 폴라니는 “노동이 다른 생존활동에서 떨어져 나와 시장법칙에 종속된 결과, 모든 유기적인 생활형태는 근절되고 전혀 다른 원자적, 개인주의적인 조직으로 대체되었다”라면서 자기조정적 시장에 의해 사회의 총체적인 체계가 통합되면서 그간 인간의 생존을 보호해 온 전통적인 보호체제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발생한 노동력 착취, 환경오염과 자연고갈, 식민지의 빈곤, 과잉공급에 의한 경제공황 같은 문제가 일어나 인간은 물론 자연까지 존재를 위협받게 되었다.
폴라니는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생산물의 자유시장에서 거래가 성장, 확대되어 가면서도 앞서 말한 시장의 폐해로부터 사회를 지키려 하는 반작용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모순이 발생되었고, 이는 다시 제국주의 국가 간 대립, 외환의 압력, 실업, 계급 간 대립, 파시즘의 발현 등을 야기시켰다고 한다. 여기서 폴라니는 기종의 신고전학파 경제학자와 사뭇 다른 의견을 펴는데, 이는 이러한 시장경제가 서구 유럽에서 주도적인 경제체계가 되는 데는 국가의 절대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시장과 같은 경제영역은 정치사회영역에 포함된 부수적인 것이었으나, 자유무역, 금본위제, 구빈법 철폐 같은 국가 차원의 규제를 통해 현대적 개념의 시장과 자본주의가 태어나게 된다. 시장에 의한 자유방임국가의 고전적 모델인 영국이 자유방임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 전체적으로 강력한 규제정책을 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폴라니가 말하는 역설, “자유방임은 국가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이다.

폴라니는 자기조정적 시장에 의해 통합된 사회체제를 허물고 사회의 완결성을 유지하면서도 인간 생존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사회로부터 분리된 경제영역을 다시 사회로 환원reembed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를 필요로 하는 문화적 영역과 통제를 필요로 하는 경제영역을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폴라니의 주장은 미래사회에 대한 명확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장경제와 사회의 관계를 서유럽의 좁은 시각이 아닌 다양한 시대와 사회의 역사적 맥락을 포괄적으로 통찰한 폴라니의 시각은 경제인류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칼 폴라니의 저작 :
《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 박현수 옮김, 민음사 1991(절판)
《사람의 살림살이Livelihood of Man》 1, 2권, 박현수 옮김, 풀빛 1998
《초기 제국에 있어서의 교역과 사상》 이종욱 옮김, 민음사 1994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홍기빈 옮김, 책세상 2002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 제임스 R. 스탠필드 지음, 원용찬 옮김, 한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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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미래도 없는 이주노동자라니요? 그럼 난 뭔데요? 나는 미래가 있엉? 선생님 친구처럼 이주노동자를 돕는 활동가는 괜찮고, 이주노동자를 사랑하고 그 사람의 아이을 갖는 건 안 된다는 게 말이 돼요? 도대체 뭐가 달라요? 선생님도 편견으로 가득 찬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어요? 손바닥 뒤집듯이 그렇게 생각이 바뀔 수 있는 거예요? 선생님은 저랑 자히드 관계를 이해할 줄 알았어요."
 
저 구절을 읽으면서 숨이 턱 막혔다. 그것은 단순히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를 사랑하는 정아가 자신의 편이 되어 주던 정원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냥 '다를' 뿐일 사람을 끝까지 '틀린' 사람이라고 우겨대는 한국사회의 단일민족에게 하는 말이었다. 특히나 이해하는 척하면서도 속은 별반 다르지 않는 사람들의 이중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괭이부리말 아이들>로 유명해진 김중미가 오늘의 이주노동자 문제와 과거의 기지촌 혼혈아 문제를 날줄과 씨줄로 엮어 가며 쓴 장편소설 <거대한 뿌리>를 출간했다.
 
