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책에 대한 소개를 보니 정반대의 내용이다. 한마디로 "늘어가는 석유 소비와 이슬람 지역의 불안으로 인해 석유 위기가 끊임없이 거론되지만, 석유 부족이나 석유 위기는 없다고 말한다."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석유 담론과는 정반대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석유가 부족하지도 않을 거며 위기도 없다는지 궁금해 책 소개를 좀 더 읽어 봤지만, 출판사에서 제공한 보도자료를 편집했을 거라 보이는 책 소개에는 "이 책에는 석유 위기가 오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를, 지금까지의 석유의 역사를 근거로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게 증명하고 있다." 같은 말보다 상세하게 설명한 글은 없다. 다만 내용의 일부를 공개한 '책속에서'에서 "제1차 석듀파동에 이른 연쇄 사건은 석유 부족 때문에 시작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대부분의 전문가가 예측한 전쟁 관련 석유 위기 상황과는 반대로, 그날 원유 가격은 배럴당 30불에서 20불로 곤두박질 쳤다."라는 구절 정도만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오일피크(석유 생산 한계점)이 거론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기는 번번히 늦춰졌다. 그 이유는 자본은 끊임없이 석유를 다른 데서 새로이 생산하기 때문이다. 극지방이나 심해처럼 그동안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던 곳에서 석유를 채굴하거나, 그동안 생산성이 낮아 채굴하지 않았던 모래가 가득 섞인 유전에서 채굴하는 식으로, 자본은 부족한 만큼 석유를 계속 채굴했기에 오일피크는 점점 늦춰졌다. 하지만 그러면서 인간이 손길이 미치지 못해 지켜졌던 곳마저 파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도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이 책은 오일피크가 점점 늦춰지는 것을 두고 이야기를 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책의 내용이 궁금하기도 한데, 책 소개는 앞서 말했듯 현재의 위기감은 조작된 거라 말할 뿐이다. 정작 책을 사든 빌려 보는 직접 읽지 않으면 그 내용은 더 알 길이 없다. 그것을 출판사가 의도한 것인가? 별로 그래 보이진 않는다. 낚시를 하려고 하면 낚시 바늘에 미끼만 잘 끼운다 되는 게 아니다. 밑밥도 두둑이 뿌려야 하는데, 출판사는 내용을 살짝 흘리다 마는 식의 밑밥 뿌리기를 하지 않았다. 고작 하는 것이 주유상품권을 준다는 이벤트뿐. 저자의 위기는 뻥일 뿐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책의 판매량을 좌우하는 고급 비밀이던가? 아니다, 그저 밑밥일 뿐이다. 그거 하나 책 소개로 안다 해도 책 전체를 읽는 것과는 다르다. 한마디로 보도자료를 잘못 만들어 배포했다. 거기에 '당신이 몰랐으면 하는' 식의 현혹하는 문구만 달아 놨다. 이건 형광색 낚시 바늘 정도 된다 싶다. 그러고도 책이 잘 팔리기를 바라면 살짝 도둑놈 심뽀라는 생각도 든다.
북한찬양 분야 불온서적: <북한의 미사일 전략>, <북한의 우리식 문화>, <지상에 숟가락 하나>, <역사는 한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통일 우리 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 <벗>,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대학시절>, <핵과 한반도>
반정부.반미 분야 불온서적: <미군 범죄와 SOFA>, <소금 꽃나무>, <꽃 속에 피가 흐른다>,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우리 역사 이야기>, <나쁜 사마리안인들>, <김남주 평전>, <21세기 철학이야기>, <대한민국사>, <우리들의 하느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不義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의로움이라고 한다. 이러고서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묵자>
언론에서는 안성기와 유덕화 같은 동아시아 각국의 스타가 출연한 것으로 떠들지만, 영화 <묵공>은 적어도
내게는 묵가의 이야기를 담아 뇌리에 각인됐다. 묵가는 묵적이라 하는 장인壯人 출신의 한 제자諸子의 사상을 따르는 무리를 말한다.
흔히 겸애설이라고 하는 사해평등주의, 박애주의, 반전평화주의로 알려진 묵가는 유학이 국학으로 자리 잡히면서 거의 박멸됐지만,
맹자 스스로 "양주와 묵적의 말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라고 한탄했을 정도로 춘추시대 당시에는 주도적인 학풍이 아니었나 싶다.
묵가는 개인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동일하게 여겨야 한다는 다분히 종교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사는 무리로서, 하나의
수도자로서 자신들을 혹독히 수련하고, 또한 조직적으로 그들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긴 무리였다. <묵공>에서 양나라는
조나라가 침략해 오자 묵가에게 원병을 요청한다. 실제로 묵가는 약소국을 대신해 방어전을 펼치며 그들의 겸애설을 실천으로 옮겼던
이들이다. 조금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자연스레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와 켄 로치의 <랜드 앤드
프리덤>에 묘사된 국제여단을 비롯한 스페인전쟁에 참여한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이 떠오른다.
영화가 곧 개봉하면서 슬슬 묵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에 묵가의 책을 읽으려 했더니, 논술문제로 출제되다 보니 대부분 청소년용으로 재단된 책들이다. 훑어 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게 있어 옮겨 본다.
우리는 어떻게 어떤 사람들의 이론이 올바른 대안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가? 반드시 판단기준을
세워야 한다. 판단기준이 없이 주장하는 것은 비유컨대 회전하는 물레 위에서 동쪽과 서쪽의 방향을 정하는 것과 같다. 옳고 그름,
이로움과 해로움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 표준三表’이 있어야 한다.
‘세 가지 표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근본, 증거, 유용성이 있어야 한다. 근본은 어디에서 발견하는가? 저 위의 고대
성왕의 실천에서 발견한다. 그 증거는 어디에서 발견하는가? 저 아래 백성들이 실제로 보고 듣는 것을 살핌으로써 발견한다.
어디에서 그 유용성을 발견하는가? 형벌과 정치에 적용하고, 그것이 국가 백성 인민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살핀다. 이것이 이른바
주장이 가져야 하는 ‘세 가지 표준’이다. - <묵자>
묵가는 중국 고대에서 여느 사상가들과 다르게 합리적인 논증을 중시했다. 모름지기 주장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필요한데, 묵자는 이 판단기준을 세 가지 표준三表, 즉 근본(本), 원인(原), 유용성(用)으로 정리했다. "고대 성왕의
실천"이라는 근본이, "백성들이 실제로 보고 듣는 것"이라는 원인이 반드시 맞다고 보기 힘들며 더욱이 "인민의 이익"이 타국
인민에게도 적용되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근본, 원인, 유용성이라는 삼표는 실제 일국이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데 반드시 요구되는 말 그대로의 표준으로서 판단기준이 아닌가. 겸애설과 함께 이 삼표의 판단기준은 묵가를 좀 더
공부하게끔 이끌어 준다.
