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된 지 오래된, 그런데 최근에 재쇄를 찍은 책의 경우 읽다 보면 낯선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대부분 타이포의 문제인데 컴퓨터에 만들어진 서체가 아닌 예전 활판에서 찍어 나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책을 손가락 끝으로 만져 보면 활판 인쇄 특유의 요철감은 없이 밋밋하다. 따라서 활판 인쇄에 대한 향수에 왜 그런 요철감이 없냐고 출판사에 항의 전화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고 한다.

현재 출판단지에 있는 활판 공방을 제외하곤 국내에서 활판 인쇄하는 곳은 없다. 즉 요철감을 느끼는 인쇄는 그러한 느낌을 구현할 수 있는 인쇄기를 사용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며, 그런 인쇄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왜 그런 활판 인쇄 느낌의 타이포로 인쇄되었냐 하면, 옛날 책을 촬영해 새로 인쇄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쿽익스프레스이든 인디자인이든 컴퓨터로 책을 조판하기 전에는 전산조판이라는 입력기를 쓰던 때도 있었고, 아예 활판 인쇄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때의 자료는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호환이 되지 않는다. 즉 예전 책을 다시 찍으려면 직원이든 알바이든 책의 텍스트를 타이핑한 뒤 북디자이너가 새로 레이아웃을 잡은 뒤에 조판해야 한다. 즉 오래된 책 새로 만드려면 생고생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옛날 책을 촬영하거나 스캔해 디지털 파일을 만들고 이것을 바탕으로 정해진 판형에 그냥 앉히는 작업을 거쳐 책을 인쇄한다. 따라서 예전의 타이포가 느껴지는데 요철감은 없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 경우 오타 수정이 곤란하다. 최대한 예전 타이포의 느낌을 살리는 서체를 고르고 장평과 자간도 그에 맞게 조절해 수정자를 만들고 그것을 사진이나 필름에 덧붙여야 한다. 이거 역시 생고생이다. 따라서 생산자의 윤리 따위는 눈 찔금 감고 독자의 원성 따위는 휴지통에 구겨 넣고 그냥 배째라 인쇄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표지 정도만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 개정판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조금 양심적이면 판형이라도 교체하는데, 이 경우 여백의 미를 좀 더 살리거나 사진을 약간 확대하면 된다. 뭐 양심적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외려 더 사기치는 느낌이 든다.

범우사에서 나온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011년 개정판. 판형은 조금 커졌는데 쪽수는 93년 초판과 일치한다. 여태까지 말한 것에 의해 새로 인쇄된 것으로 보인다. 도서관 관계자에게는 새로 교정 봤다고 하는데... 글쎄... 과연 그 생고생을 했을까? 뭐 품절된 채로 있는 것보단 그래도 이게 낫다. 이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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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웬만한 신간을 주문해 받아 보면 띠지부터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띠지는 참 난감한 책의 요소이다. 좁은 책장에 박박 구겨 넣을 때 띠지는 여지없이 걸림돌이 된다. 게다가 화려한 디자인보다는 타이포그라피 위주의 미니멀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관계로 띠지는 피부에 얹은 딱지 같은 존재로 여기진다. 그렇다고 무작정 버리지 않고 고이 접어서 책 뒤쪽 날개에 넣어 둔다. 이럴 때 서경식 선생의 <고뇌의 원근법>처럼 커다란 띠지는 처치하는 게 심히 곤란하다.

예전에는 띠지를 무조건 싫어했는데 점차 띠지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한다. 임지호 씨의 말처럼 출판사의 주요한 홍보 수단이기도 하지만, 점차 띠지 자체가 디자인의 한 요소이기 때문에 북디자인이라는 통일적 시각에서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서구처럼 홍보 문구를 아예 표지에 넣어 버리는 것보다는 제거할 수 있는 띠지에 넣는 게 나 같은 독자 입장에서는 차라리 낫다.

