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t it RockPaint it Rock - 10점
남무성 지음/고려원북스

만화가 최훈이 더위를 먹었는지 7월과 8월에 걸쳐 매달 'GM'을 무려 2회나 연재했다. 그동안 '월간 GM'이라는 별명처럼 매달 1회, 심지어 달을 며칠 넘겨서 연재하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더위 먹었나 의심이 든다. 월간 체제가 된 지 거의 일 년이 넘어가니 나 또한 무덤덤해졌는데, 그래도 '삼국전투기'에 대한 연재 복귀 지연은 늘 아쉬었다. 그러던 찰나에 최훈이 또 뭔가 일을 벌인다는 소문을 접하고 말았다. 최훈의 새로운 연재물은 민음사 웹사이트에서 연재되는 '록커두들'. 록의 역사를 최훈식 어법으로 풀어간다는 것인데, 기대하는 것 이상의 아쉬움이 몰려온다. 'GM'도 '삼국전투기'도 엉망인 마당에 새로운 연재물이라니. 도대체 최훈은 얼마나 많은 욕을 더 먹어야 두 작품을 끝낼 수 있을까? ^^:

프롤로그를 제외하고 이제 9편 연재된 '록커두들'은 아무래도 얼마 전 단행본으로 나온 남무성의
<Paint It Rock>과 비교되기 마련이다. 다른 데도 아닌 민음사라는 출판사의 웹사이트에서 연재된다는 것은 단행본 출간을 염두에 둔 것이다. '록의 역사'라는 매혹적인 주제에, 최훈의 말빨과 패러디의 결합은 제법 괜찮은 구색을 갖춘 듯하다. 문제는 최훈이 록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록에 정통한 사람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역사를 논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다. 록의 역사를 서술한다 것은 자칫하면 뮤지션에 대한 가십 거리를 주절주절 늘어놓기 십상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뮤지션, 장르, 레코드사 같은 일련의 요소가 시대적 사회적 배경 안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상호 파악해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일관된 서술로 풀어가야 한다. 거기에 대해서는 최훈이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제 시작인 만큼 기대해 볼 만하지만 그가 블로그에서 하는 이야기만 볼 때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9편의 만화를 볼 때 아직은 단편적인 일화 심지어 가십거리에 다소 쏠리는 감이 있다.

그에 비해서 이미 1권이 출간된 남무성이 쓴 <Paint I Rock>은 록의 탄생부터 성장까지 아주 충실하게 록의 역사를 설명한 작품이다. 만화치고는 다소 재미없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지만, 만화는 여러번 이야기했듯 텍스트를 풀어가는 여러 방식 중 가장 파급력이 좋은, 유력한 접근 방식일 뿐이다. 특히 최훈도 초창기에 접근했다시피 록, 정확히는 록큰롤의 태동에 대한 필연적인 사회적 맥락을 상세히 이야기한다. 멜팅폿이라는 말처럼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이는 미국 땅에서 흑인들의 토속적인 블루스라는 종자가 전후 호황기와 베이비붐 세대라는 토양에서 변칙적으로 피어난 식물마냥 록이 생성되었다는 서술은 아주 보편적이지만, 그만의 독특한 만화적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앞서 재미없다고 했지만 그거야 웹툰의 서술 방식에 익숙해져서 느끼는 단편적인 감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악동 롤링스톤즈를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센타까서 돈 나오면 십 원에 한 대씩"이라고, 기타의 디스토션은 무조건 "좌우지 장지지" 하는 식으로 작자 마음대로 지껄이는 것은 지역적 해석이 주는 최대한의 창작성을 잘 이용했다 싶다. 게다가 송대관이나 장기하, 김병만 같은 한국 인물이나 백초토론, 분장실의 강선생님 같은 개그 소재를 슬쩍 밀어 넣는 패러디는 만화에 적절한 양념을 쳐 준다.

처음에는 <MM Jazz>의 발행인이자 재즈 만화인 <Jazz It Up>을 쓴 알아주는 재즈 매니아인지라 록을 얼마나 제대로 이야기할까 조금 노파심이 보였지만, 그 역시 재즈로 선회하기 전까지는 이른바 열혈 록키드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프로그레시브락에 심취했다고 한다. 허기사 사실 재즈나 록이나 결과적으로는 한 뿌리에서 태어난 사촌지간 아닌가? 무릇 한 분야의 전문가는 그 우물뿐만 아니라 다른 우물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진정한 전문가가 아니던가. 사실 록이라는 음악 자체가 태생은 블루스이지만, 컨트리, 포크, 재즈, 레게, 클래식, 아방가르드, 민속음악 같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음악을 잡아 삼키며 꾸준히 진화해 온 '괴물'이 아니던가. 아 책은 록이라는 이름의 괴물의 역사를 나름 잘 절묘하게 이쁘게 색칠했다 싶다. 다만 14쪽에 걸쳐 수 명의 추천사를 쓸데없이 받는다거나 명백한 인쇄 오류에 대해 하나 책임지지 않는 출판사 고려원북스의 심뽀는 참 고약하다 싶다. 그래도 곧 나온다는 2권이 기다려지고 작가의 전작
<Jazz It Up>이 땡기는 것을 보니 아이러니하다.