음... 여기가지는 너무 기사틱하군... ^^;
 
마감 후 휴무 3일째, 세 번째 짐 실으러 간 룸메이트 녀석이 소식도 없고 다소 지루하기에 이전 직장에 갔다가 신간소개 좀 해달라며 건네받은 <거대한 뿌리>를 꺼내들었다. 최근 10여 년 동안 그닥 소설을 즐겨 읽지 않았는데, 그냥 시간때우기처럼 꺼내든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한달음에 다 읽어 버렸다. 글 초반 정아의 항변이나, 혼혈인 재민이 그렇게 미제 좋아하는 인간들이 절반인 자신은 왜 싫어하냐고 토로하던 장면 등에서 에일리언 마냥 속에서 꿈틀거리는 쪽팔림에 잠시 책장을 덮기도 했지만, 공선옥이 추천사에서 말한 것처럼 "아픈 가슴 위로 눈물이 흐르고 눈물 흐른 자리에 새살을 돋게 하는" 느낌에 묵묵히 가슴을 쓰다듬으며 마지막 장까지 간신히 내달릴 수 있었다.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 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눈치를 챈 사람도 있겠지만, 김중미는 김수영의 시(집) <거대한 뿌리>에서 제목을 빌어왔다. 아마도 한국사회에 깊게 자리 잡은 타자에 대한 결벽증 같은 차별을 '거대한 뿌리'로 봤고, 그는 그것을 동두천을 비롯한 곳에 자리 잡은 기지촌 사람들의 삶, 좀 더 나아가 미군들 뒷바라지를 하면서 혹은 그들의 원조로 먹고살아야만 했던 한국현대사의 아픔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 듯하다.
 
아픔은 오래간다. 아픔은 상처를 바꿔 가며 통증을 준다. 아직도 잔존하지만 혼혈 문제는 하인즈 워드가 이름을 떨치기 전에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등장했던 과거의 유산이었다. 하지만 그 아픔은 이주노동자와 가족 문제로 변태해 여전히 살 속을 파고들며 통증을 가져다준다. 피부를 뚫고 살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 "넌 우리와 달라"라는 이름의 거대한 뿌리. 그런데 눈물은 그 상처로 파고들며 뿌리를 거둬 내 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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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전 직장에 들렀다가 두 권의 책을 선물받았다. 그중 한 권은 선물이라기보다는 신간소개에 넣어 달라는 청탁 아닌 청탁이지만, 다른 한 권은 어린이책/그림책이다 보니 말 그대로 선물이다.
 
처음에는 그냥 크레파스(색연필인가)를 사용한 그림들로 채워졌구나 싶었는데, 그림체라든가 구성방식이든가 호기심이 끌렸다. 그리고 제목에 들어가는 '분홍돌고래'. 아마존강에 서식한다는, 길을 일고 강으로 흘러들어왔다가 민물에 사는 돌고래. 왈터 살레스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는 분홍돌고래에 관한 전설이 언급된다. 분홍돌고래의 유혹에 넘어가 '교미'한 남자는 빠지지 않아 결국 죽고만다는... ^^;
 
아, 책 소개가 늦었다. 김한민이 그리고 쓴 <웅고와 분홍돌고래>라는 그림책이다. 웅고라는 이름의 노랑머리 흑인아이, 개로 추측되는 하마라는 이름의 동물, 그리고 녹색 악어가 주인공이다. 이 셋은 숲속에서 분홍돌고래를 기다린다. 하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분홍돌고래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림체가 어디서 낯이 익다 했더니 재작년에 신간소갯글을 썼던 <유리피데스에게>를 그리고 쓴 김한민의 작품이었다. 예술 본연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사소통하지 못하는 세태에 한껏 우울해진 가면쟁이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담아낸 이 책은 그림체라든지 주제라든지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그가 새로 책을 낸 것이다. 그것도 앞서 말한 '친정'에서...
 
