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 8점
이택광 지음/아트북스 
그림을 읽는다는 것은 시대를 읽는 것이다

1.
많은 이들에게 그림은 '보는 것'이겠지만, 그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면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는 것'으로 대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림을 단순히 보지 않고 읽어야 한다. '그림을 읽는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그림이라는 하나의 텍스트, 즉 원전 속에 파묻혀 있는 콘텍스트, 즉 맥락을 파악한다는 말이다.
본디 '맥락'은 "사물 따위가 서로 이어져 있는 관계나 연관"을 뜻하는데, 대체로 시대적 배경, 사상적 조류, 창작자(군)의 의도와 심리상태 같은 다양한 무형의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림을 읽으려면 그림을 둘러싼 혹은 그림 안에 담겨 있는 여러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그림을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수동적 행위가 아닌 그림을 세상의 움직임과 연계시켜 그 속에서 그림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 파악하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행위이다.

2.
근대 미술 사조 중에서 '인상파'라는 말을 처음으로 등장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끌로드 모네의 <인상-해돋이>를 보자. 붉은 해가 뜨는 새벽녘의 바닷가 풍경을 캔버스에 유채 물감으로 흐릿하게 칠해 그린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해돋이 때 화가가 느낀 인상, 즉 사물과 빛의 색감을 화가 스스로 받아들인 감흥을 그림으로 옮긴 것인데,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의 저자 이택광은 이 그림은 노동 혹은 노동자의 삶을 그렸다고 단언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림의 왼쪽 상단부의 흐릿하게 그려진 푸릇푸릇하게 삐죽 솟은 형상은 부둣가의 크레인이라 말한다. 저자가 말하기 전에는 그것이 크레인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실 그것이 크레인이 아니라 부둣가에 정박한 배의 돛이라 해도 상관없다. 또한 화가인 모네 스스로 노동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정말로 부둣가에서 맞은 해돋이의 인상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림이라는 텍스트에 한정해 그림을 보면 누구나 능히 해 볼 만한 감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택광은 모네가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 모네가 미술계 안에서 취했던 행동과 가졌던 사상 같은 일련의 맥락을 파악할 것을 주문한다.
한창 인상파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19세기 말은 격동의 시기였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등이 폭풍우처럼 밀고 지나간 시기 정치사상은 물론 미술사조에 이르기까지 백화쟁명의 시기였고, 인상파는 그중 하나의 흐름이었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뭉뚱그려서 편의상 인상주의자들 또는 인상파라 불려서 그렇지, 인상파 화가들을 하나로 묶을 도리는 없"는지도 모른다. 인상파 안에는 노동자들의 자치정부 파리코뮨을 찬양한 좌파에서부터 파리코뮨의 가담자들을 80년 광주의 시민들처럼 밀어 버린 공화 정부를 지지하는 우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런데 끌로드 모네는 이들 중에서 좌파 내지는 중간 즈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였던 만큼 아무리 자연을 주로 그린 화가라 해도 그의 그림 속에는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면서 '세계'를 만들어 가는 노동자의 애환이 담겨 있다는 뜻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3.
물론 모네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오바'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근대 시기 그림 속에 담긴 맥락을 파악하는, 즉 그림을 읽는 행위를 설명하는 하나의 실례일 뿐이다. 자, 이 책의 표지에 쓰인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그린 <유럽의 다리>를 보자. 저자는 멀리서 솟아오르는 수증기, 다리 바깥을 바라보는 행인의 시선, 길을 걷는 두 남녀의 행색, 그리고 하다못해 강아지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 보면서 익숙해 보이는 그림을 해석하며, 아울러 이 그림이 지닌 맥락을 이야기한다.
결론은 근대의 산물 중 하나인 기차의 등장이다. 익히 알려졌듯 기차는 근대를 상징하는 지표이다. 당시 그 어떤 교통/운송수단보다 빨리 가면서 공간은 물론 시간을 압축해 버린 기차는 속도와 생산성 지향의 근대성을 무엇보다 대변하는 핵심 지표이다. 그런 기차를 구경하는 평범한 파리 시민의 모습을 그림에 담으면서 카유보트는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인 소비 지향의 중산계급의 도래를 이야기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우리가 보기에 화가는 일상적인 풍경을 본 대로 그렸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당시의 세계를 오늘에 투영하며 그 세계를 읽어야 한다. 저자는 카유보트는 과학에 근거한 세계관을 가진 이로 평가한다. 당시 인상파를 위시한 화가들에게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은 중세기 종말로 설명됐던 유토피아를 자신들이 사는 현재를 좀 더 풍요롭고 다채롭게 변화시키는 하나의 지향점으로 여겼다고 한다. 따라서 그림 속의 기차를 구경하는 파리 시민은 새로운 변화를 눈으로 구경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하는 만인 중 일인이라는 말이다.