2009년 9월 2주 TTB리뷰 당선작
http://camelian.tistory.com2009-09-03T05:30:29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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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거대한 전환 - 10점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길

홍기빈이 한겨레에 연재되는 '고전 다시 읽기'에서 자신이 지금 <거대한 전환>을 번역한다고 광고한 게 한 3년 전쯤인가? 그때 몹시 열받았다. 몇주 전에 8천 원짜리 박현수의 구 번역본을 무려 2만 원 주고 헌책으로 구입했기 때문이다. 대우학술총서로 민음사에서 나온 <거대한 전환>의 구 번역본은 헌책방 계에서 그동안 레어템으로 통하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운 좋게 구입했다 했는데, 새 번역본이 나온다니... 으하하하. 물론 박현수 본은 번역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아 예전에 읽을 때 좀 고생한지라 새 번역은 기대할 만했다. 게다가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폴라니 전공자인 홍기빈이 한다니. 하지만 해가 지나도 번역본은 나오지 않았다. 홍기빈은 공부하는 사람치곤 딴따라 기질이 얼굴을 물론 글에도 쓰인 사람인지라 그러려니 했다. 사실 이 칼 폴라니의 역작은 쉬이 변역할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어설프게 나올 바에야 제대로 하는 게 훨 낫지 않겠는가? 그러다 작년에 참여사회연구소를 끼고 홍기빈이 번역본을 가지고 세미나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는 나오겠지 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역시 그 해에 출간되지 못하고 올해 여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왔다. 책을 구입하기 전에 본사에 들렀다가 마침 계간지 편집팀에 있길래 잠깐 훑어봤는데 역시 기대할 만했다.

무려 657쪽이나 되는 홍기빈의 새 번역본은 차례만 훑어봐도 우선 풍성해 보였다.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발문이 14쪽, 프레드 블록의 해제가 29쪽, 루이 뒤몽의 프랑스어판 서문 26쪽, 그리고 옮긴이 해제가 30쪽. 이러한 부록(여기에 구 번역본에도 있는 로버트 매키버의 발문 6쪽 포함)을 빼도 500쪽이 넘는데, 계간지 편집자는 박현수 본이 완역본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글쎄, 지인을 통해 캐나다에서 구매한 영어본(보스턴 Beacon Press)은 문고판에 대략 300쪽 정도였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쪽수가 늘어나는 것(구 번역본은 381쪽)과 과거의 빡빡한 조판을 고려할 때 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차례 대조만 해 봐서는 누락된 부분은 없어 보인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 보면 그 말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있을 듯.

대학 때 경제사회학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교수가 복사해 준 영어본 의 일부를 저본 삼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참고해 가며 떠듬떠듬 읽으면서 칼 폴라니에게 매료됐다. 그때 이후로 칼 폴라니에 대해 쭉 관심을 가져왔지만, 한국 땅에서 칼 폴라니는 좀체 인기가 없었다. 그의 책은 모두 절판. 나도 사회학과에서 경제사회학 수업을 듣기 전에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 당시 학과 교수들에게 물어봐도 거의 대부분이 그의 이름을 모를 것을 확신할 정도로 그는 경제학계에서 그야말로 '듣보잡'이었다.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우꼴들에게 사탄의 배후로 낙인찍힌 칼 마르크스가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 그러다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식자층에서 칼 폴라니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단체로 약 먹었나 싶을 정도로 이전에 비해서는 꽤 많이 언급됐다. 그런데 이제는 새 번역본까지 나온다니. 상전벽해요, 격세지감이다. 나야 돈 삼만여 원이 더들긴 하지만 그 정도는 투자할 만한 게 바로 칼 폴라니의 역작 <거대한 전환>이다.

책 내용 자체에 대한 리뷰는 내가 논술 교재(?)용으로
예전에 썼던 글인 '시장의 신화를 벗겨 내다'로 대신해도 될 듯하여 여기서는 구 번역본과 새 번역본을 비교삼아 좀 끼적거리려 한다. 일단 두툼해진 두께와 함께 신 번역본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표지에 쓰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이다. 이제껏 블레이크를 시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림까지 그렸다니. 헛, 천재일세. 그런데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을 표지에 썼다는 것은 이 책을 아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움을 선사한다. 폴라니는 이 책에서 블레이크의 시구를 인용해 자기조정적 시장을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라 칭했다. 산업화로 등장한 기계 때문에 제분소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로 시장이 스스로를 조정하다 못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요즘의 세태를 볼 때 블레이크의 저 시구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적확한 묘사이다. 또한 이 책의 내용은 그것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다. 또 하나 드러나는 특징은 제목의 변화이다. 원제인 'Great Transformation'을 두고 박현수가 '거대한 변환'이라 한 반면, 홍기빈은 폴라니의 다른 팸플릿에 이 책의 두 장을 번역해 실은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에서 '거대한 변형'이라 했다가 새 번역본을 내놓으면서 '거대한 전환'이라 바꿔 칭했다. 이에 대해 홍기빈은 '옮긴이의 말'에 그 사연을 밝힌다.