이번 책에서도 말하는 내용은 비슷하다. 부질없는 기다림, 근거 없는 희망, 소외된 인간에 대한 씁쓸한 주제의식은 귀여운 인물들의 모습과 달리 몹시 생경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가지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사서 보시라. ^^; 신간소개를 찾아보니 4-7세용이라고 한 매체도 있는데... 글쎄... 내가 보기엔 성인용이다. 물론 아이들에게 읽어 주면 아이들은 딱 그 나이 수준으로 이해할 테고, 어른은 어른의 수준으로 읽을...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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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소설가 류진운의 쓴 중편 <一地鷄毛:닭털 같은 나날><官人:관리들 만세><溫故一九四二:1942년을 생각하다>을 모은 책이다.
류진운은 중국의 관료제와 소시민의 일상을 예리한 블랙유머로 풀곤 한다. 그는 중국 [평론전선]에서 '20세기 20대 작가'로, [도서일보]에서 <一地鷄毛>가 '20세기 100대 세계 명작'으로 선정될 정도로 중국에선 유명한 작가이다.
<一地鷄毛:닭털 같은 나날>은 틀에 박힌 관료제 속에서 예전엔 지성인이라고 불렸던 소시민이 비루한 일상 속에서 얼마나 쪼잔해질 수 있는 지를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한탄스럽게 풀어간다.

닭털, 닭털로 만든 파카도 있지만, 아무래도 오리털보다는 못한 느낌을 준다. 그만큼 비루함을 닭털은 우리에게 던져 준다. 그런데 '닭털 같은 나날'이라니.. 일상 또한 닭털 만큼이나 비루하다는 뜻인데, 임씨와 그의 부인의 일상은 그야말로 비루하기 짝이 없다.
상한 두부 한 모를 가지고 티격태격하고, 수도 검침원은 물도둑질한다고 그러고, 아내의 이직을 위해 뇌물을 바치려다 면박이나 당하고, 고향한테 온 손님에게 푸대접을 하고, 딸아이는 겨우 고급 유치원에 보내 놨더니 이웃집 아이의 수행원 노릇을 해야 한다. 대학까지 나와서 중앙 부처에서 관리로 일하는 부부의 행색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비루하다 못해 쪼잔하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구질구질함과도 맞닿아 있다. 결국은 가정부를 내보내고, 아이를 고급 유치원에 보내고, 그들도 청탁을 받을 위치에 서지만, 그 동시에 체면 집어 던지고 오리 장사 알바를 하고, 배정된 이유가 배배 꼬이지만 통근버스를 좋다고 타고 다닐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일상은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우리네 일상은 임씨 부부의 것과 뭐가 다를까? 병원비 아까워 병원 안 가고, 안경 새로 맞추기 싫어 안 쓰고 다니고, 택시비가 아까워 찜질방에서 자고.. 단지 구질구질, 비루, 쪼잔의 정도와 스타일 차이일뿐이다. 결국 나도 우리도 모두 닭털 위에서 뒹굴고 있다. 임씨 부부가 안타까워 보이는 건, 공산당 치하 틀에 박힌 관료제와 어설픈 시장 경제가 뒤섞인 오늘의 중국은 너무 복잡하고 피곤하다는 것이다.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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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학교의 행복 찾기 - 8점
여태전 지음/우리교육