대학 4학년 때 뜬금없이 사학과 3학년 전공수업인
한국사회사상사를 들었다. 별로 사학과에서도 인기 없는 과목이었던 듯한데, 난데없이 나타난 경제학과 학생에게 그다지 관심도 무심도
없이 그냥 한 명의 학생으로 대해 줬다. 강사는 꽤나 술을 좋아하던(그래서 숙취로 강의하기를 힘들어했던) 88학번이었는데 대학
시절 배웠던 선생 중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세밀하게 강의했고, 심도 깊게 질문했다. 원고 때문에 율곡을 검색하다 문득
호락논쟁에 대해 텀페이퍼를 썼던 기억이 났다. 내 컴퓨터에는 보존돼 있지 않기에 혹시나 해 그냥 한번 올려 봤던 레포트 사이트를
조회해 보니 남아 있다. 게다가 평가도 괜찮았고 무엇보다 사용료도 지불돼 있었다. 으하하.
이 페이퍼는 기말고사 대체로 제출하도록 한 과제였는데, 수업 중에 호락논쟁이라는 게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남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을 만한 주제였다고 생각해 페이퍼 주제로 선정했다. 막상 쓰는 데는 힘들었는지 안 그랬는지 별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학점은 잘 나온 편이라 비교적 괜찮은 평가를 받은 듯싶다. 하지만 당시는 절대평가와 학점폭격이 이루어지던 거의
마지막 시기였다. 하지만 수업을 두 번 빼먹지 않았으면 더 좋은 학점을 받았으리라. ^^;
사실 이 글은 쓸 때 당시 참고한 자료에 대해 명확히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이리저리 짜깁기해 만든 저작권법에 심히 위배되는 글이다. 게다가 지금 보면 심히 부끄러운 오자가 많지만 개인 자료 보존 차에 기본적인 것은 교정을 보고선 이곳에 그때 페이퍼를 올려 둔다. 이 글을 스크랩해 간 사람이 종종 있는데, 올려놓고선 스크랩해 가지 말라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으면 한다. 애초에 이 블로그의 글은 부분 인용이나 이미지 스크랩 이외에는 퍼 가는 것을 허용치 않기도 하거니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서이다. 이해와 양해를 구한다.
조선 후기 시대적 상황에서 바라본 호락논쟁의 의의
1. 서론
정묘, 병자 양란은 당시 조선 사회에 예전에 없었던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거의 금수만큼이나 천하게 여기었던 오랑캐에게 왕이 친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당했다는 것은, 그간 조선을 개국 이래로 지배해 왔던 기존의 성리학적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삼전도의 치욕 이후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중화의 패자가 되는 상황 속에서 그간 조선을 지탱해 왔던
성리학적 세계관은 그 새로운 상황에 적절하게 재해석되어야 했다. 정치권에서는 북벌론을 통해 상처 입은 자존심의 회복과 중화의
복구를 꾀하려 했지만, 이것이 진정 청을 치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당시에 실추된 조선 왕실과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정치적 의도인지에 대해서는 분분한 가운데, 차츰 이미 천하를 재패한 청을 두고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조선의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학계의 논쟁이 이른바 호락논쟁이다.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어 근 200여 년간 지속된, 게다가 난다
긴다 하는 학자들의 대부분이 한마디 정도 했을 정도로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로 진행된 이런 학계의 논쟁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16세기에 벌어진 이황과 기대승에서 시작되어 퇴계학파 대 율곡학파의 대립으로 치다뤘던 사단칠정 논쟁은 이에 역사적 이유는 더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호락논쟁은 소론과 퇴계학파 계열의 남인 등이 거의 배제되는 속에서 집권붕당이라고 할
수 있는 노론 내에서 율곡학파 안에서 이기에 관한 치열한 논쟁을 걸친 독특한 사례이다.
본 고에서는 湖洛論諍, 특히 人物性同異 논쟁, 未發心體有善惡 논쟁, 聖凡心同異 논쟁을
중심으로 호론과 낙론의 견해를 비교․분석한 후, 노론 이외의 학파에서 이 논쟁과 관련된 견해를 함께 살펴본 후, 이 논쟁이 조선
후기 사회상에 어떤 면에서 부합하고 어떻게 해석했으며, 이후 조선 후기 사회사상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됐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또한 이 논쟁을 살피는 것은 다만 한국 성리학의 이론 세계의 한 특성을 파악하게 되는 의의를 지닐 뿐 아니라 주자 철학의 한
특성까지 파악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호락논쟁의 발발과 배경
1)논쟁의 발발 원인
문제의 발단이 되는 원인은 性에 대한 다의적 해석을 혼용하고 있는 朱子에게서 비롯된다. 주자는 「中庸」의 주석과
「孟子集注」「大學或問」에서 性을 각각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주자철학에서의 性이란 인간 또는 사물 안에 내재된 理를 가리킨다.
性은 구성상으로는 氣 안의 理(氣中之理)인 셈이지만 이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중용의 해석에서는
인간과 사물의 성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맹자집주에 의하면 부여받은 理의 차이에 의하여, 대학혹문에 의하면 기의 차이에
의하여 인간과 사물이 달라진다고 한다. 性이란 理와 氣가 결합되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의 차이에 의하든 기의 차이에
의하든 기와 결합된 理는 다 똑같은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만물 생성의 우주 원리로서 우주 전체를 관통하고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각 개체내의 理인 性도 동일하다. 그러나 각 사물의 특성을 이루고 개체이도록 하는 원리를 성이라고 할 때는 人間과 事物, 事物과
事物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性을 보는 관점에 따라 본원적인 理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개별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문제는 그중 어느 관점을 택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人性과 物性이 같은가 다른가의 보편논쟁에서 동일한 본성을
놓고, 한원진은 다르다고 하고 이간은 같다고 한다.
2)논쟁의 배경
人物性同異의 논쟁은 율곡 이이(1536~1584)에서 우암 송시열(1607~1689)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적통인 수암
권상하(1641~1721)의 문하에서 제기되어 본격화된다. 그의 문하에는 이른바 江門八學士로 불리는 8인의 학자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남당 한원진(1682~1751)과 외암 이간(1677~1727)이 가장 뛰어나 江門爭論의 장본인이
된다.