글자 그대로 옮긴다면 '변형'(變形)이 적당하겠으나, 이 책에서 폴라니가 이 단어를 사용하는 맥락을 그렇게 옮기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라틴어에서 왔지만 그리스어 '변태'(metamorphosis)의 동의어이며, 굼벵이가 나비로 변하는 것과 같은 급격하고도 완전한 변화, 도저히 그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변화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 또 이것이 바로 폴라니가 19세기 초나 1930년대의 급격한 사회적 형식의 변화를 'great transformation'이라고 부른 의도이기도 하다. 도저히 그전의 상태에서는 예측은커녕 상상하기도 힌든 바향으로 하루아침에 온 세상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 당시에 벌어진 사건이었으니까. (중략) 그런데 이 책에 수록된 루이 뒤몽의 프랑스어판 서문을 보면서 '전환'(轉換)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뒤몽도 이 책의 제목을 글자 그대로의 'transformation'으로 보기보다는 독일어 'Unwandlung'이나 프랑스어의 'retournement'처럼 '반전'(conversion)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나도 용기를 내어 이러한 의미에서 '변형'이 아니라 '전환'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야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변환'이라는 말을 새 번역본에도 그대로 썼으면 하지만, 루이 뒤몽과 홍기빈의 주장도 나름 설득력이 있어 보이며(정확히는 그런 것도 같고...이지만... ^^:), 구 번역본이 참조했다고 하는 일역본 역시 '대전환'(大轉換)이라는 제목을 채택하고 있다. 사실 '변환'이든 '전환'이든 이 자본주의의 빗나간 창조물인 자기조정 시장은 단기간에 인류에게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대표적인 게 허구적 상품, 이른바 토지, 자본, 노동을 상품화한 것이다. 지금의 우리야 돈 주고 땅을 거래하고, 돈을 빌리며 이자를 지불하고, 노동의 댓가로 임금을 받지만, 인류가 이것을 일상화하는 데에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급격한, 또한 대규모의 변환/전환을 남 다른 시선(시장 따위는 우연적 산물이며, 절대적인 준거도 아니다!)으로 찬찬히 설명하는 게 바로 이 책 <거대한 전환>이다. 하지만 경제학에 대한 기초적 개념은 물론 서구 근대 정치/사회의 변화사를 기본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선 쉽사리 진도 나가기 힘들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이따금 펴 볼 때도 당황스러울 정도라서 솔직히 구 번역본을 사고서도 여태 완독은 하지 못하고 중요하다 생각되는 장을 골라 읽었을 뿐이다. 역자 스스로도 "영어권 독자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 최소 학점만 이수한 나는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잠깐 훑어본 바로는 번역의 질은 구 번역본보다 좀 더 읽기 쉬워 보이니 다행이다. 또한 영어본 말미에 실린 폴라니의 추가 설명을 각 장의 뒷부분에 옮겨 배열한 것도 이 책의 난해함을 덜어 내며 읽는 데 도움이 될 듯싶다.

자, 이제는 본격적으로 읽는 일만 남았다.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http://camelian.tistory.com2009-07-20T14:37:10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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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 피렌체편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 피렌체편 - 8점
김태권 지음/한겨레출판

<팝툰>에 김태권이 '르네상스 탐정 바사리'를 연재한다는 말에 덜컥 정기구독을 할까 했다. 아무래도 잡지를 매달 사 보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다소 목돈이 들고 꽂아둘 데가 없어 처분할지언정 볼 만한 잡지는 정기구독을 유혹한다. 하지만 아내는 그 만화는 어짜피 단행본으로 나올 거라며 정기구독을 말렸고, 나는 군소리 없이 아내의 말에 수긍했다. 그러다 세월이 흘렀고, 나는 그 만화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그러다 신간 뉴스레터에서 접한 김태권의 새 책 소식. <십자군 이야기> 3권의 발간을 오매불망하는지라 김태권이라는 이름 석 자가 가져다주는 기대감도 있는데, 거기에 그동안 내가 잊고 있던 '르네상스 탐정 바사리'를 단행본으로 엮은 거라니. 구매를 도저히 튕길 수 없었다.

문제는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라는 아주 드라이한 제목. 도대체 '르네상스 탐정 바사리'라는 제목에서 풍기던 '포쓰'는 어데 가고, 저런 '로마법 대전' 같은 딱딱한 제목이 남았단 말인가.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를 통해 르네상스 미술가들의 궤적을 좇아간다는 애초의 콘셉트는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라는 제목에 짓눌려 버렸다. 이러나 저러나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점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이것이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미술사 책도 아닌, 위트와 유머로 기존의 텍스트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만화인 마당에 저런 제목을 단 이유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책을 팔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팝툰에 연재할 때 서점에 가도 잡지가 온통 래핑된 탓에 정작 만화를 보지 못했는데 막상 단행본을 구매해 만화를 보니 재미가 없었다. 아, 실망. 만약 미리 봤으면 구매를 안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원래 김태권의 만화는 재미없었다. '창비주간논평'에 연재하는 '20세기 연대기' 또한 매주 챙겨 보기는 하지만 재미없다고 투덜거린 적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나름 유머를 구사하려 하지만, 잘해야 피식 웃게 하는 데 그친다. 혼자 재미있어하고 혼자 즐거워한다고나 할까? 사실 그에 매료되게 했던 <십자군 이야기>도 그자지 재미있는 '만화책'은 아니었다. 그의 재능은 만화를 재미있게 구성하는, 시쳇말로 '빵 터지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역사와 시사를 넘나들며 기득권층의 위악성이나 문제의 심각성을 밝혀 내고 그것을 사정 없이 비꼬는 데 있다. 다만 비꼬는 기법이 기존의 만화(특히 웹툰) 문법을 따르지 않는 데서 어색함을 유발하고, 이것이 그의 만화를 재미없게 만드는 원인이 아닐까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장기를 잘 살렸지만, 재미있는 만화책이 되려면 저자 스스로가 좀 더 유머를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그랬다간 그의 장기마저 사라지기 십상이다.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는 분명 만화책이다. 그런 점에서 재미없는 만화책은 사장되어야 할 것이나, 만화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말 또한 사장되어야 한다. 만화는 텍스트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저자의 주요한 서술 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빵 터지게 하는 재미가 아니라 연속적인 이미지에 텍스트를 담아 내는 행위이다.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는 '미술지식만화'라는 레테르를 붙이고 있다. 즉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지식을 만화라는 텍스트로 전달하는 책이라는 말이다. 널리고 널린 게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인지라 그림을 자체를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림만 본다고 그림의 맥락을 아는 것은 천재가 아닌 양 쉽지 않으며, 설사 안다 해도 일부만 보거나 오해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런 문제점을 해결하려 해서인지 그림을 설명한 책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그런 책들의 대부분은 '어렵다'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미술사학자 또는 미학자가 자신이 배운, 자신이 가르치는 언어로 설명한 대부분의 책은 그림을, 미술사를 잘 모르는 이들이 읽기에는 여전히 어렵다. 그런 점에서 만화라는 친숙한 서술 방식으로 독자에게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이 책의 가치는 높은 편이다. 저자 스스로도 학부에서 미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서양 고전을 배우는지라 스스로도 욕심이 나고, 또한 그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작업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만화라는 서술 방식을 적용했다 해도 단순히 미술가와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참 재미없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바사리라는 실존 인물이 시간 이동을 해 전대의 미술가들의 삶과 작품 세계를 탐구/조사한다는 접근 방식은 매력적이다. 14세기의 세계를 책으로만 본 얼토당토 않는 20세기, 21세기의 인물이 섣불리 14세기로 가는 것보다는 실제로 르네상스 미술가들을 열전으로 펴낸 바사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은 탁월하다. 그런데 출판사는 왜 제목을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라는 밀전병 같은 제목으로 밀어 버렸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책 자체가 재미없는 만화라는 점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평범 속에 비범을 가둘 때 작자는 스스로의 창의성을 잃어 버리기 쉽다.