간디학교에서 학생들은 정말 행복할까
- 《간디학교의 행복찾기》, 여태전 | 우리교육

#1
간디학교는 비록 특성화고등학교와 자율학교 시범학교라는 정부가 붙인 딱지를 붙이고 있지만 그 본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안학교이다. 점점 대안학교를 표방하는 학교가 늘어나면서, 간디학교 사태를 통해 대중들에게 대안학교 내지는 대안교육이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일상화된 하나의 교육담론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 대안이 도대체 무엇에 관한 대안이냐?" 하고 물어오면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렵다. 종종 이런 말을 받고 나름대로 설명하긴 하지만, 왠지 뒷맛은 개운치가 않다. 그 까닭은 '대안'이라는 말이 '어떤 것을 대신하는 다른 방법'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육'이라는 말 앞에 붙은 까닭에 더욱더 쉽게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18p).
사실 대안학교라는 말 앞에는 기존의 학교가 대신해야할 무언가가 있는, 깨놓고 말하면 문제 학교라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말을 꺼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문제 학교는 어떤 학교를 말하는가? 저자는 간디학교의 창립자인 양희규 선생의 입을 빌려 말한다.
고등학교 시절은 악몽 같았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중략) 학교를 '수용소'라고 생각했고, (중략) 양희규 선생은 잘못된 교육제도 때문에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이 상처 입는 꼴을 견딜 수가 없었다(59p).
양희규 선생은 왜 자신이 다닌 학교를 '수용소'라고 고백했을까? 저자는 그에 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우리 사회의 일류병과 학력주의는 온 국민의 생활 전반을 '식민화'하고 있다. 일류병은 필연적으로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패배의식과 열등의식을 갖고 하고 나아가 '들러리 인생'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억압한다. 이 같은 교육 상황을 사회 구조악(구조화된 악)으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그 대안을 찾고자 간디학교를 연 것이다(67p).
양희규 선생을 비롯한 대한민국이라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 다녔거나 다니고 있는, 아니 다녀야만 하는 학교를 양희규 선생은 '사회 구조악'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이자 근원이 '입시 위주의 교육'이며 이는 "학부모, 교사, 교육 관료, 정치가 모두가 공모자가 되어 '입시 위주의 교육 체제'라는 철옹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기 때문(74p)"이라고 주장한다. 거칠게 말하면 기존의 학교는 앞에서 말한 '문제 학교'이자 '불행한 학교'라는 것이다.
좀 더 나은 교육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입시 위주의 교육 체제'를 부정하거나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교육 체제를 구성하는 지금의 학교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학교라는 존재가 근대 교육의 산물이자 공교육의 전형이다 보니, 그것의 효용성과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그것들을 위협할 수 있는 부메랑으로 작용될 수 있을까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경쟁과 효율성만을 강조하며 사이비 교육인 사교육의 입김이 점점 세지는 상황에선 더욱더 위험한 행동으로 생각되고, 또한 그렇게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학교를 바라보는 서너 가지의 생각이 들어난다. 하나는 '학교'란 공간 자체를 부정하며 '배움'의 공간을 학교에 한정시켜선 안 된다는 이른바 '탈학교론'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학교의 문제점을 인정하지만, 공교육의 전형이며 교육의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선 학교란 공간은 불가피하게 존재한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엔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 우리 사회를 좀 더 행복한 사회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도 있다. 양희규 선생은 그런 '행복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간디학교를 만들게 된 것이다.

#2
그렇다면 현직 일반학교 교사인 저자는 대안학교인 '간디학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세상에 관해, 교육에 관해, 내 삶에 관해 서서히 체념과 냉소에 젖어들 무렵 간디학교를 만났다. 간디학교는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여전히 교육에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흔들리던 나는 간디학교를 만나면서 다시 곧추서게 되었다(19p).
간디학교를 좋아하니깐 책을 썼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저자는 간디학교를 통해 '행복한 학교'가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음을 책 전반에서 담담히 고백한다. 그리고 간디학교를 비롯한 대안학교의 '행복한 학교' 만들기 실험이 계속되면 일반 학교도 언젠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이 책에서 간디학교의 탄생에서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기존의 학교가 '행복한 학교'로 변모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그것을 통해 오늘날 공교육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한다.