한원진은 1705년에 지은 <시동지성>에서 인물성론에 관해 이미 상당히 정리된 입장을 밝히고 있고 이간은 1709년 최성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五常과 未發에 관한 논의를 한 바 있다. 즉 1712년에 본격적인 논쟁을 벌이기 이전에 이미 이들은 자기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토론은 외암 이간(1712)이 스승인 수암 권상하에게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의
마음이 純善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는데 처음에 수암은 외암의 설에 수긍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미발 때 선악이 있다고 하는 남당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남당이 찾아와서 자기의 의견을 자세히 설명하자 수암은 이번에는 남당의 설을
인정하였다. 즉 사람이 태어나면서 氣質之性을 가지게 되니 이것은 선악의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발시
항상 악한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되자 수암은 이전의 외암의 설이 옳은 것이 아니고 남당의 설이 옳다고 하면서
율곡의 理通氣局의 해설까지 덧붙여 숙종 38년(1712) 외암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자 외암은 그의 스승 수암
권상하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과 남당의 설에 대해 조목조목 의의를 제기하였고, 이통기국에 대해서도 서로의 의견을 달리하게 되면서
그들의 논쟁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남당은 외암이 스승 권상하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스스로 스승을 대변해서 외암의 설을
반박하게 되었고, 여기에 외암은 직접 남당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의 논쟁은 더욱 가열화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남당도 외암의
설을 직접 반발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들의 이론적 논쟁은 한 개인적 논쟁으로 당대에 끝나지 않았고, 집단적 논쟁의 성격을 띠면서
조선말까지 계속되었다.
외암이나 남당은 모두 수암 권상하의 문하에 있는 사람들로서 기호지방인 충청도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 이후 외암의 논쟁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주로 김창협, 김창흡의 계열을 잇는 김원행, 박윤원, 홍직필의 계열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주로 서울, 경기
지방의 洛下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들을 낙론(洛學派)라하고 반면에 수암과 남당의 이론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병계, 윤봉구, 매봉,
최징후, 봉암등 주로 충청도 근방에 살았기 때문에 호론(湖西學派)이라고도 한다.
3. 호락논쟁의 전개과정
1)人物性同異 논쟁
한원진은 人物性異論을 주장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릇 성을 논하는 이는 모두 기질을 따라서 이름을 붙였다. 性은 理가 氣中에 隨在한 뒤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인성과 물성은 각각
다르다. 만물이 각기 天命의 전체를 갖추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모두 五常의 全德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다. 천명을 超刑器한
것을 말하고, 오상은 기질을 따라 붙인 이름이다. 천명은 太極인데, 태극은 陰陽五行의 理이다. (중략) 오상은 모두 物을 따라서
定體를 갖고 일을 따라서 定名을 갖기 때문이다. (중략) 태극 즉 천명과 오상은 서로 다른 두 理가 아니지만 명목이 다르므로
지적하는 내용도 동일하지 않다. 또 性이 있으면 情이 있고, 體가 있으면 반드시 用이 있다.”
이러한 한원진의 견해는 사실상 “동물도 오상을 갖고 있다”라고 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이는 물성과 인성이 다르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성만이 오상이라고 할 수 있지 物의 성은 오상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에 반해 이간은 인성과 물성이 동일하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요지는 이렇다.
“
이른바 健順五常은 덕은 음양오행의 理이다. 음양오행이 갖추어진 뒤에 조화가 이루어져 만물이 난다. 人과 物이 만나서 이 氣를
고르게 얻었으니 또한 이 理를 고르게 얻었음이 분명하다.... 理는 一原이지만 氣는 고르지 않다. 그러므로 음양오행 중 正通한
것을 얻으면 사람이 되고 偏塞한 것을 얻으면 物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사람이 人理를, 物이 物理를 얻음이 이른바
各得이다.”
이간은 이렇게 한원진의 의견에 반대한다.
이러한 한원진과 이간의 대립은 서로 간에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한, 특히 오상에 대한 개념적인 분석의 차이에서 기인하며, 인과
물의 지위에 대해 논한 것은 아니다. 한원진은 본연지성에서 태극․천명을 오상과 나누어 생각했다. 그는 태극․천명은 형기를
초월한다고 하고, 오상은 단지 본체가 사람의 形氣 중에 수재하여 따로 속성이 된 것이어서, 오상의 완전히 갖추어진 人과 그렇지
못한 物을 다르다고 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이간은 본연은 하나의 보편적인 근원 즉 一原을, 氣質은 異體로 지적하고, 一原으로 볼 때 人과 物은 서로 같으나,
異體로 볼 때는 서로 氣質之性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하였다. 인과 물은 각각 오상의 성을 갖는데, 다만 기질의 차이에 따라서
사람은 순수한 오상을, 物은 잡된 오상을 가진다고 하였다. 이에 인과 물의 형기가 이미 다르므로, 그에 깃든 性도 따라서 같지
않다고 하였다.
2)未發心體純善有善惡 논쟁
人物性同異의 논쟁은 發하기 이전의 심체의 문제로 옮겨져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는 未發한 心體는 純善한 것인지 아니면 선과 악을
모두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 한원진은 心의 작용에 역점을 두면서 미발은 선악의 가능성을 가진다고 보고,
이간은 心의 본체에 역점을 두어 미발을 순수한 理로서의 선이라고 보았다. 이는 양측 간에 미발한 심체 자체에 대한 불일치 때문에
발생하는데, 이간은 미발심체를 오직의 심의 湛然虛明한 것으로만 보고, 한원진은 미발심체를 湛然虛明한 것뿐만 아니라 氣稟不齊의
淸濁美惡까지 내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다시 또 심체를 보는 차이에서 발생하는데, 이간은 그것을 기질이 배제된 순수한
明德이라고 이해하고, 한원진은 명덕과 함께 기질의 차이까지를 내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3)聖凡心同異 논쟁
이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물성동론자들은 未發心體純善을 주장하면서 心의 본체를 明德이라고 보아, 명덕은 인간이면 성인과 범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까닭에 명덕을 지니는 인간의 마음은 한결같이 동일한 것이지, 심체는 기질에 관련하여
해석할 수 없이 항상 선하며, 다만 범인은 그 기질지성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성인과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 동론자들의 주장이다.
이에 반하여 한원진을 중심으로 한 인물성이론자들은 未發心體有善惡을 주장하면서 心이 비록 명덕과 같은 허령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본바탕이 기로 이루어기기 때문에 그 기질이 가진 淸濁秀拔의 차이라 고려하면 선악의 가능성을 함유한다고 생각하여 선악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즉 성인은 淸秀한 기질을 가져 가장 허령한 심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그 마음은 텅 빈 거울과 평형된 저울과
같이 항상 선의 본질을 유지하나, 범인의 심체는 기질이 탁박하여 선행으로 발휘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4)호락논쟁의 종합
人物性同異에서 시작된 호락 각 학파의 논쟁은 未發心體有善惡 논쟁과 聖凡心同異 논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성범심동이
논쟁에서 성인과 범인의 차를 구별할 때, 호론 측은 기질을 먼저 고려하기에 성인과 범인의 구별을 확고히 하였다. 이에 범인도
성인이 될 수는 있으나, 범인은 그 기질이 나쁘기에 성인에 이르기가 힘들다고 보았다.