덧.
TTB리뷰에 링크된 다른 리뷰
를 보니 잡지 연재분과 단행본은 꽤 다르다 한다. 어쩐지 탐정이라 하기엔 어딘가 어정쩡해 보이더니. ^^: 내가 긍정적으로 보았던 애초의 콘셉트는 아마 실패였나 보다. 그렇다면 제목의 변경은 이해가 간다. 내용이 바뀌었으니 제목도 따라서 변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제목은 너무나 심심하다. 거기에 애초의 콘셉트가 실패한 것도 애석하도다.
http://camelian.tistory.com2009-07-14T00:04:56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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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신성가족 상세보기
김두식 지음 | 창비 펴냄
『불멸의 신성가족』은 사법을 주된 탐구 대상으로 삼고, 사법을 통해 우리사회 전체의 모습을 분석하고자 시도하였다. 본문에는 일반적으로 사법 하면 떠올리는 판검사, 변호사, 경찰, 민형사 소송 경험자는...

책이 나오기 전에 제게도 <불명의 신성가족>의 가제본이 전달됐습니다. 읽지는 않고 대충 훑어보기만 했는데, 부제에서 일단 어렴풋이 제목이 뜻하는 바를 유추할 수 있었죠. 또한 '김두식'이라는 저자명에서 이 책은 그의 전작인 <헌법의 풍경>이나 <평화의 얼굴>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표지가 없었기에 그동안 6권이나 진행된 '우리시대 희망찾기'라는 시리즈라는 점은 방기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받아들고서도 시리즈임을 알 수 없었죠. 뭐 제가 꼼꼼이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이 가장 크겠지만, 기존 6권과 표지 디자인이 확연히 다릅니다. 또한 상징성 가득한 제목의 콘셉트도 다르죠. 익숙한 책등이 아니었다면 시리즈의 일부임을 한참 후에나 알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이 제목으로 인용한 엥겔스의 저작은 저 또한 읽어 보지 않아 내용은 모르나, '신성가족'이라는 단어가 전해 주는 느낌은 명료합니다. 거기에 부제에 기재된 '사법 패밀리'라는 용어로 볼 때 이 책의 성격은 제목만으로도 대충 짐작할 수 있죠. 여기에 저자의 전작을 읽어 본 이들이라면 띠지의 문구를 보지 않더라도 어렵지 않게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불멸'이라는 수식어가 걸립니다. 그만큼 '사법 패밀리'가 그들만의 철옹성 안에서 스스로를 게토화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무언가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다는 불길함을 전해 주는 듯합니다. 이는 책의 결말에서도 드러나더군요. '억지로 찾아본 희망'이라는 중제에서 드러나듯 저자는 문제 투성이의 '신성가족'을 어찌해 보지 못하고 "시민들이 두려움의 장막을 걷고 법조계를 향해 말 붙이기를 시작"할 것을 주문합니다. 그나마도 "해체될지도 모릅니다"라는 도망가는 듯한 뉘앙스로 말이죠. "외형적으로는 1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해"졌다고 하지만, 저자는 '의사소통의 부재'와 '원만함'이라는 여전한 문제점을 제시하며 스스로 "방법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시민의 희망이다"라는 말은 줄 하나 댈 사람 없는 85.5%의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억지로 찾아본 희망"에 불과하지요. 책을 읽으면서 손이 오그라들고 가슴이 미어터지는 와중에도 그래도 마무리에 가서는 제아무리 '불명의 신성가족'이라 할지라도 뭔가 흔들어 볼만한 '껀수'를 제시하겠지 하는 제 바람은 여지없이 휴지통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저자의 위치나 시리즈의 특성을 볼 때 어쩔 수 없겠구나 했던 애초에 느꼈던 한계점이 확인받는 것 같아 조금 불쾌했습니다.