물론 과다한, 무성의한, 선정적인 문구에는 눈쌀이 찌뿌려지지만 책 전체의 디자인상 부적절하다 생각하면 그냥 버리면 된다. 하지만 띠지를 잘 활용한 북디자인도 얼마든지 많다. 연휴 기간 책 정리하면서 그러한 것들을 살펴봐야겠다. 흠. 아내 책 정리와 시디 정리부터 해야겠군. 뭐 언젠가는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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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예수전 - 10점
김규항 지음/돌베개
대학에서 일반 교양으로 들었던 '서양사의 이해' 과목의 기말고사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예수의 죽음을 (신학적, 종교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사회적인 이유를 들어 논하라."

칠판에 적힌 문제를 확인하자마자 속으로 '아싸라비야'를 외쳤다. 그리고 그야말로 일필휘지(日筆揮之)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답안지 앞뒷면을 빼곡히 채워 가며 답을 썼다. 총 소요 시간은 약 20분. 다 쓰고 나서는 점검해 보고 그럴 일은 없었기에 바로 답안지를 제출하고 퇴실했다. 속했던 동아리가 해방신학의 영향 아래 예수 복음을 하나의 운동으로써 삶과 사회에서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동아리이다 보니, 그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은 입회한 이후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공부하고 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하의 악필을 자인하는 나로서는 100명이 넘게 듣는 교양 수업에서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듯하다. 점수는 생각보다 안 좋았다. 결석으로 까먹은 점수도 좀 있었지만.

김규항의 <예수전>은 그런 동아리 생활을 했던 나로서는 아주 식상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는 2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율법 지상의 유대교 사회를 밑바닥부터 뒤흔들었고, 그 때문에 당대 기득권 세력의 견제를 받아 그야말로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돼 죽었다는 것. 김규항은 이런 예수라는 한 사내의 삶, 언행, 죽음 따위를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그의 본 모습을 전(傳)한다. <예수전>에 드러나는 예수의 대척점은 교리의 대상이 되면서 우리에게선 죽어 버린 신이다. 그 신은 부자들의 신이며, 율법의 신이며, 타협의 신이며, 피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신이다. 하지만 김규항은 가난한 이들의 신이며, 율법을 깨 버리는 신이며, 불의에는 비타협적으로 맞서는 신이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에 현재했던 신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또한 예수는 신 이전에 한 인간이라 말한다.

이렇듯 <예수전>에 나타나는 주요 내용은 해방신학 관련 책 좀 읽어 봤거나 하다못해 이현주 목사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 같은 책을 한 번이라도 읽어 본 사람에게는 아주 식상하겠지만, 반대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되뇌이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도구로 여기는 대다수의 기독교인에게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게다. 하지만 무엇이 2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참 모습일까?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예수에 대한 신앙 또한 그렇게 믿을 게다.

김규항은 이런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대본으로 마르코 복음을 골랐다. 4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였기에 종교적 첨가가 가장 적어 예수의 본 모습을 좀 더 전하는 복음서, 마르코 복음 말이다. 거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저본으로는 가톨릭에서 나온 <200주년 신약성서>를 썼다. 이 번역본에서 예수는 반말을 하지 않는다. 반말도 존댓말도 없던 언어로 말했던 예수의 이야기를 존댓말과 반말의 구분이 엄격한 한국 사회에서 올곧게 전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개신교회에서 강변하는 유일신을 강조하는 '하나님'이 아닌 보편자의 모습을 한층 더 살리는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즉 어떻게 하면 2천년 동안 오해로 가득 찬 예수의 본 모습을 제대로 까발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는 말이다. 평소 김규항의 언행에 학을 띈 나로서도 그의 선택에는 십분 공감한다. 그가 전하는 예수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로 공감한다. 문제는 기득권화한 교회와 불화한 채 살다 보니 예수의 복음을 점차 잊고 살아가는 내 모습일 게다.