저자는 왜 간디학교를,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대안학교를 기존의 학교에 대한 '대안'이라고 생각했을까? 저자는 간디학교의 교육철학을 설명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유를 간접적으로 밝힌다. 간디학교 교육철학의 핵심은 '사랑과 자발성의 교육'이다.
간디학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서로에 대한 믿음, 서로의 행복과 기쁨을 비는 순수한 마음, 그것을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사랑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적절한 교육과 습관과 노력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다. (중략) '자발성'의 원리는 모든 가르침과 배움은 자발성을 가질 때만 그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강제로 혹은 타의로 마지못해 이루어지는 가르침이나 배움은 결코 기쁨을 주지 못라며 오히려 불행과 고통을 초래한다고 본다(72p).
간디학교는 이런 교육철학과 함께 추구하는 학교의 모습을 '행복한 학교'라고, 그것의 교육목표를 '전인적인 인간, 공동체적인 인간, 자연과 조화된 인간'이라고 정의내린다. 그런데 이런 교육목표는 일반학교에서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이러한 말들이 교과서 안에만 있을 뿐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 있다. 아무리 좋은 이념과 교육목표라고 하더라도 현장의 실천 원리로써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한낱 구호로만 그치는 것은 문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대안교육은 이 같은 이념과 현실의 불일치를 어떻게 하면 더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 데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중략) 지난 반세기 동안 유지되어 온 공교육 체제는 이와 같은 이념과 교육목표를 실천하기에는 처음부터 그 시스템이 잘못 짜여졌다고 볼 수 있다. (중략) 게다가 '물질적 근대화(또는 압축 근대화)'가 낳은 우리 사회의 갖가지 사회병리현상 특히 교육 영역에서만 본다면 우리 사회의 학력주의와 과잉 교육열 속에서 전인적인 인간을 육성한다는 것은 말뿐인 구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안학교는 바로 이러한 근대화 과정이 낳은 '구호뿐인 어두운 그늘'을 걷어 내고자 하는 의지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78∼79p).
#3
대안학교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있지만 간디학교를 일반학교의 '대안'이라 생각하는 것은 섣부르다. 저자 또한 "간디학교는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 진행형'이다"라며 밝히고 있으며, 간디학교의 아쉬운 점과 문제점을 솔직히 지적하고 있다.
간디학교가 처한 가장 큰 문제점은 아마 기존의 공교육 체제와의 갈등과 긴장이 아닐까 한다. 기존의 미인가 학교에서 특성화고교로 인정받고 자율학교 시범학교 지정 받으면서,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지정된 교육과정 이수 요구 등을 받아들여야 함은 자유와 자발성을 추구하는 대안학교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재정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공교육의 위기 상황 속에서 이를 극복할 새로운 교육을 열어 보자는 뜻에서 제도권으로 들어온 것이다(68p).
하지만 2000년 경남교육청이 간디중학교 해산 명령을 내렸던 것처럼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름에서 기인하는 수많은 난관을 맞닥뜨려야 했다. 교육청의 양희창 교장에 대한 고발과 학교-학부모-시민단체의 연대 투쟁의 대결 구도 속에 간디학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대안교육에 관한 담론을 생성시켰지만, 결과적으로 중학교 과정을 타지로 옮기면서 사실상 교육 당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만다.
아직도 공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행정기관은 중도 탈락자들을 위한 대안교육 기관은 허용하면서도 간디중학교와 같이 새로운 교육철학과 교육방법을 주장하는 대안학교는 공교육 체제로 들어오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반면에 자립형 사립학교의 형태로 운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현실이다(147p).