검사 생활이 짧았기에 그저 로스쿨 교수일 뿐인 '신성가족'의 외곽에서 맴도는 저자는 애초에 '법당밖에서 빙빙 도는 종교 전문 기자'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몇 안 되는 내부고발자들의 구술을 정리하는 책의 콘셉트 상 대안적인 결론을 낼 수 없었을 겁니다. 이건 인정해야죠. 본격적으로 사법 시스템 내의 문제를 내부 고발했다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테니까요. 게다가 저자 스스로가 꾸준히 면접하고 정리하고 기술해 나가면서 신영철 대법관 사태 같은 현 시점에서 벌어지는 문제점을 신속하게 다루었다는 점 역시 장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동안 '신성가족'의 지배에서 고통받아 온 사람들을 통해 알게 모르게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는 점을 확인한 것에 그친다는 단점으로도 비칩니다. 생생한 내부고발자의 증언에 손이 오그라드는 분노를 야기할 수는 있지만, 정작 하경미 씨처럼 '개고생'을 해야 그나마 대들어 볼 수 있음을 확인할 때 독자는 스스로 무기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시대 희망찾기'라는 시리즈 명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 버립니다. 물론 이러한 사법 패밀리들의 문제점은 사법 제도를 통째로 바꿔야 뭔가 개선의 여지가 있습니다. 미국처럼 사법시험이 아닌 로스쿨로 변호사를 양성하고, 일률적인 성적순이 아니라 공모로 판사와 검사를 선발해 양성하고, 추첨으로 된 배심원이 실질적인 판결을 하는 등 개선할 방향은 있습니다. 문제가 가득하긴 하지만 이미 로스쿨이 개교했고, 국민참여 배심원 재판도 시범 실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기의 시도를 접하지 않고 문제점만 고발하는 것은 열심히 분노해 온 독자를 허탈하게 하지 않나 싶군요. 그럴 바에는 나름 법 전문가가 굳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저자가 말한 문제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기자가 진행한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의구심이 듭니다. 거기에 저자 스스로 "우습다"라고 실토한 정년 보장이 되고서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서두에서 밝힌 말은 짜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다소 지엽적이지만 아쉬운 것 중 하나가 브로커들을 '신성가족의 제사장'이라 칭한 점은 재미있는데, 그것에 그친다는 것입니다. '신성가족'이라는 상징 가득한 제목 덕분에 딱딱한 고발서에 그쳐 보이지도 않죠. 하지만 딱 거기서라는 게 걸립니다. '신성가족'의 내부와 외부에서 똬리 틀고 있는 각종 군상들을 '신성가족'이라는 이름을 두고 저마다 상징화해 묘사했다면 조금은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표지의 이미지도 아쉽습니다. 굳게 닫힌 '신성가족'의 폐쇄성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자물쇠 모양의 이미지는 그리 보이는데 그 콘셉트와 제목의 서체는 어색해 보입니다. '신성가족'에는 좀 더 견고한 느낌을 준다면, '불멸의'에는 기왕 캘리그라피를 한 것 무언가 바스라 트리는 색깔과 서체를 썼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리 쓰고 보니 맨 불평만 가득하군요. 앞서 말했지만 읽는 내내 두 손이 오그라드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저 역시 85.5%에 속하는지라 나도 저리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과 함께 가능한 저 인간들과는 엮이지 않는 게 좋겠구나 수십 번 다짐하면서도 책 자체는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재미있게 읽는다 말하면서도 "이거 참 씁쓸하구먼" 하는 속내는 끝내 감출 수가 없군요.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사내 인트라넷에 내부자 리뷰로 쓰였기에 TTB리뷰에 링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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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축구의 전술, 알고 봐야 제대로 보인다! - 8점
이형석 지음/싸커라인(Soccerline)


축구 커뮤니티인 사커라인을 드나들다 <현대축구의 전술, 알고 봐야 제대로 보인다!>라는 책이 나온다는 사실을 접했다. 평소 축구 전술에 관심이 많던지라 낼름 구매했다. 정가 1.3만원이라는데 배송료 포함해 1만원이면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서점과는 유통 계약을 맺지 않고 웹사이트 직판과 옥션에서만 판매하는 게 흠이라면 흠.

예정된 날짜에 받아 본 책은 충격까지는 아니었지만 조금 놀라게 했다. 한 명이 디자인, 일러스트, 편집을 도맡아했다는 이 책의 디자인은 HWP로 편집한 듯 무척이나 심심하고 또 심심했다. 애당초 올 컬러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책에선 축구장의 녹색 그라운드는 전혀 볼 수 없었다. 마치 해외 전지훈련을 나갔다가 녹색 잔디의 전용 구장이 아니라 맨땅 공설 운동장을 보고 당황한 느낌. 게다가 도중에 문단 하나를 통째로 날려 먹은 페이지가 있는가 하면 가독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타이포그래피, 빡빡한 여백의 설정 등, 책을 전문적으로 만들어 보지 않은 이가 며칠 밤을 캐고생하며 HWP로 낑낑 됐을 뻔한 장면이 눈에 선했다.