한편 낙론은 성인이나 범인이나 같은 명덕을 가지기에 그 심체는 동일하나, 기질지성이 다르기에 성인과 범인이 구별된다고 봄으로서,
즉 기질의 고려를 나중에 하기에 범인도 기질을 좋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낙론은 상대적으로 호론에 비해
실천적인 경향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인물성동이에서 호론은 人과 物이 다름을 역설하여, 倫理와 物理가 분리되어야 하며, 윤리를 더욱 중시하는 경향을 지니게
되는데, 이는 퇴계학에 상당히 근접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호론은 율곡학파의 맥을 이으면서 이를 더욱 심화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낙론은 인과 물이 다르지 않음을 주장하기에, 윤리 또한 물리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율곡의 기발일도설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理의 지위를 고양시키는 이른바 친퇴계학적 형태로 나타나는 율곡학의 비판적 계승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4. 조선 후기 사회에서 호락논쟁의 의의
1) 조선 후기 시대 상황과 호락논쟁
서론에서 밝혔다시피 정묘, 병자 양 호란은 조선 후기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고, 이는 그동안 조선을 구성해 오고 운영해 오던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충격으로도 볼 수 있다. 그간 조선은 기자동래 이후 小中華를 자처해오며 오랑캐를 멀리하는 華夷論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양 호란에서 무참히 패배하며, 삼전도에서 인조가 굴욕을 당하는 순간 최고조에 이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벌론의 등장은 당연한 것이었다. 임금이 굴욕을 당한다는 것은 곧 나라가 온 백성이 굴욕을 당한다고 인식되는 상황에서,
그 굴욕을 씻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청의 명을 멸하고 중화의 패자가 되고, 조선의 예상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도 멸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번영해 나가는 과정이 있었다. 즉,중화의 청 저항 세력과 힘을 합쳐 청을 치려던 북벌론은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일이된 것이다. 북벌론이 이렇게 실현 불가능해지자, 북벌론은 애초의 명분론적인 모습보다는 동원 체제 하의 왕실의
실추된 명예의 회복과 내부 단속을 통한 왕권 강화의 실리적인 모습을 띠어갔다.
청이 시간이 갈수록 강성해지고, 북벌론은 실현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청에 대한 시각의 변화, 즉 종래 화이관의 변화 및 새로운
세상을 위한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그동안 조정은 예송논쟁 등을 통한 붕당간의 대립 속에서
각 학파와 그에 따른 정치적, 사상적 견해의 차로 분화되어 가는 시기였다.
이때 등장한 호락논쟁은 人物性同異論과 聖凡心同異論을 통해 청을 중화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논쟁하지는 않았지만,
이 같은 해석을 할 수 있게 하는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즉 호론의 인물성이론과 성범심이론은 인성과 물성은 다르며, 범인이
쉬이 성인이 될 수 없게, 성인과 범인의 차를 엄격히 구별함으로써, 청에 대한 관점을 기존의 화이관에 따라 분명히 하였다. 즉,
기존 주자의 화이관에서 인과 물 사이에 오랑캐가 존재한다는 관점으로 청을 여전히 오랑캐로 보며, 조선은 여전히 화로 보아
북벌론의 정당성과 추진을 역설하였다. 반면에 낙론의 인물성동론과 성범심동론은 인성과 물성을 같게 보고, 범인도 노력하여 기질을
변화함으로써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을 하여, 비록 오랑캐인 청이 명을 치고 중화를 차지하였으나 ,중화의 문화를 받아들여
교화될 경우 중화가 될 수 있음을 보여, 기존의 화이관에 대한 수정을 가능하게 하였다.
2)조선 후기 사상사적 발전과 호락논쟁
호론은 현실적으로 당시 상황에서 당면한 예학적 질서를 재편하는 데 필요한 理氣心性說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특히 그들은 인성의
五常과 물성의 天命은 그 의미에서 차이가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인성의 고유성을 강조하며 그러한 고유성의 구현인 오륜적 질서의
타당성과 그 합리성을 강조하려는 입장의 차이를 보여 주었다. 결국 호론의 주장은 기질의 차이를 신체적인 차이뿐만 아닌 도덕적
의식의 차이로까지 연장해서 파악할 것인가의 문제에 귀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의 전개과정 속에서 율곡학을 더욱 심화시켰으나,
결과적으로는 명분과 윤리를 강조하는 퇴계학에 유사한 관점을 갖게 되었다.
낙론은 그들의 학문적 근원인 율곡학을 전면적이기보다는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어, 퇴계학과 율곡학을 절충하는 모습을
띄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낙론의 일각에서는 이기심성론에 국한되지 않고 名物道修之學이라고 하는 객관세계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이들은 주자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하는 학풍이 태동되게도 하였다.
이런 학풍 속에서 구체적으로 들어난 것이 박지원, 홍대용 등의 북학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만물은 균등하다고 주장하며,
사람의 입장에서만 세계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사물의 입장에서도 사물을 바라보는 객관적, 상대적 관점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과점의
상대화, 객관화는 중세 사회의 계층적 질서를 부정하고 근대적인 사회 질서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중요한 사고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화이론에 기초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세계의 시각에서 재검토하는 사고의 전환을 이루는데 인물성동이
문제의 탐구가 중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3)조선 후기 성리학 발전과 호락논쟁
성리학에서의 성이 동일한 용어임에도 각기 다른 차원에서 개념정의가 가능하다는 것은 주자철학 내의 모순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중시해야 할 것은 이것이 어떤 의미로 말하여지든 간에 단순히 사실적으로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상으로도
고려된다는 것이다. 맹자에 의거한 本然之性이 五常이고 그 五常이 善한 것이라는 점, 즉 善惡의 관점에서 고려된 것임은 분명하다.
다른 한편 本然之性으로서의 太極 역시 ‘天地萬物之理의 總和’라는 사실적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라 ‘天地萬物에 있어서 지극한 善의
표준’이라는 선악적 가치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고려된다. 따라서 애초에 주자가 논한 인물성론의 의의는 인성과 물성의 동이를
깨달아 인간만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人性의 善하고 고귀한 가치를 깨달아 현실에서 도덕적 실천을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성과 물성의 동이를 각각 주장한 외암과 남당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외암에게서는 本然性이 지닌 善의
본래적 절대성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성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남당에게서는 本然性이 지닌 善의 이질적으로
독특한 고귀성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권의를 확립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南塘은 人性이 物性보다 더 귀함을
巍巖에게 역설한 바 있다. 더욱이 두 사람의 이론이 주자 철학이 가지는 모순의 선별적 편향이라는 측면에서 주자 철학의 특성적
발전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인물성동이 논쟁에서도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미발심체의 문제는 그 성이 현실 속에서 발현되기 직전의 모습을 논의한 것이었다. 이는
理와 性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 것이었지만 성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이제는 급박한 조선말기의 현실
속에서 실질적으로 작용하는 심의 근원 문제로 초점이 모아지게 되었다. 그 심의 핵심문제는 明德의 문제였다. 이에 이항로, 이진상
등은 인물성동이 논쟁을 거쳐 明德, 朱理, 朱氣 논쟁, 또는 심설 논쟁이라 불리는 새로운 문제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5. 결론
이상으로 조선 후기 사회에서 중요한 사상적 논쟁이었던 호락논쟁의 배경, 발발 원인,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조선 후기 사회에서의 시대적 상황, 사상사적 의의, 성리학의 발전 과정에서 의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를 정리해 보면 호론은 율곡의 학풍을 더욱 심화하여, 인성과 물성, 성인과 범인은 기질의 차이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에 당시 청의
존재를 여전히 오랑캐로 한정하고 윤리와 도덕적 의식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는 명분론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퇴계 이후 형성된 남인 중 기호 남인 계열의 명분론적 입장과 다를 바 없기도 하다. 즉 가장 율곡적인 호론과 가장 퇴계적인
기호 남인 계열이 다 같이 명분론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인데, 이는 퇴계와 율곡 이전에 주자학의 본질이 이러한 화이론적 명분론과
윤리와 도덕의식의 강조에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낙론은 율곡의 학풍을 퇴계학과의 절충을 통해, 인성과 물성, 성인과 범인은 다르지 않으며, 다만 기질의 차이가 성인과
범인을 판별하기에 범인은 기질의 개선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음을 밝혀, 양 호란 이후 청을 중화로서 인정하고, 청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개편 속에서 보다 능동적이고 탄력적인 대처를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인성과 물성이 다르지 않음 속에서 윤리와
물리가 다르지 않다고 하여, 객관적, 상대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여, 이른바 북학파를 비롯한 실학사상과 연계되었다.
