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아내인 ALLURE님과 블로그에서 논쟁을 벌였다. 찰리 채플린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유일한 경쟁자인 버스터 키튼을 거론한 게라면 죄지만, 채플린에 우호적인 편인 나와 달리 아내는 키튼빠인지라 내가 특별히 키튼을 폄하한 것도 아닌데도 시비를 걸어온 감이 없지 않다. 그런데 막상 논쟁을 벌이다 보니 새삼 옛 기억이 떠오른다. ^^;

2년 전 3월 중순, 지금의 아내에게 막 일주일 전에 꼬여 내어 대시하고선 슬슬 수작을 걸던 와중의 일요일 오후. 안경을 새로 맞추러 홍대쪽으로 나간 김에 또 다시 수작을 걸어 볼까 했지만 아직은 모호한 관계인지라 전화는 그렇고 문자를 날렸다.

"오늘 버스터 키튼 어때요?"

아내의 블로그에서 버스터 키튼으로 흥분했던 글을 본지라 괜찮은 미끼다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키튼빠가 된 애당초 ALLURE님은 그날도 키튼의 영화를 보러 가려고 마음먹었던지라 미끼에 덥썩 물렸다. 문제는 낚시꾼. 고기가 미끼를 물면 한 번에 낚아채던가 아니면 힘싸움을 하며 고기의 진을 한것 빼논 상태에서 촥 낚아채야 하는데 한마디로 미적미적 거렸다. 뭐 내가 선수도 아니고.

문자로만 주고받던 상황에서 언제 어디서 보자고 구체적으로 약속을 잡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변명하자면 문자메시지를 이용한 의사소통을 너무 나이브하게 해 온 내 패착이었다. 한 시간가량 미적거렸더니 ALLURE님은 다른 사람과 약속을 먼저 잡아 버렸다. 김이 팍 새긴 했지만 키튼의 영화가 궁금했던지라 약속과 상관없이 영화를 보러 갔다. 혹시라도 만나면 또 수작을 걸어 보면 되니까.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를 패러디한 <세 가지 시대>를 보면서 키튼의 영화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재미있구나 싶어서 다음 영화인 <항해자>까지 보기로 마음먹고 표를 끊었다. 다음 영화가 상영되기 전 휴식 시간에 로비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예상과 달리 ALLURE님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커다란 키가 왜 안 보인담 하고 투덜거리면서 자리를 찾아 앉으려는데 내 뒷자리에 앉아 있던 이는

바로 ALLURE님이었다. 하핫.

운명이니 뭐니 하는 지리한, 하지만 감격스러운 각종 수식어가 순식간에 다 스쳐 갔다. 매표소의 자리 배정 방식은 잘 모르지만, 의도하지 않고 이렇게 앞뒤로 좌석이 잡힐 확률은 얼마나 될까? 적어도 생판 모르던 두 남녀가 만나 결혼하는 확률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무튼 당황반 환호반의 마음과 표정을 순식간에 다잡고선 살짝 무게를 잡고선 속으로 '아싸'를 남발했다.영화가 끝나고 사정을 들으니 먼저 영화를 함께 봤던 이는 먼저 가 버려 이번 영화는 혼자 본 것이라 한다. 옆자리였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싶지만 그것은 욕심이 과한 것이고...

막상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영화가 어찌나 재미있던지 뒷자리에 앉은 ALLURE님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영화에 집중. 그래도 뒷자리에서 스며나오는 웃음소리 정도는 캐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막상 영화가 끝나고나선 정확히 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밥 먹고 술 또는 차 한 잔 하면서 키튼과 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겠지. 아무튼 처음부터 약속 잡고 영화 2편을 내리 함께 봤으면 더 좋았으련만 멍청하게도 명확하게 약속을 잡지 않는 바람에 데이트가 아니었던 데이트는 그저 반쪽으로 끝나 버렸다.

시간이 지나 정식으로 사귀고 나니 그때의 내 실수를 걸고 넘어진다. 물론 아예 혹평. 졸지에 믿지 못할 남자의 대열에 섰는데 이게 처음이 아니란다. 일주일 동안 두 번의 실수를 더 저질렀다고 한다. 3월 중순 하면 떠오르는... 맞다. 화이트데이다. 내 딴에는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내가 관심 있다고 대시한 마당에 화이트데이를 챙기는 것은 성급하다, 내가 관찰해 온 ALLURE님은 상업 지향적인 화이트데이 따위에는 관심이 없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상대방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어찌됐는 내가 마음이 있다면 챙겼어야 했단다. 그리고 챙기는 거 싫어하는 여자 없다는... 아뿔사. 가뜩이나 좋게 보여도 시원찮을 판에 상을 뒤엎었군 싶었다. 그런데 세 가지 실수라 제목을 달았다시피 한 가지 실수가 더 있었다.

대시한 다음날, 저녁이 되자 또 꼬여 내 수작을 걸라고 했는데 ALLURE님은 급히 사야 할 책이 있다고 광화문에 가야 한다고 한다. 그때에는 광화문에 직장이 있었는데 연락을 주고받을 때에는 이미 퇴근해 집에 들어와 있던 상황. 광화문에 함께 가자고 하는 ALLURE님의 문자에 대한 나만의 걸작 답변.

"지금 막 광화문에서 퇴근한 사람에겐 너무 가혹한데요."

지금 생각해도 미쳤지 싶다. 전날 대시에 대한 대답으로 뭔소리인지 모를 딴소리를 들었던 마당에 환심을 사기는커녕 왕비호 되기 딱 좋은 망언을 저리 하다니. 물론 술 마시지 않는 한 퇴근 후에 회사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거 직장인으로서 참 할 짓 못 되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 멀지도 않은데 좀 가 주면 안 되나? 지금도 드는 이 생각이 그때에는 왜 안 났을까?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 어찌어찌 해서 밤 늦게 만나 바에서 맥주 한 잔 마시며 조금 점수를 땄다 하지만 이미 상당히 점수를 까먹은 상태에서 만회해 봤자 본전도 안 되었을 것이다.

여튼 딱 7일 종안 내가 저지른 세 가지 실수는 결혼하기 전까지 두고 두고 아내가 나를 갈구는 수단이 되었다. 결혼하고선 안 갈구냐고? 그것은 아니다. 또 다른 실수에 앞의 실수들이 묻혔을 뿐. 실수야 어찌 됐든 거듭된 수작질과 낚시질에 우리 둘은 사귀는 지경이 되었고, 길지 않은 연애 끝에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실수가 비단 저 세 가지뿐이야겠냐만 지금에서 저 사건들은 실수이기 이전에 하나의 매듭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두 사람을 엮는 매듭 말이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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