한국 축구계나 출판계나 그 빤하디빤한 좁고 열악한 환경을 고려하면 사실 이런 책이 팔려 받자 얼마나 팔릴 것이며, 이런 책을 과감히 펴낼 출판사가 어디 있겠나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태생 자체를 축복해 줘야 하는 소중한 결실일 게다. (하지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지 않은가. 심히 아쉽다.) 사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 봐도 축구에 관련된 책 자체가 별로 없는데다, 그마저도 선수 가이드북, 에세이집이나 칼럼집에 불과할 뿐 전술 등을 다룬 축구 전문 서적은 가뭄에 콩 나 듯하다.

열악한 디자인에 비하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좋은 편이다. 전반부의 '축구 전술의 역사'와 '현대 축구의 이해' 편은 축구 전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 내용을 적절히 채웠다. 우리가 흔히 뉴스나 해설로만 접해 실제로는 관념적으로 안다고 믿는 '압박 축구'와 '카테나치오' 같은 개념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어지는 포메이션 시스템별 전술의 상세한 해설과 시스템 간 대결 구도에 대한 설명은 포메이션이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한다. 특히 관념적인 기본 개념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맨유나 바르셀로나 같은 팀의 실제 사례를 거론하며 해설하는 점에서 좀 더 이해가 쉽다. (문제는 팀 간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단도 일러스트.)

이런 축구 전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을 설명한 다음에는 홀딩-앵커맨으로 구성되는 중앙 미드필드진의 필수성, 로테이션 시스템, 유럽 3대 리그의 차이점 같은 축구팬이라면 가질 만한 질문 10가지를 두고 앞서 설명한 이론을 바탕으로 답해 준다. 특히나 해외 언론 등을 통해 유입되었다가 원개념이 이상스레 변해 버린 용어를 사용하면서 발생한 축구 전술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 준다.

제목도 제목인데다 마무리 글에서 밝히 듯 저자 스스로 '알고 봐야' 함을 강조한다. 그저 리모콘 들고 맥주캔 부여 잡고 편한 자세로 눈요깃거리가 아니라 숱한 경기의 연속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차츰 발전해 온 복잡한 전술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볼 것을 주문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박지성이 재계약을 한다 만다, 주전에서 밀렸나 안 밀렸나 같은 가십은 휴지통으로 밀어 넣고 축구 그 자체를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덧. 알라딘에 등록돼 TTB리뷰로 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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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예수전 - 10점
김규항 지음/돌베개
대학에서 일반 교양으로 들었던 '서양사의 이해' 과목의 기말고사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예수의 죽음을 (신학적, 종교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사회적인 이유를 들어 논하라."

칠판에 적힌 문제를 확인하자마자 속으로 '아싸라비야'를 외쳤다. 그리고 그야말로 일필휘지(日筆揮之)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답안지 앞뒷면을 빼곡히 채워 가며 답을 썼다. 총 소요 시간은 약 20분. 다 쓰고 나서는 점검해 보고 그럴 일은 없었기에 바로 답안지를 제출하고 퇴실했다. 속했던 동아리가 해방신학의 영향 아래 예수 복음을 하나의 운동으로써 삶과 사회에서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동아리이다 보니, 그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은 입회한 이후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공부하고 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하의 악필을 자인하는 나로서는 100명이 넘게 듣는 교양 수업에서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듯하다. 점수는 생각보다 안 좋았다. 결석으로 까먹은 점수도 좀 있었지만.

김규항의 <예수전>은 그런 동아리 생활을 했던 나로서는 아주 식상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는 2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율법 지상의 유대교 사회를 밑바닥부터 뒤흔들었고, 그 때문에 당대 기득권 세력의 견제를 받아 그야말로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돼 죽었다는 것. 김규항은 이런 예수라는 한 사내의 삶, 언행, 죽음 따위를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그의 본 모습을 전(傳)한다. <예수전>에 드러나는 예수의 대척점은 교리의 대상이 되면서 우리에게선 죽어 버린 신이다. 그 신은 부자들의 신이며, 율법의 신이며, 타협의 신이며, 피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신이다. 하지만 김규항은 가난한 이들의 신이며, 율법을 깨 버리는 신이며, 불의에는 비타협적으로 맞서는 신이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에 현재했던 신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또한 예수는 신 이전에 한 인간이라 말한다.

이렇듯 <예수전>에 나타나는 주요 내용은 해방신학 관련 책 좀 읽어 봤거나 하다못해 이현주 목사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 같은 책을 한 번이라도 읽어 본 사람에게는 아주 식상하겠지만, 반대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되뇌이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도구로 여기는 대다수의 기독교인에게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게다. 하지만 무엇이 2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참 모습일까?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예수에 대한 신앙 또한 그렇게 믿을 게다.

김규항은 이런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대본으로 마르코 복음을 골랐다. 4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였기에 종교적 첨가가 가장 적어 예수의 본 모습을 좀 더 전하는 복음서, 마르코 복음 말이다. 거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저본으로는 가톨릭에서 나온 <200주년 신약성서>를 썼다. 이 번역본에서 예수는 반말을 하지 않는다. 반말도 존댓말도 없던 언어로 말했던 예수의 이야기를 존댓말과 반말의 구분이 엄격한 한국 사회에서 올곧게 전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개신교회에서 강변하는 유일신을 강조하는 '하나님'이 아닌 보편자의 모습을 한층 더 살리는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즉 어떻게 하면 2천년 동안 오해로 가득 찬 예수의 본 모습을 제대로 까발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는 말이다. 평소 김규항의 언행에 학을 띈 나로서도 그의 선택에는 십분 공감한다. 그가 전하는 예수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로 공감한다. 문제는 기득권화한 교회와 불화한 채 살다 보니 예수의 복음을 점차 잊고 살아가는 내 모습일 게다.