한편 호락논쟁은 정국의 당시 주도 계층이던 노론 내부에서만 발생하였다. 이러한 호락논쟁에 대해 남인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성호 이익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인물성론이 이야기되었고, 이는 다산 정약용에 이르렀다. 퇴계 이후
남인, 특히 성호학파와 정약용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들의 경세치용적인 학문의 추구는 노론과 낙론을 계승하는
북학파와는 다른 또 다른 실학의 계통을 형성하게 된다.
호락논쟁은 단순히 성리학 내에서의 이론 논쟁으로만 한정시켜 볼 수는 없다. 정묘, 병자 양 호란 이후 조선 사회가 입은 충격과 급변하는 세계질서의 변화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자연스런 사상 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갈락티코님의 글 '
가슴 찡한 '심즈' 감동 탄생 비화!!'는 게임 '심즈'의 아이디어를 건축학자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책 <Pattern Languge>에서 얻었다고 쓰였다. 물론 개발 과정에서 게임의 본질을 건축에서 가족으로 바뀌긴 했지만, "건축이 인간의 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256가지의 사례로 설명"했다는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하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재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그래도 인터넷서점 외서 코너에서 검색해 보니 이런 내용이 나온다.
Two hundred and fifty-three archetypal patterns consisting of problem
statements, discussions, illustrations, and solutions provide lay
persons with a framework for engaging in architectural design
이것만으로는 사실 이 책의 내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궁금증은 한층 더 쌓여 간다. 번역까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책 기획해 출간해 보고 싶다. 그런데 아무리 내가 출판사에 일한다 하더라도 영역이 다른지라 이런 책을 낼 수 없어 아쉽다. 게다가 이 책을 내 보라고 꼬드길 사람이 없어 더 아쉽다.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 이 책을 다뤄 보겠지?
사실 전 세계적으로 "6천 3백 장(6,300만 장이겠지...--;)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PC 게임 사상 최고로 많이 팔린 게임"인 '심즈'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책이라 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팔릴 만한 책이 아닐까? 적어도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들부터 관심을 가질 듯.
영양가 없는 회식 때문에 못 들은 강의를 오늘에서야 녹음파일로 듣는데, 통 뭔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동영상이라면 그나마 조금 낫겠지만, 그마저도 실제로 얼굴을 대면하고 강사와 수강생 사이에 밀접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실제 강의보다 훨씬 못하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오프더레코드까지 종종 있는 듯하니 괜시리 궁금증만 불러일으킨다.
오전에 들은 부분은 실제 강의가 아니라 어찌 보면 잡담처럼 들리는 이야기이지만, 몹시 중요한 이야기이다.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골자이니 공부하겠다는 마음 있는 사람에게는 무척 중요한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그 이야기의 골자는 결국 한 놈만 패라는 것. 뭐 학부생 수준에서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그에 대해 서평을 써 보면서 내공을 높인다면, 대학원생 수준에서는 공부하고 싶은 주제 하나를 택해 목 뒤에 빨대를 꼽고 조력자의 도움 아래 한 주제만 들입다 파야 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일 년 동안 몇 번, 몇십 번을 다시 읽어 가며 도통하란다.
말이야 쉽지. 어떻게 한 놈만 팬담. 나처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잡스러운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아직 학부생 수준이라는 생각도 든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생각한 지 4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여태 졸업증명서를 확인해 보지 않았으니 내가 학부(제적)생이 아니라고는 말 못한다. 정말 나는 대학을 졸업한 게 맞나? ^^; 실제로 책이라는 것을 내 스스로 뒤적이고 공부 좀 해 보겠다고 강의 좀 듣는 게 작년 가을부터이니 학부생 수준이라고 보는 게 맞다. 뭐 그렇다면 학부생 수준에 맞게 이것저것 다 섭렵해 보고 서평 써 보면서 내가 공부하고 싶은 주제를 탐색해 나가는 게 지금 내 몫일 게다.
그런데... 조금 비참해진다. 아... 이런 위화감 정말 싫다. --;
이딴 식으로 스스로 한탄하기보다는 일단 계획이나 세워 보자.
2006년 가을학기 학부 입학 기준으로... 2006년 9월-2007년 8월 : 자유교양과정 2007년 9월-2008년 8월 : 자유교양 및 전공예비과정 2008년 9월-2009년 8월 : 전공기초과정 2009년 9월-2010년 8월 : 전공심화과정 & 논문 작성
이 정도로 학부과정을 마치고 그 후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뭐 올 여름이나 겨울에 진학고사(?)를 통해 학부를 4년과정으로 할지 3년과정으로 할지 아니면 학석사 통합과정으로 할지 그때 판별해 보기로 하지. 그럴려면 그때까지 앞으로 무엇을 공부할지 확정을 지어야 할 텐데...
이 글은 ‘역사철학의 이해’ 강좌 7주차 과제로 제출했습니다. 늘 그렇듯 업무시간에 후다닥 쓴 글인지라 엉망입니다. 다음주에는 이 글을 가지고 발표도 해야 한다는데 한숨부터 나오지만, 그만큼 좀 더 보충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뭘 더 보충해야 할까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근대적 산업국가의 시발점
―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
선정 이유
경제적 측면에서 두드러지는 한국현대사의 핵심사건이 무엇인지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1997년 환란위기였다. 그 후 10년이 지났고 한미자유무역협정으로 귀결되는 전사회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97년을 기점으로 했을 때 그 이전이나 이후나 실재했던 (경제)체제나 그것의 수권세력은 큰 변화가 없었다. =>경제체제의 변화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음. (반증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충실한 논거가 필요.) 이는 현재 한국의 정치․경제를 좌우하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올해 치러질 대선에서 현재 가장 유력한 두 후보인 이명박과 박근혜만 봐도 알 수 있다. 박근혜는 두말할 나위 없이 박정희체제의 직계 후계자이며, 이명박은 역시 박정희체제에서 쌓은 성공신화를 기반으로 정치권에 진입한 사례이다. 그런데 박정희체제가 언제부터 시작됐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 1961년 발발한 5.16군사쿠데타를 시점으로 잡겠지만, 여기서는 그 다음해 박정희가 군부 과도정권을 해체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 본격적으로 시행한 첫 사업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시점으로 잡으려 한다.
