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원주민 - 10점
최규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만화, 삶의 단면을 잘라 내 보이다
 
만화가 최규석과 요새 철학사 수업을 함께 듣는데(물론 그와 통성명한 적 없이 그런 사람과 함께 수업을 듣는다는 것을 아는 정도이다), 수업 중 일생 중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경험을 말해 보라는 선생의 말에 최규석은 집 위에 집이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선 정말 충격받았다고 했다. 그가 충격받은 건 강남의 타워팰리스도 신도시의 15층 고층 아파트도 아닌 지방 소도시의 2층 건물이었다. 그는 평야라는 걸 보지 못해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지지리도 가난한 산골 출신에다 형제 많은 집의 막내라는 겹겹의 산에 둘러싸인 그로서는 당연한 충격이었을 게다.
한겨레21에 연재된 만화를 엮은 <대한민국 원주민>에 내비친 최규석과 그의 가족의 삶을 보면, 최규석과 나의 나이 차는 고작 한 살 차이임에도 똑같은 시대를 살아온 나와 그가 살아온 궤적의 간극은 태평양까지는 아니어도 동해 바다 정도 되어 보인다. 나 또한 지방 도시 변두리에서 살면서 용돈 한번 받아 본 적 없고 내 방 한번 가져 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규석이 보낸 어린 시절은 70-80년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50-60년대 한국사회의 풍경과 비슷할 정도로 나와 달랐다.
물론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가난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못하더라도 궁상스런 삶의 흔적은 언제나 기억 속에 도사리고 있다. 당시 우리네 삶은 서울-지방 도시-시골이라는 3단계의 분명한 위계제에 얽매여 있었다. 그나마 나는 최규석보다 한 단계 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거꾸로 내 위에는 서울 사람들이 있었다. 중3 때 세운상가에 컴퓨터를 사러 왔을 때 서울역에서 지하철 패스를 뽑지 않고 지하철을 탔다가 종로3가역에서 망신당했던 기억만 떠올려도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서울과 지방의 경계는 좀 더 명확해진다. 그리고 도시와 시골의 경계 또한 명확해진다.

최규석이 <~원주민>에서 그려 낸 그의 어린 시절의 키워드는 단연코 '가난'이다. <~원주민> 말미에도 실린 시네21 인터뷰 기사에서 시네21의 김혜리 편집위원은 최규석을 이야기하면서 "가난에 익숙하지만 궁상맞진 않다"라고 단언했지만, <습지생태보고서>에서 최규석이 자신을 모델링한 최군을 두고 "3대를 이어온 가난 때문에 온몸에 궁상이 배어 있다"라고 설명했을 정도로 만화 안에서 인물들이 일상적인 생활 모습을 보면 궁상이라는 말 외에는 별 다른 대체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는 비록 매사에 궁상을 떨지언정, 이따금 가난한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낄지언정, 가난을 현대인이 가져서는 안 될 절대악으로 치부하는 성장 만능 사회가 강요하는 일반적인 관념 따위는 무시하고 가난이라는 소재를 정면 돌파한다.
그렇기에 <~보고서>나 <~원주민>에서 그는 가난 때문에 기죽거나 굽신거렸던 모습을 그릴지라도, 그 모습은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링 안의 클린치에 불과하다. 외려 그는 우리네 정서를 작극해 가슴 한 켠을 뭉클하게 만드는 스트레이트 펀치를 수시로 날려 대고, 이따금 한 회의 말미에서는 피식 웃게 만드는 데 그쳐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결정적 어퍼컷을 아주 효율적으로 구사한다. 즉 그는 전형적인 인파이터 복서라 할 수 있다. 궁핍했던 자신의 가족사를 수치심으로 덮어 버리지 않고, 이를 잘라 내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으로 읽어 내는 그의 스토리텔링은 어줍잖은 웹투니스트의 명랑 컨셉과는 애당초 다른 길을 걷도록 했다.

사실 그가 이름을 알린 건 <아기공룡 둘리>를 패러디해 현대 산업사회와 마이너포비아 성향을 고발한 <공룡 둘리>였다. 80년대 군부 독재 시기 어른에게 반말하고 어른의 권위에 대들려고 공룡의 탈을 써야만 했던 아이가 성장했을 때 겪어야만 했던 처절한 삶을 최규석은 무자비할 정도로 어둡게 그렸지만, 그것은 IMF 금융 위기를 겪었던 우리네 소시민들의 일상이었으며, '습지'에서 서식해야 했던 그가 겪은 이 사회의 아주 거친 단면이었다. 가난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아는 그로서는 위선적인 착하고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는 대신 최대한 벼랑 끝으로 캐릭터를 잔인할 정도로 몰아붙인다. 덕분에 사람로부터 찬사를 얻는 동시에 그는 불안한 시선도 함께 받는다. 예켠대 <고래가 그랬어>에서 화화(畵禍) 사건을 일으켰던 <불행한 소년>에서 최규석은 발행인 김규항의 변을 인용하면 "무작정 운명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든가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고 내세에만 관심을 갖게 한다든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저항을 폭력이라 몰아붙인다거나 하면서 힘센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가짜 천사"를 소년이 죽임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는 순응의 허황된 이미지에 속지 말 것을 강변했다.
최규석의 그림 속에서 이렇듯 드러나는 인파이터 기질은 우리의 미시적 삶에 천착하면서 삶의 단면을 뭉텅 잘라내 버린다. 물론 그의 방식은 만화의 익숙한 관습을 차용하거나 화사한 기교를 쓰기보다는 다소 투박한 선과 퍽퍽한 색채를 주로 쓴다. <~원주민>에 실린 그림을 보면 색감은 음습하거나 어둡다. 펜터치도 사실적인 듯하면서 구체적인 디테일을 살리지 않고 어느 순간 뭉개 버린다. 말하자면 예리한 횟칼보다는 묵직한 고기 써는 칼로 내리쳐 살덩이를 부러트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가 써는 칼질은 아프다. 그만큼 그의 만화는 우리를 아프게 한다. 하지만 삶은 고통의 씨앗으로부터 자라는 나무이다. 그래서일까? 최규석의 만화는 우리에게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며, 우리의 삶을 가장 절실하게 드러내 보인다. 단지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다는 측면에서 리얼리스트가 아니라 삶의 진정한 모습을 그대로 그려 낸다는 점에서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실된 리얼리스트라 할 수 있다.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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