이 책에서 또 한 가지 발견한 것은 북디자이너인 안상수 선생의 몇 가지 디자인 시도이다. 파란색 합지 양장 커버에 안상수체로 제목 '예수전'을 뚫은 노란색 커버의 조화는 책의 만듦새에 관심이 생긴 내게는 재미있는 시도였다. 또한 본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끝맞춤 정렬이 아닌 왼쪽 정렬로 일관해 텍스트의 흐름을 변화를 준 시도 또한 생각해 보게 하는 시도였다. 물론 그것이 가독성을 더 떯어트릴 수 있다. 하지만 당대의 율법에 맞섰던 예수를 생각하면 양끝 맞춤의 틀에 사로잡힌 우리네 시각에 변화를 주는 그러한 시도는 유의미한 것이다.
http://camelian.tistory.com2009-05-13T11:25:13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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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드라마신화드라마 - 6점
최복현 지음/풀로엮은집(숨비소리)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한 장으로 보는 지식 계보도"라는 시리즈 제목에서 드러나는 그리스 신화의 계보도 부록이다. 이 계보도에는 카오스를 시작으로 제우스에게서 만개되는 신들과 인간들의 복잡하게 꼬인 계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한다. 사실 그리스 신화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를 비롯한 여러 구전, 필전되는 여러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힌 집단 창작물이기에 신화에 드러나는 군상들은 굳이 그들의 기행이 아니더라도 복잡한 관계 덕에 좀체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국전지 커다란 종이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신과 인간 들의 계보도는 그리스 신화를 좀 더 쉽게 접근하도록 이끌어 준다.

아쉽게도 이 책의 장점은 이 계보도 부록에서 끝난다. 본문은 평이한 서술로 그리스 신화의 주요 부분을 서술해 주고 있지만, 그것이 딱히 불핀치가 쓰고 이윤기가 번역한 <그리스 로마 신화>보다 쉽게 읽힌다고 보기 힘들며,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같은 천병희 선생의 원전 번역작보다 권위가 있다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사실 다만 이 책처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지 않았다일 뿐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에도 부록으로 신들의 계보도를 꽤 상세하게 제공한다. 물론 그리스 신화를 개작된 문학 작품으로 볼 필요도, 머리 싸매 가며 원전을 파고들며 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의 전문가라고 할 수 없는 대중 저술가가 쓴 어중간한 서술은 장점이 없다.

실제 내용 측면에서도 저자는 그리스 신화는 펠라우고스 신화, 오르페우스 신화, 호메로스가 전하는 신화,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신화, 네 가지가 얽힌 것이라 이야기하지만 저자의 서술은 우리가 익숙한 후자 두 신화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렇다고 그리스 신화를 다룬 다른 책과 차이점도 없다. 저자 스스로 좀체 다른 해석을 내린다거나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보지 못하고 그저 이야기를 전해 줄 뿐이다. 신화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를 조명한다는 인문학의 본 목적을 이행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더군다나 기존 그리스 신화 관련 책자를 분명 참조해 가며 서술했을 텐데도 참고 문헌이라 밝힌 책이 한 권도 없다는 것은 글쎄... 수십 종의 관련 서적이 난무하는 강호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행위이다.

이 책은 이런 점에서 그럴듯한 부록만 남는 책이다. 평이하게 쓰인 탓에 대중교통 이동 중 같은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좋긴 하지만...
http://camelian.tistory.com2009-05-13T10:51:190.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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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을 닮은 방 1 - 8점
김한민 지음/세미콜론

혜성을 닮은 방 2 - 8점
김한민 지음/세미콜론

혜성을 닮은 방 3 - 8점
김한민 지음/세미콜론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가 있다. 일반적으로 대개 대사의 비중이 높고 예술성을 추구한 '고급' 만화로 여긴다. 휙 보고 마는 종래의 만화와 달리 방대하고 굵직한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인물 간의 대사나 복잡한 상황 전개를 묵직하게 풀어낸 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세미콜론이나 시공사 같은 몇몇 출판사에서 펴냈는데 <300> <와치맨> 같은 영화화한 작품이 국내에도 출간되면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았으나, 기존 만화의 전달 방식과는 다르기에 국내에서는 대체로 시덥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듯하다.

일단 그래픽노블의 특징은 '코믹'하지 않다. DC코믹스나 마블코믹스 같은 'comic'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출판사에서 기획해 세상에 선보였지만, 이들은 만화답지 않게 전혀 웃기지 않는다. 이들은 대체로 어둡고 음습하고 우울하며 또한 잔인하고 마초적이다. 내러티브나 인물의 묘사도 앞서 말한 것처럼 복잡하기 그지없으며 방대하다. 게다가 대체역사라든지 (어딘가 있을 법하지만) 가상 현실을 다루면서 현실을 묘사하지도 현실을 초월하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서 만화의 테두리 안에서 출발했지만, 그래픽 노블은 사실상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로 구현한 소설, 즉 그림 소설로 보는 게 외려 적절하다. 사실 그래픽 노블도 직역하면 '그림 소설'이다. 하지만 문학 하는 사람들은 그래픽 노블을 장르 소설의 범주에 넣지 않고 그저 고급스러운 만화로만 여길 뿐이다. 물론 그래픽 노블과 만화의 경계는 상당히 모호하기에 소설로만 보는 것도 쉽지는 않다. <코르토 말테제> 같은 것은 그럭저럭 소설의 범주로 보려는 노력을 할 수 있지만 <땡땡>이나 <아스테릭스>는 어째야 하나? 답은 없다.