사건 규정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이전 제1, 2공화국의 외세의 원조로 유명하던 전前산업사회 내지는 산업화의 과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박정희의 군사정권 아래 시행된 정부 주도의 거시적 경제개발 프로젝트이다. 이후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5년마다 반복되면서 한국사회가 근대화, 개발, 수출, 성장 같은 경제적 가치를 중심으로 사회구성원 모두가 국가단위로 총력전을 펼치도록 주도한 개발독재체제의 구체적이면서도 명시적인 ‘플랜’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 성과는 전지구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고도성장과 압축성장이며, 그 실체는 ▲미국과 일본의 외자를 발판으로, ▲정부 주도 아래 계획된, ▲중화학공업과 전자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 위주의 산업화과정이다. 박정희정권 이래 한국은 발전과 성장을 담론으로 하는 정치․사회체제를 수립했다. 문민정권 이후 특히 환란위기를 겪으며 경제정책의 주도권이 정부에서 기업으로 옮겨 가면서 관치경제의 틀은 어느 정도 탈각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정부가 경제정책을 좌지우지 할 수 있으며, 이는 특히 대통령을 위시한 수권세력의 정치적 성향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한 국가의 경제가 세계 경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고려해야 할 것임. (역시 3개 정도의 논거를 제시해 관계를 고찰해야 함.)
사건 개요
1962년부터 66년까지 실행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주요 골자는 당시 가장 시급했던 전력과 석탄 같은 동력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한편, 주요 기간산업을 확충하고 사회간접자본을 충실히 갖춰 경제개발의 토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농업생산력을 확대하여 농업소득을 증대시키며, 수출을 증대를 꾀해 국제수지를 균형화하고 기술을 진흥하는 일 등이었다. 이후 실시된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7∼1971)에서는 식량자급화, 산림녹화, 화학․철강․기계공업 중심의 산업고도화, 7억 달러 수출목표 달성 등에 그 목표를 두었으며, 그 후에도 주로 중화학공업 육성에 주력하며 수출 주도, 중화학공업 주도의 산업화를 꾀했다. 한편 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5차부터 ‘경제사회발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박정희 사후 그 후계자인 전두환, 노태우은 물론 김영삼의 문민정부에서도 반복됐다.
오랜 세월 노고를 거쳐 획득한 비판적 합리주의의 가치, 문헌학적 기초/원칙, 경험적 적확성과 인과성에 대한 신중한 열린 방식 등을 지금 우리가 단순하게 포기하려 한다면, 이는 진정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손실이 될 것이다. 이후에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고통이 따를 것이며, 혹은 (그러한 노력에 따르는 능력이나 의지가 모자랄 경우) 처음에는 호기롭게 시작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혼란만을 초래할 뿐인 야만주의(barbarism)로 귀결하고 말 것이다. - 에른스트 트륄치,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에 대한 서평, <역사잡지> 120호, 요한 호이징하의 <문화사의 과제>에서 재인용.
요즘 들어 역사문제 중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왕을 죽이면서까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한 로마와 프랑스에서 어떻게 왕이나 다름없는, 아니 오히려 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이, 무력이 아닌 대중의 합의 아래 수립됐는지이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로마와 프랑스에서 제정이 수립됐다는 결과에는 어떤 원인이 있을까? 그러한 원인은 어떻게 도출할 수 있을까? 가설로 세운 원인은 어떤 식으로 검증할 수 있을까?
1. 한스-위르겐 괴르츠의 《역사학이란 무엇인가》(뿌리와 이파리) 9장 〈원인과 결과〉에서는 이러한 원인을 분석할 때 기본적으로 전제해야 할 9가지를 제시한다. 이점들을 명심하며 다음의 책들을 하나씩 읽어 나가야 할 듯.
2. 로마와 프랑스에서 일어난 제정 성립이라는 일종의 특수한 상황을 이야기했지만, 이것이 단지 우연적 사건의 일치인지 아니면 역사적 필연성인지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이영호의 《역사, 철학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책세상)가 도움이 될 듯싶다. 특히 2장 〈역사 인식 상의 몇 가지 범주〉에 실린 ‘지속과 변화’ ‘수동성과 능동성’ ‘우연성과 필연성’이라는 테마를 읽어 가며 역사에서 나타나는 우연성과 필연성에 대한 어떻게 먼저 이해를 해야 할지 다잡는 게 좋을 듯하다.
3. 제프 일리와 데이비드 블랙번의 쓴 《독일 역사학의 신화 깨뜨리기》(푸른역사) 2부 〈도대체 무엇이 없었다는 말인가〉는 나치의 등장 같은 독일현대사의 쟁점들에 대해 독일만의 특수한 상황이었다는 데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책이다. 거꾸로 말하면 역사에서 드러나는 사건들이 일반적인 것인지 특수한 것인지에 대해 묻고 있지 않나 싶다.
4. 존 루이스 개디스의 《역사의 풍경 - 역사가는 과거를 어떻게 그리는가》(에코리브르)는 카오스이론 같은 복잡성이론을 통해 원인과 결과에 대한 절대성을 비판한다. 여기에 덧붙여 “역사는 설명하지 않으며 방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라고 말하는 폴 벤느의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새물결는 어떨까? 2부 〈이해〉에는 ‘줄거리를 이해하기’ ‘이론·유형·개념’ ‘인과성과 소급추정’ 같은 테마가 실려 있다. 특히 ‘인과성과 소급추정’에서는 앞서 언급한 비과학적․비계량적인 역사학방법론 입장에서 인과성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 펼칠지 궁금하다.
5. 마지막으로 실제 제정 성립의 과정을 다룬 톰 홀랜드의 《공화국의 몰락》(웅진닷컴)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5~7권(한길사) 같은 제정이 성립되어 가는 과정을 기술한 책을 읽으며 앞서 언급된 우연성과 필연성, 일반성과 특수성, 절대성과 상대성 등을 염두에 두면서 차근차근 읽으면 어떨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과제는 이렇게 냈는데... 인터넷서점에서 역사학일반 분야를 주루룩 훑으며 기본설명과 목차만 가지고 정리한 거라 좋은 책인지는커녕 적당한 책인지조차 모른다. 쩝... 이 엉성함에 결국 말만 늘이고 말았다. 그냥 목록만 적어 놓을 걸 그랬나? 했다는 것에 만족을? 그러기엔 다음주가 너무 두렵다.
