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에게 '신'이라든지 '선'이나 '정의'라든지 하는 추상적 개념을 가르치기란 쉽지 않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재간도 없거니와 어른 또한 그것을 정확히 언어로 표현하기란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기껏 하는 일이란 '믿으라' 내지는 '그런 게 있어' 정도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구드룬 파우제방의 소설 <하느님, 한 번 더 기회를 드릴게요!>는 한 아이의 하루 일상을 따라가며 질문을 던지고 동시에 답을 내리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아홉 살 니나는 하굣길에 차에 치어 죽어가는 고양이를 목격한다. 목숨이 아홉 개라는 시쳇말처럼 고양이는 바로 죽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게다가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는 새끼 고양이는 어미의 사정도 모르고 배 고프다 칭얼거린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아홉살 소녀는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느님, 너무 해요! 누가 하느님한테 기도를 하거나 뭘 빌어도 하느님은 신경도 안 쓰시죠?"
니나가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고양이가 누구한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왜 고양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해요? 하느님은 선하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아요! 거지 같은 하느님이라고요!"
...
"하느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더 드릴게요. 제발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세요."
...
이제 더는 못 참아요.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시라고 했죠? 지금부터 저는 하느님을 안 믿을 거예요!"
독 실한 기독교 신자라면 펄쩍 뛸 불경(?)스러운 말이 소녀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아이가 이제껏 알아 온 또한 믿어 온 '하느님'은 공정하고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하느님'은 어미 고양이를 살려달라는 니나의 요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어른이라면 말로는 반응을 요구할지라도 실제로는 그것이 실현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니나는 이제 아홉 살 어린이일 뿐이다. 어른들이 이제껏 설명해 온 자비로운 하느님을 믿어 왔으나, 니나는 이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즉 불신의 순간에 처했다.
의심은 자신을 괴롭게 한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이 정작 현실에서는 일그러지는 건 더더욱 괴롭다. 지진과 태풍으로 아무런 잘못 없는 이들이 죽어가는 현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보다 부덕하게 사는 사람들이 더 잘사는 현실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이든 그저 보편적인 세계이든 이것이 옳냐고 항변한다. 어른도 이럴지언대 아이라고 못할까? 외려 아이들은 더더욱 큰 혼란에 처하기 마련이다. 니나는 혼돈의 상태에서 신을 의심하고 절망하고 부정한다.

2.
새끼 고양이를 돌보겠다고 어미 고양이에게 약속한 니나는 어미 고양이가 끝내 죽자 집으로 돌아가나 어머니는 냉혹하게 고양이가 싫다 하신다.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니나는 집을 나가 무작정 폴란드로 향한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선하기는 하지만 니나를 이해 못하는 할머니, 니나를 이용해 도둑질을 하는 소년, 노래를 잘하는 걸인 할아버지, 니나를 유괴하려는 남자, 자기 잘못을 애써 외면하려는 이기적인 할아버지등 니나가 만나는 숱한 사람들은 의심과 혼돈에 둘러쌓인 니나에게 아무런 답도 내려주지 못하고 외려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가진 것 없는 가출 소녀 니나는 춥고 배고프다. 새끼 고양이 아하에게 먹일 우유를 달라 하는 니나에게 어른들은 처음에는 불쌍해하는 듯 대하지만, 니나와 아하에게 본질적으로는 관심이 없다. 그저 니나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어른의 입장에서 가출한 아이를 훈계할 뿐이다. 오히려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정치적 망명해 온 물루네만이 그나마 니나를 도와주고, 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것을을 설명해 주지만, 그네들은 독일 땅에서는 낯선 이방인이라 섣불리 니나를 대하다 추방당할 것을 걱정한다. 니나를 도와줄 사람, 정확히 어른은 아무도 없다. 니나는 춥고 어두운 길거리를 헤매며 불안과 의혹의 하루를 보낸다.
3.
니나가 마지막으로 만난 이는 아하의 어머 고양이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니나가 믿는) 돼지신을 그린 거리의 화가. "착한 일을 하면 상을 주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주고, 모든 사람들을 친절하게 보살펴 주고,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는" 산타클로스처럼 우리네 의식 속에서 박제화된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이 아닌 진짜 신, 인간신을 그려 달라는 니나에게 거리의 화가는 신의 존재 유무와 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신과 정의의 관계, 그리고 지금 니나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준 사건인 어미 고양이의 죽음을 니나 스스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대화로써 일러준다.