4.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을 보면 이러한 인상파들이 근대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또 알 수 있다. 파리 근교의 한적한 지역인 아르장튀유를 그린 여러 그림을 보면 배경인 물빛은 쪽빛이다. 이는 파리 코뮨 이후 도심 재정비 때문에 근교로 쫓겨난 염색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의 색깔이다. 아르장튀유는 이런 염색공장의 집결지였고 그 일대 강물은 폐수로 오염됐으며 하늘로는 매연이 뿜어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에 개의치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보트놀이를 즐긴다. 마네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저자는 "마네에게 아르장퇴유는 여가를 즐기기 위한 곳이며 동시에 근대의 산업화가 자연을 침범해 오는 모순의 공간"이라 말한다. 마네는 강이 더럽고 냄새날지언정 놀이를 즐겨야 하는 근대인을 그려 낸 것이라 말한다. 이는 매음녀의 누드와 흑인 하녀를 도발적으로 그려 낸 <올랭피아>처럼 지금 화가가 처한 시대의 모습을 금기를 넘어 현상 그 자체를 사실적으로 그려 낸 행위라는 것이다. <폴리베르제르의 주점>이나 <풀밭 위의 점심>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같은 인상파라 불리었던 모네는 똑같은 아르장튀유의 풍경을 그리면서 마네와 반대로 공장의 매연이나 폐수로 오염된 강물을 제거한 채 근대의 산업화가 가져다준 풍경을 그의 그림에서 지워 버린다. 왜 그랬을까?
저자는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을 빌려 "모네는 마네보다 더 강렬한 '유토피아 충동'을 갖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자연과 대립되는 것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완전히 소거해 버림으로써, 그 경험 자체를 아예 그림의 제작 과정에서 분리"해 회화에 대한 인습과 규정을 부정하고, 기법과 전통을 분리함으로써 실험과 혁신에 대한 '자의식'을 색채에 기탁해 표현했다고 한다. 마네와 모네의 이런 대립된 화풍은 예술가가 현실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고 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마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파리의 중간계급은 모순된 현실을 폐수 위에서 보트놀이를 함으로써 모르쇠하며 현실을 냉담하게 외면한다. 반면 모네는 아예 현실의 모순을 그림 속에서 드러내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풍경, 허구적인 자연 풍경으로 바꿔치기 했다. 이는 열정적 공화주의 지지자의 대열에 서 있기도 한 모네의 모순적인 저항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마땅히 현실의 모순을 사실 그대로 하다못해 에둘러서라도 담아야 한다는 기존의 관습을 거부한 예술가였다. 그와 반대로 노동계급의 삶과 근대의 파괴적 풍경을 정면으로 그려 낸 마네는 노동의 상품이 돼 버린 현실을 그대로 그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상품'을 그려 낸 이로 평가된다.

5.
우리는 이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읽으면서' 그들의 삶과 그림 속에 투영된 근대의 모습, 그리고 근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읽을 수 있다. 단순히 그림을 미적 측면에 한정돼 '본다'면 화가의 사상과 시대적 배경 등까지 알아야 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미술을 좋아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따라서 평범한 시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시대를 읽어야 한다. 과거를 들여다봄으로써 현실을 읽고 나아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해야 할 과제이다. 물론 이는 먹고살기에 바쁜 세상에 밥 먹고 할 짓 없어 궤변을 늘어놓는 행위로 치부된 지 오래됐다. 하지만 밥만 먹고 사는 삶, 그것이 아름다운가? 소수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것도 사전에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는) 미술관에 고가의 그림을 걸어놓고 잰 체 하는 것보다는 인터넷에 굴러다니는 조막만한 사이즈의 디지털 코드로 된 그림을 '읽음'으로써 자신을 넘어 인류가 닥칠 미래를 조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예술을 사랑하는 행위가 아닐까?


잡설
글에 거론된 그림의 이미지를 찾아 붙일까 하다가 너무 '구차나' 포기했다. 언젠가는 할지도 모르나 그럴 확률은 테제가 밤에 한 번도 안 깰 확률과 비슷하다. 또한 이 책은 인상파 이외에 라파엘전파를 아울러 다루나 그들을 다룬 부분은 솔직히 잘 이해가 안 간다. 물론 인상파 부분이 다 이해 가는 것도 아니지만, 인상파는 그동안 들은 게 쬐금이나마 있어 선무당이 돼 작두 타 봤다. 그다지 책 읽을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 처했다가 마침 울산에 결혼식이 있어 장거리 여행을 하는 바람에 책 한 권 읽을 시간, 그리고 팀장이 외근이라 마음놓고 블로그질할 시간이 있어 리뷰를 간만에 써 봤다. 이런 게 낙이라면 낙인 게다.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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