물론 나는 철학이 슬픔의 의미와 가치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활동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시인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더면, 나는 80년 광주에서 마지막으로 도청을 지키다 죽어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마당극으로, 탈춤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음악가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것을 소재로 오페라를 작곡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화가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것을 벽화로 그렸을 것이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철학이란 너무도 열등하다. 스스로를 형성하는 예술의 광채에 비하면 게으르게 생각하는 철학은 그저 그것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행히도 시인도 음악가도 화가도 아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생각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들의 수난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는 것, 슬픔의 존재이유를 묻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던 것이다. - <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김상봉, 한길사) 서문에서 옮김
출근길에 책장을 보다가 문뜩 이 책이 눈에 띄어 일단 가방 속에 집어 넣고 지하철에서 펴들었다. 서문인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잠시 눈길이 멈추었다. 이 대목의 앞부분에서 김상봉은 이렇게 말한다.
형이상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의 근거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모두 80년 광주에 빚진 사람이다. 우리의 삶은 그때 거기서 죽어 간 사람들의 흘린 피 값으로 대신 사 준 것이다. 하기야 우리가 빚진 것이 어디 80년 광주뿐이겠는가? 멀리는 전봉준에게서부터 가까이는 전태일까지 자유를 향한 고통스런 장정에 자기를 바쳤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 상동
내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하는 것. 김상봉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철학하는 자신이 가장 먼저 의미와 가치를 성찰해야 하는 대상인 게다.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고작 할 수 있었던 생각하는 것을 택했다는 김상봉은 이런 이유로 세상에 산재한 슬픔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철학은 단 한 번도 시대를 앞서가지 못하고 언제나 시대의 흔적을 뒤치닥거리 했을 뿐이라고 한다. 사실 앞서가면 그것은 예언이며, 현실을 기록하면 문학일 게다. 훗날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묻는 것,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것, 그것이 철학이 할 일일 게다. 저 구절을 읽으며 새삼 철학의 의미를 깨달았다.
책의 서문을 읽으며 이토록 짠한 느낌을 받은 책은 처음이다. 진작에 펴 읽지 않았던 게 아쉬울 정도로. 그런데... 생각하는 것조차 못하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심스레 반성해 본다.
한 사회에서 생산양식을 형성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밝힘으로써사회구조의 형태와 그 사회를 지배하는 계급을 알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노동을 통해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집단과 이를 전유하는 집단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계급과 전유계급이 서구사회사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며, 어떤 관계를 맺고, 시대와 사회가 바뀌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동시에 서구사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시민’이라는 용어가 사회계급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이는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다수 대중을 뜻하는 ‘시민’이라는 개념의 변천사를 통해 이들이 사회구조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고대 그리스사회, 특히 아테네에서 시민은 노예와 비교되는 ‘자유민’을 의미했다. 전적으로 노예들이 노동하면서 사회 유지에 필요한 부를 생산했고, 시민으로서 자유민은 민회에 참여하고 추첨으로 직위를 맡아 국정을 담당했으며 전쟁시에는 보병으로서 국방을 담당했다. 당시 시민은 사회 전체적으로 소수에 불과했으나 노예계급이 노동으로 생산한 부를 전유할 수 있어 굳이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자유민인 시민 사이에서도 부의 소유 정도에 따라 점차 차별이 생겨 났고, 이는 솔론의 금권정치 개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배경이 됐다. 이들은 차츰 귀족, 엘리트의 효율적인 국정운영을 정당화하며 사회지배계급을 형성해 갔다.
로마사회에서도 시민은 역시 자유민이었으나 동시에 자영농인 ‘평민’이었고, 귀족인 원로원 세력이 사회를 지배했다. 물론 노예계급은 여전히 존속하며 노동을 했으나, 시민들 역시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노동을 해야 했고 또한 국가의 요구에 따라 병역의무도 이행했다. 스스로의 신분적 한계를 거부하지 못했던 노예와 달리, 자유민이었던 평민들은 스스로 노동하며 병역까지 담당했기에 점차 시민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거세게 요구했다. 결국 평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호민관이 등장하면서 평민들은 국정에도 참여할 수 있었고, 또한 병역과 노동을 통해 사회를 움직여 갔다. 노예들도 그리스와 달리 종종 해방되며 시민으로 편입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포에니전쟁을 비롯한 정복전쟁으로 인해 대량의 노예가 로마에 유입되면서 노예노동에 기반한 대농장인 라티푼디움이 생겨났다. 주로 원로원 세력이 농장주인 라티푼디움이 점차 커져 가자 경쟁에서 밀린 소규모 자영농인 평민은 몰락했고,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직업군인이 되거나 대농장의 소작농인 콜로누스로 편입됐다. 이런 체제를 콜로나투스라 하며 이들 콜로누스는 사유재산을 소유하고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자유민이되 농지를 떠날 수 없는 예속된 존재로, 중세시대 등장하는 농노의 기원이 됐다.
중세사회에서 자유로운 시민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와 로마와 달리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은 소수였으며, 대다수는 영주가 소유한 농지에 예속된 존재로 이들은 국정에 참여할 근거로 가능성도 없는 농노였다. 로마시대 콜로누스에서 기원한 농노는 농지에 얽매인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영주의 세속권력과 교회의 신성권력이라는 이중 지배계급 아래 그들의 농지에서 충실히 신의 자녀로서 충실히 노동에 종사하는 신민臣民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농노는 노동을 통해 부를 생산했고, 영주와 성직자는 전쟁과 기도라는 각각의 소임을 수행하며 부를 전유했다. 하지만 점차 왕과 교황으로 대표되는 영주와 성직자들은 수도원의 토지 소유 등을 두고 대립했으며, 이는 종교개혁에서 공식화됐다. 부의 축적을 종교적으로 엄금했던 가톨릭교회와 달리 프로테스턴트들은 부의 축적을 신의 은총으로 여기며 정당화했고, 이는 점차 사회 전체적으로 부의 축적을 가속화시켰다. 잇따른 전쟁과 신대륙의 발견 속에서 더욱더 가속화된 부의 축적은 자유롭게 고용하고 노동시킬 수 있는 노동력 확보를 위해 농노들을 토지로부터 분리시켰고, 갈 곳을 잃은 농노들은 도시로 유입돼 무산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가 됐다.