"어미 고양이가 혹은 사람이 자식만 남겨 두고 갑자기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고 치자. 이건 정의랑은 관계가 없어. 그런 일이 있으면 인간은 절망에 빠져서 왜 이런 일이 생겼을가,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묻곤 하지. 인간은 그 까닭을 모르고 누가 설명해 주지도 않아. 우리 인간은 신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없으니까. 우린 상황을 바꿀 수 없고 그저 이런 사실을 견디는 수밖에 없어."
자못 신과 정의의 관계를 허무적이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듯하지만, 거리의 화가는 밤하늘을 빛내는 별을 바라보며 니나에게 좀 더 너른 시선으로 우주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우리도 지금 저런 별에 앉아 있는 거야. 그것도 아주 아주 작은 별에. 말하자면 저기 있는 저 은하수 가운데 하나에.”
스프레이 화가가 안개처럼 보이는 별무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렇게 앉아 있는 동안 우리는 이 별을 타고 다른 별들 둘레를 도는 거지. 다른 별들은 또 다른 별 둘레를 돌고. 상상해 봐!”
니나는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중략)
“그래. 어지러울 수도 있어. 그래서 이 우주에 있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신이 만든 모든 것 가운데 인간이 가장 위대하다고 믿는 걸 거야.”
“우린 작은 먼지 알갱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말이에요.”
“하지만 거대한 설계도 속에 들어가 있는 존재지. 그러니까 꼭 있어야 하는 존재라고.”
(중략)
" 네가 잘 못 지내고, 추위에 떨고, 스스로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너를 좋아해 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 너는 한가운데에 있는 점이 돼. (중략) 그럼 넌 이 점이 되어 중심의 둘레를, 말하자면 신의 둘레를 돌게 되지."
"신이 한가운데에 있는 점이라고요?"
니나가 생각에 잠겨서 물었다.
"중심점이지. 그게 아니면 뭐겠니?"
스프레이 화가는 말했다.
"아하는 어디에 있어요?"
"내가 너를 아주 크게 그렸기 때문에 아하도 네 점에 들어갈 수 있어. 너희 엄마는 물론이고 네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도 다 들어갈 수 있어."
(중략)
" 넌 돼지신을 알아봤잖아. 그걸 알아본 사람은 너뿐이야. 그렇게 영리한 사람이라면 인간이 신을 인간과 다른 모습으로 상상할 수 없다는 것쯤은 이해하고도 남을 텐데. 말하자면 인간의 얼굴과 인간의 성품을 지닌 신을 상상하는 거지. 우리가 신이어야만 신을 정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러니까 정말 신다운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는 거야."
4.
동화는 어른들의 세계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어른들의 세계를 보자. 세상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픔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하지만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순간 그것은 남의 일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르면 몰랐지, 아픔과 슬픔을 아는 순간 함께 괴로워한다. 그리고 묻는다.
"왜 그(들)는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요?"
설명해 주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어른조차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된 인간 근원의 질문이다. 저자는 신의 존재, 정의, 약속과 책임, 생명 같은 다소 난해한 철학적 주제에 대해 아홉살 니나의 시선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니나가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대답으로써 차근차근 답을 내려 간다. 다소 숱한 등장인물들이 말한 것에 비하면 거리의 화가가 너무 많은 것을 한번에 말하는 느낌을 주긴 하지만, 저자는 도그마적인 '하느님'을 설명하는 데로부터 벗어나 인간 스스로가 신과 소통하면서 인간의 본질적인 의문을 스스로 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괴테가 말했듯 신을 통해 세상을 내면에서 결속시킬 수 있다.
니나처럼 아홉 살배기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그리 쉽지 않게 이야기하지만, 또한 그 아이 입장에서는 니나의 질문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을 내렸는지는 다소 의심이 가긴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빤한 정답을 내려주기보다는 니나의 여정을 독자가 함께 따라가며 자기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만들어 가는 데 있다. 사실 철학에는 애당초 정답이 없다. 사실 답이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저 철학에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며 서로 생각을 나누는 일련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이 스스로 "내가 만일 니나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이라는 가정을 제시하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답을 내리도록 이끄는, 이 책은 섣불리 철학적 주제에 섣부른 어른의 대답을 주입하기보다는 아이 스스로 답해 나가도록 일러주는 일종의 나침반 같은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동화'가 아닐까?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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