저자가 말한 것처럼 교육 당국은 부적응아를 위한 대안학교는 골칫덩어리를 대신 맡아줄 기관으로 인식하지만, 대안적 가치와 체제를 지향하는 대안학교는 그들이 구축한 시스템을 거부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이단아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점은 학교가 국가의 일관된 시스템과 철학에 의해 운영되어야 하는 것인가, 특히 교육이 의무이자 권리라는 점에서 의무교육을 단순하게 '의무취학'으로만 해석할 것인가 같은 문제이다. 알다시피 근대 교육의 핵심은 국가에 의해 통제된 공교육 체제이다. 공교육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무엇을 배우는 것인지를 이야기해 보기도 전에 국가(정부)는 교육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보편성과 공공성만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저자는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는 보편성과 공공성의 추구는 자유 없는 평등을 추구하는 왜곡된 사회주의와 다를 없다(220p)"라며 다양성과 보편성의 두 축이 조화와 상생의 원리로 작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4
저자는 5장과 6장에 거쳐 간디학교 내부, 특히 교사와 학교 공동체가 어떠한 문제점에 직면해 있는지를 설명한다. 간디학교의 교사는 좁게는 기존의 학교라는 공간이 가진 구조악을, 넓게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한계에 대한 불복종과 도전을 위해 모인 집단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공동체를 지향하며 '자발적인 가난'을 통한 청빈한 삶을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이런 이상과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의 간극은 크다. 특히 '잘 가르쳐야 한다'라는 사명을 갖고 학생들을 만나가는 대안학교의 교사들에게 그 간극은 더더욱 크다. 그렇다면 간디학교가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은 무엇일까?
간디학교는 작은학교를 지양한다. 그들이 추구하고자하는 교육과정은 다양하게 특성화되고 세분화되어 있다. (중략) 교육과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면 한 교사가 두세 개 교과를 맡거나, 아니면 교과별로 교사를 모두 채용해야 한다. (중략)
간디학교는 정부의 재정결함보조금으로 임금을 받는 '발령 교사' 집단과 학교법인이 필요에 따라 자체적으로 채용한 '미발령 교사' 집단으로 나누어졌다. (중략) 외형적으로 볼 때 그들 교사 공동체 내에서는 발령과 미발령의 차이는 없다. (중략) 교사 공동체 내규에 따라서 월급은 똑같이 나누어 가진다고 하지만, 미발령 교사는 일반학교 교사가 누리는 각종 사회복지 정책의 혜택을 누릴 수가 없다. (중략) 무엇보다도 미발령 교사는 사회적으로 교사로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심리적 상실감을 가지는 듯하다. (중략)
또 하나, 간디학교 교사의 임용구조의 현실에서 주목되는 것은 교사들의 '잦은 이직 문제'이다. (중략) 간디학교의 정체성을 놓고 논쟁하다가 교사 여섯 명이 떠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교사들이 간디학교를 떠나는 이유는 개개인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보통 경제적인 이유, 교사 공동체 내의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157∼159p).
간디학교의 교사 조직은 수평적인 관계에서 민주적인 토론문화를 형성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그들의 회의나 연수도 간디학교 사태 이후 '소진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지적하는 교사도 있다. (중략) 전체 교사가 공유하지 못하는 일을 침묵으로 일관하는 회의 풍토는 염려스러운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장차 대안학교인 간디학교도 전통적인 학교 조직의 특징처럼 '관료제화'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중략) 이런 염려 속에서 간디학교 교사들도 갈수록 교직 사회 특유의 '개인주의적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내부 비판도 나온다(164∼165p).
대안학교 만큼이나 대안적인 교사 공동체를 꿈꾸었던 간디학교의 교사 공동체도 이상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뚜렷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다. 게다가 간디학교 사태 이후 교사들은 갈수록 교육 외적인 일로 바빠져서 쉽게 피로해지고, 정작 '아이들에게 민감한 교사'로서 자기 정체성을 찾기 못했던 것이다.