근대사회에서 시민은 성 안의 사람들을 뜻하는 부르주아계급이었다. 이들은 토지로부터 분리돼 도시로 편입돼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아무런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와 달리 주로 상공업과 전문직에 종사하며 자본을 소유한 신흥계층이었으며, 전통적인 지배계급인 지주계층과도 달랐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를 자신들의 자본이 투여된 공장에서 일하게 하며 부를 창출했고 전유했다. 부르주아계급은 부의 축적을 방해하는 지주계급에 기반한 왕과 귀족, 성직자 같은 일련의 구체제에 대해 프롤레타리아계급과 함께 저항했다. 혁명을 통해 구체제의 신분제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된 프롤레타리아는 정치적으로 부르주아와 동등한 시민이 됐으나, 여전히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했기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여전히 부를 창출할 뿐 전유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존재였다. 반대로 부르주아계급은 이전보다 더욱 자유롭게 창출된 부를 전유할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시민은 본디 국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 계층을 말하는데 이들의 위상은 시대마다 달랐다. 그리스사회와 근대사회에서처럼 부를 전유하기도 하는 반면, 로마사회에서처럼 전유의 여부가 모호하기도 했으며, 중세사회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도 있었다. 이처럼 시대마다 달랐던 이유는 생산양식의 근간인 생산수단을 시민이 소유했는지, 그리고 노동으로 창출된 부를 전유할 수 있는지 여부에 근거한다.
얼마 전 블로그에 ‘호모아날리티쿠스Homo analyticus’, 즉 ‘분석하는 인간’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이 말은 내가 뭐든지 혹은 누구든지 매번 분석하려 든다는 주위 사람들의 관찰을 토대로 내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 본, 즉 나를 정의하는 개념이다. 내게 ‘왜?’라는 질문은 중요하다. 사건의 인과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설사 그것이 불확정성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에 따라 사람, 사건, 사물, 사상 등을 알려 노력하는 ‘분석하는 사람’인, 내게 이 ‘왜?’라는 질문은 지적활동의 알파이자 그것으로부터 무언가 결과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오메가이기까지 하다. 나는 이 ‘왜?’라는 질문을 통해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한다.
이런 내게 정보의 습득은 몹시 중요하다. 이때 정보는 아마 분석의 도구이자 틀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량의 정보를 습득해 왔다. 그것이 책이든, 대화이든, 인터넷 검색이든 간에 나는 다양한 방법으로 지금 이 순간도 정보를 습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아는 것만 많은 ‘잡학다식雜學多識’이라고 하지 현명하거나 깊이가 있는 ‘박학다식博學多識’이라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여러 방면에 걸쳐 체계가 서지 않은 잡다한 지식이나 학문”라는 ‘잡학’의 정의에서 드러난다. 즉 내가 습득하는 지식은 깊이가 얇고 체계가 서 있지 않다는 게다. ‘잡스럽다’는 말이 그리 유쾌하지 않게 들리는 사회통념에 비춰 볼 때 나는 주위 사람들의 이런 평가가 그리 반갑지는 않다. 결국 나는 변화의 욕구를 느낀다.
어떻게 하면 ‘잡학’이 ‘박학’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이 점에서 내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습득하는 무수한 정보를 적어도 습득한 이후에는 나름 체계를 세워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단순히 여기에 그친다면 그것은 그저 체계화가 잘 된 지식의 총합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지식 내면에 자리 잡은 근본 원리라든지 그것들의 연관관계를 좀 더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야 ‘잡학’의 단계를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여기서 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박학’으로 보인다고 해서 다는 아닐 게다. 하지만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는 부단한 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한 발자국 더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노둣돌이 되리라 생각한다.
A :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라본 자연은 근본적으로 살아 있는 어떤 것으로서 존재하는 우주로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만물을 말한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 즉 운동에는 본질 자체가 변하는 본질적 변환Substantial Change과 본질은 변화하지 않고 표피나 현상만 변화하는 우연적 변환Accidental Change가 있다고 말했다.이런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계절의 변화도 하나의 운동이다.
반면 데카르트가 바라본 우주, 즉 자연의 변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운동 중 우연적 변환만이 이루어지는, 위치만 이동하거나 양이 변하는, 지금으로 보면 물리학적인 변화만을 말한다. 그렇기에 데카르트에게 자연은 총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가 아닌 기계적인 운동/변화만 일어나는 공간이다.
G선생은 스터디를 "좌장에 대한 절대 복종과 무한 성실을 맹세하고 그 실천을 수시로 점검받아야만 참여할 수 있는, 신체 단련을 겸한 학적 행위"라며 단호하게 정의내렸다. 무엇 좀 공부해 보겠다고 몇 사람 모여 책 한 권 끼적끼적 읽어 봤자 It seems to be...를 남발하기 십상이라 투여하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얻는 소득이 별로 없기에, 좌장의 카리스마 있는 영도 아래 뇌가 근육질로 가득찰 정도로 빡새게 공부해야 애초에 스터디를 통해 각자 공부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일 거다.
허 나 내가 사실상 좌장 역할을 맡고 있는 경제학 스터디 모임은 그렇지 못했다. 경제학사를 기반으로 하면서 주요 사상가의 원전을 함께 읽어 가기로 했던 스터디 모임은 반 년 조금 넘는 동안 툭 하면 바쁘다 해서 미루고, 아프다 해서 빼먹고, 어렵다 해 넘어가고를 반복하면서 실제로 내용도 It seems to be...를 남발했다. 그것도 격주마다 하기로 했던 초심은 어느덧 봄바람에 실려 가고 3-4주에 한 번 하기도 하고 통째로 한 달을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해 반 년 동안 겨우 얻은 성과는 <국부론>의 1, 2권을 읽으며 고전학파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시원을 대충 정리해 보는 데 그쳤다.
이래 선 안 된다 싶어 좌장으로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기 위해 내가 꺼내든 특단의 수단은 고전학파 경제학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이다. 네 명의 모임원이 각자 고전학파 경제학과 관련해 주제를 설정하고 이에 대해 간단한 페이퍼를 쓰고 이를 발표하는 것. 실제 학부 전공과정에서는 일상적인 것이지만 그냥 대학 졸업하고 경제학 좀 공부하려 하는 비전공자들에게 이것은 약간은 가혹한 일. 그래서 여지없이 튀어나오는 반발의 목소리. 하지만 나는 이쯤에서 그동안 공부한 내용 좀 정리해 보자는 마음에서, 그리고 이것을 발판 삼아 향후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야기되는 뇌의 근육질화에 대해 미리 대비하자며 세미나를 강요했다. 결국 모임원들은 마지못해 좌장에게 절대복종 하기로. 다만 무한성실 할지는 모르겠다.
다음 모임에서 각자 준비할 세미나 주제를 발표해야 하는데, 아직 나부터도 주제를 잡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 경제학-철학 수고 강의 때 읽어 가야 할 텍스트를 읽으며 뭔 말인지 헤매는 통에 학부 때 너무 놀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마당 - 수업시간에 아무래도 내가 타겟이 될 터인데 이러다 공만 떨구는 조재진 꼴이 될 듯 - 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그리고 보니 함께 읽어 가던 백승욱의 <자본주의 역사강의>도 읽다 멈춘 지도 꽤 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에어컨 바람 쐬면서 공부하는 게 가장 보람차게 여름을 보내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