이 책에서 또 한 가지 발견한 것은 북디자이너인 안상수 선생의 몇 가지 디자인 시도이다. 파란색 합지 양장 커버에 안상수체로 제목 '예수전'을 뚫은 노란색 커버의 조화는 책의 만듦새에 관심이 생긴 내게는 재미있는 시도였다. 또한 본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끝맞춤 정렬이 아닌 왼쪽 정렬로 일관해 텍스트의 흐름을 변화를 준 시도 또한 생각해 보게 하는 시도였다. 물론 그것이 가독성을 더 떯어트릴 수 있다. 하지만 당대의 율법에 맞섰던 예수를 생각하면 양끝 맞춤의 틀에 사로잡힌 우리네 시각에 변화를 주는 그러한 시도는 유의미한 것이다.
http://camelian.tistory.com2009-05-13T11:25:13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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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 특별판 - 전10권 - 8점
김만중 외 지음/민음사

올초에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200권 돌파 기념으로 10종 특별판을 내놓았다. 인터넷서점에서 제공하는 이미지를 보자니 들쭉날쭉한 판형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끄럼틀 지붕 박스, 그리고 책을 고른 기준의 모호함 따위의 이유로 '얼씨구 씨잘데기 없는 데 돈 썼네'라고 넘어갔다. 그리고 후배가 그것을 살까 말까 물어봤을 때 이 같은 이유로 분명 후회할 거라 했다.

어제 민음사 대표인 장은수 씨의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저 특별판의 아주 일부만 흘겨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강의의 핵심은 책의 정의, 그리고 물성(物性)이었는데, 강사는 그러한 정의와 물성을 파괴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 특별판은 그러한 실험의 일환이라는 거다.

박스 세트라는 상품이 가져다주는 고정관념은 일단 들쭉날쭉한 판형에서 파괴된다. 컬렉터가 아무리 꽂아 두는 것을 좋아한다 해도 쫙 '가오'가 난다 해도 시리즈가 똑같은 판형으로 일률적으로 꽂아 두는 것은 인류가 수백 년째 고수해 오고 있는 '지난' 시대의 방식이다. 물론 나는 가오를 중시하기는 하지만, 발상이라는 것은 전환해 봐야 하는 거고 고정관념은 깨 봐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이 밖에도 이 시리즈는 온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서모컬러 잉크를 사용한다든지, 잉크가 번지지 않는 초고가 용지를 쓴다든지, 고전의 전형적인 텍스트 배치 방식을 바꾼다든지, 자수 기법을 도입해 수제작 장정을 하는 등 다채로운 디자인 방식을 도입했단다. 자세한 것은 민음사에서 제공하는 동영상을 보면 된다.

동영상 내려받기(마우스 오른쪽 버튼 눌러 '링크를 다른 이름으로 저장' 누르기)

대체로 이 특별판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나처럼 들쭉날쭉한 판형부터 문제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싼 가격에 낱권 판매를 안 한다는 사람에 심지어 책에 쓸데없는 인테리어질한다는 사람도 있다. 책의 선정 기준이나 여전한 오탈자 문제야 출판사를 탓할 만하다. 하지만 책이 이러한 꼴로 나오게 된 맥락을 이해하지 않은 채 그저 돈질한다고 하는 비판은 당최 이 특별판, 나아가 이 출판사의 실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정관념의 틀에 갇힌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아주 당연하게도 이 책은 일반 대중을 위한 책이 아니다. 북리펀드로 책을 되파는 사람이나 도서관에서만 빌려 읽는 사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책을 소장할 만한 자산으로 보고, 수집 가치가 있다 싶으면 과감히 투자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물론 척박한 한국의 출판 시장에 이러한 자는 아주 극소수이다. 하지만 애당초 2000세트 한정판이라 한 것은 그런 사람의 수가 아무리 많게 잡아도 2000명을 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특별판 발행을 최종 결재한 사람의 말을 들어서인지 모르지만 이 책에 대한 호감이 높아졌다. 모든 컨텐츠가 디지털로 전환할 것을 강요받는 이 시기에, 오로지 책만이 가지는 여전한 가치를 지키고 높이는 이 시도의 결과는 앞서 말한 대중의 불평과 출판사의 적자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실험이라는 점에서는 이것은 분명 자산이 될 것이다. 적어도 한국 땅에 이렇게 북디자인을 놓고 적극적으로 실험한 예는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칭찬은 했는데... 저 시리즈를 살 요량은 없다. 값도 비싸고 둘 데도 없고 문학에도 별 흥미가 없다. 산다 해도 다른 책 살 돈 2달치를 떼려 박아야 하는데 그러기도 쉽지 않다. 다음주에 구경이나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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