한편, 이런 교사 공동체의 문제와 함께 간디학교를 어렵게 한 것은 대안학교인 간디학교조차 대학 입시와 수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국가에서 인정하는 졸업장조차 별 관심 없었던 학부모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 입시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관해 학교철학을 위협하는 언행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들 또한 그런 욕구를 내보였고, 학교는 교육철학의 기본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범위 안에서 자발적인 보충수업을 실시하기 이르렀다. 물론 일반학교처럼 대학 입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은 아닌 데다, 양희규 선생부터 "대안학교와 대학 입시를 반대 관계로 봐서는 곤란하다. 전인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을 고수하면서 학생들이 원하고 얼마든지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대학진학이라고 판단되면, 열심히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것은 대안교육의 개념에 전혀 배치가 되지 않는다(169p)"라며 대학 입시에 대한 분명한 관점과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하지만 양희규 선생은 물론 저자조차 대학 사회에 대한 불신감을 내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 없이 학생들의 진로와 진학 지도에서 스스로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5
저자는 간디학교가 최종적으로 꿈꾸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자유인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핵심 교육이념인 자유와 자발성 문제는 아직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현재 간디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자유의 첫 단계인 해방의 단계까지는 나아가지만, 그 다음 단계인 선택과 책임의 단계로는 나아가지 못한다는 지적들이 번번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장인의 삶에 기초한 자유인을 기르자고 하는 그들의 교육 이상을 현실로 바꿔 놓기에는 아직도 많은 어려움이 있다(174p).
자유와 자발성의 문제 앞에선 교사 또한 마찬가지다. "교사들에게 자유와 자율권이 지나치게 허용되다 보니, 교사들은 일체의 교육활동에 대해서 동료 장학이나, 지도·감독의 시스템이 조금도 없다"라는 일부 교사의 말과 함께 저자는 배성근 서기관의 "대안학교는 아이들의 자유를 위한 곳인가요, 교사의 자율을 위한 곳인가요?"라는 말(183p)을 통해 교사들이 자신의 영역 안에서 전문성과 탁월성을 갖춰 나가야 함을 지적한다. 이런 자성적 비판을 통해 삶과 교육이 일치하는 대안적 삶을 살아야 하며, 그를 통해 진정한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간디학교는 그들의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교육철학인 '사랑과 자발성'을 바탕으로 그들이 꾸려가는 공동체의 특성을 표현한 것이다. 간디학교는 이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관용' '이해' '배려' '신뢰' '정의' '용기' '성실'의 일곱 가지 덕목을 제시하면서 이것들을 생활화하는 실천을 강조한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학생들은 "사랑 받고 사랑하며 사는 사랑의 공동체는 물질적으로 윤택한 생활과 쾌적한 교육환경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188p)"는 것을 깨달아 왔다.
한편 교사들은 "결국 사랑의 능력을 가르쳐야 할 개개인의 교사들부터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사는 일이 일상화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아이들과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겠느냐(192p)"라는 질문을 받고 있다. 이는 새로운 학교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교사들조차 "일반학교 교직문화의 특성인 개인주의적 특성이 그대로 영속화되는 것(193p)"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간디학교 사태를 겪으면서 소진된 '토론 문화' 같은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으며 사태가 마무리되면서 점차 나아진다고 하지만, 거꾸로 간디학교가 안정화되면서 찾아오는 안주하려는 욕구 속에서 이 문제는 다시 불거지지 않을까 한다.

양희규 선생은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찾도록 안내해 주는 교육, '자기발견의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을 추구하고자 했다. 저자는 본질적의 교육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을 왜 새삼스레 강조할까?
오늘날 우리의 공교육(일반학교) 체제는 그 원리를 실천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구조화된 악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195p).
사람들은 대부분 열등의식, 패배의식, 또는 냉소주의로 흘러들어 또 다른 불안과 초조를 확대재생산 한다. (중략) 서서히 꿈과 희망을 접으면서 일상성에 깊이 매몰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소외는 바로 여기서부터 싹이 튼다. 이렇듯 자기발견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의 악순환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행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 개개인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기발견을 통해 행복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196p)
간디학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발견의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을 만들고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간디학교라고 해서 이러한 문제 해결에 있어서 완벽할 수는 없다.
실제 운영상에서 자잘한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으며, 아직 그 교육적 효과를 검증할 수 없는 실험 단계에 있다(198p).
그동안 교육과정의 운영에서 인성 교육에 중점을 두다 보니 상대적으로 지식 교과를 소홀하게 다루었으며, 거기에 따라서 지적 탁월성을 이끌어 내는 데는 부족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199p).
현재 우리나라의 대안교육 운동은 기존의 주지주의적 교육 전통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했던 경험주의나 진보주의 교육이 지녔던 한계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한계를 갖는다. 교육과정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 중의 하나로서만 위치하게 될 뿐, 기존 교육의 정당한 대안으로서 작동하는 데에는 명백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된다(최도연, 200p).
간디학교에서조차도 "아이들의 학습 요구는 외면하고 교사의 의도대로 주입하고 가르치려는 전통적인 공립학교식의 수업 방식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배성근, 203p)
이런 문제들에 대해 간디학교와 교사들은 내부에서부터 그 진단과 처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거듭나기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을 넘어서 앞으로 그들이 만든 교육과정을 통해 어떻게 '탁월한 개인'을 키워내느냐라는 실천적인 모습이 요구된다. 또한 대안 찾기 과정에서 무엇을 '단절'시키고 무엇을 '연속'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6
저자는 간디학교를 통해 우리의 교육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려보려고 했다며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이것이 대안교육이요, 대안학교다'라며 말하지 못하며, 간디학교 또한 아직도 문제가 많은 학교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간디학교가 그동안 겪은 시행착오를 우리 교육을 살리는 희망과 꿈, 우리 교육의 어둠을 밝히는 '예광탄'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학교는 대안학교로 거듭나야 한다"라는 간디학교 교사들의 메시지를 전한다. 물론 그는 이 말과 함께 "모든 학교가 간디학교를 닮을 이유도 없고, 현실적으로도 그럴 수 없다"라며 우리가 선 위치에서 우리 여견에 맞게 '방향전환'을 하면 된다고 말한다.
학생 수로 비교한다면, 시골 대안학교 열 곳보다는 도회지의 일반학교 한 곳이 제대로 '돌아서기' 또는 '정상화'만 된다면, 우리는 시름에 빠진 아이들을 짧은 시간에 더 많이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221p).
결국 저자도 간디학교를 세운 양희규 선생도 교육을 통해 '사회 구조악으로부터 아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간디학교가 지난한 과정 속에서 지금까지 견디어 온 이유이며,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모든 학교가 대안학교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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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경향신문에서 이 기사를 읽고 난 후, 그리고 그 기사와 연루된 포스트와 그와 또 연루된 다른 포스트를 읽으면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데는 무한한 책임의식, 그리고 그것의 실제 구현 형태인 돌 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널까 말까 하는 꼼꼼한 검증이 무척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단순히 하나의 글을 가르고 묶은 뒤 문장을 교열하는 정도로는 책은 세상을 채울 텍스트의 집적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언제든 수정 가능한, 그리고 언제든 오류가 발생한 사실을 알려 주면서 상호소통할 수 있는 온라인 매체와 다르다. 그러기에 책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교과서를 만든다 하는 나로서는 가슴에 철필로 아로새겨야 할 교훈이다.

P.S.#1. 그나저나 문학과지성사는 대단한 위기상황에 봉착했다. 마치 가래로 막아야 할 것을 호미로 막다가 밭을 절단 낸 출판계의 농심(생쥐깡을 기억하시라)이 된 모양새이다. 어떻게 대처하려나? 기사나 나귀님의 포스트대로라면 갖은 비난이 쏟아질 텐데, 그러기엔 이 프로젝트는 애당초 덩치가 너무 큰 공룡이다.
P.S.#2. 문제의 해제를 쓴 이익성 교수는 아무래도 제자에게 원고를 쓰라 하고 검토도 안 한 채 출판사에 송고한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대필시키는 기존 학계의 문제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이 부분은 사실이 아니라 내 억측이라고 한다.)
P.S.#3. 알라딘 나귀님이 지적했듯 '순수문학'의 장르문학에 대한 폄하하는 듯한 말 또한 두고 두고 회자될 것이다. 다음달 <판타스틱>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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