DC코믹스나 마블코믹스가 절대 다수이고 이따금 유럽 작품들이 번역돼 출간되긴 하지만 국내작은 손에 꼽을 만하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게 바로 김한민의 <혜성을 닮은 방>이다. 새만화책에서 나온 그의 데뷔작 <유리피데스에게>를 무척 감명 깊게 읽은데다 후속작인 어린이 그림책 <웅고와 분홍 돌고래> 역시 재미있게 본지라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혜성을 닮은 방>은 그의 이름 석 자만으로도 작품을 기대하게 했다.

그런데... 전작에서 드러나는 끊임없이 타자와 겪는 불통을 딛고 소통하려는 갖은 노력은 이 책에서 폭발해 버렸다. 게다가 '혜성'이라든지 '소우주', '에코', '그림자'처럼 우리가 일상에 쓰는 언어와 다르게 쓰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선 작품 안 세계는 모호하기 그지없다. 작품 안 인물들의 묘사나 언행 패턴 역시 독자 따위는 무시할 정도로 복잡하고 생경하다. 그나마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면 독자로서는 그나마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할 수 없었을 듯. 아니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기에 텍스트로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것일까?


전 3권으로 구성된 <혜성을 닮은 방> 시리즈는 혼잣말을 누군가가 몰래 기록해 그것을 도서관에 집적한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한 명의 관찰자는 주인공인 혼잣말의 대상을 몰래 뒤따르며 그의 혼잣말을 녹음한다. 혼잣말은 한 사람의 사유인 동시에 인류가 보존해야 할 유산이며 또한 세계를 가동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혼잣말은 기본적으로 소통하지 못하거나 거부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혼자만의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 엿듣는다면? 그것은 소통을 역으로 거부하는 일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혼잣말 대신 대화할 것을 요구하거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소통'이다. 하지만 자폐증을 겪는 주인공은 쉽사리 소통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역으로 타자가 그와 소통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일방적으로 소통하려 하면서 외려 불통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이는 그의 전작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고립된 자아와 불통하는 세계의 대립의 결정판이다.

전작의 고대 그리스의 한 폴리스, 정글 같은 단일하고 좁은 세계와 차원이 다른 작가가 새롭게 창조해 낸 복잡 모호한 가상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관찰자는 얼핏 그 밖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는 애당초 소통할 수 있을까? 그 역시 불통스러운 관계를 맺는다. 관찰자는 자꾸 개입하려 하지만 연구소라는 모종의 집단은 그것을 방해한다.


이 작품은 이러한 소통과 불통, 자아와 타자, 그리고 세계의 대결을 전혀 흥미지진하지 않게 이야기한다. 알 듯 모를 듯한 모호한 개념 설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적지 않은 인물들이 얽힌 창조된 세계 한가운데에서 독자는 갈피를 잃기 십상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앞서 말했듯 그래도 그림으로 이 모든 게 설명된다. 그런데 여기서 묘한 매력이 드러난다.

저자는 애당초 자신이 설정한 세계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싶어 하지 않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독자와 불통하려든다는 건데... 하지만 그림이라는 하나의 단초를 제시하면서 또한 소통의 장치를 마련하기도 한다. 텍스트로만 되어 있으면 독자 스스로도 제멋대로 작품을 이해하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왜곡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점에서 '그림 소설'이라는 한국 출판계에서는 독특한 방식은 적절한 표현 방식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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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 특별판 - 전10권 - 8점
김만중 외 지음/민음사

올초에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200권 돌파 기념으로 10종 특별판을 내놓았다. 인터넷서점에서 제공하는 이미지를 보자니 들쭉날쭉한 판형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끄럼틀 지붕 박스, 그리고 책을 고른 기준의 모호함 따위의 이유로 '얼씨구 씨잘데기 없는 데 돈 썼네'라고 넘어갔다. 그리고 후배가 그것을 살까 말까 물어봤을 때 이 같은 이유로 분명 후회할 거라 했다.

어제 민음사 대표인 장은수 씨의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저 특별판의 아주 일부만 흘겨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강의의 핵심은 책의 정의, 그리고 물성(物性)이었는데, 강사는 그러한 정의와 물성을 파괴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 특별판은 그러한 실험의 일환이라는 거다.

박스 세트라는 상품이 가져다주는 고정관념은 일단 들쭉날쭉한 판형에서 파괴된다. 컬렉터가 아무리 꽂아 두는 것을 좋아한다 해도 쫙 '가오'가 난다 해도 시리즈가 똑같은 판형으로 일률적으로 꽂아 두는 것은 인류가 수백 년째 고수해 오고 있는 '지난' 시대의 방식이다. 물론 나는 가오를 중시하기는 하지만, 발상이라는 것은 전환해 봐야 하는 거고 고정관념은 깨 봐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이 밖에도 이 시리즈는 온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서모컬러 잉크를 사용한다든지, 잉크가 번지지 않는 초고가 용지를 쓴다든지, 고전의 전형적인 텍스트 배치 방식을 바꾼다든지, 자수 기법을 도입해 수제작 장정을 하는 등 다채로운 디자인 방식을 도입했단다. 자세한 것은 민음사에서 제공하는 동영상을 보면 된다.

동영상 내려받기(마우스 오른쪽 버튼 눌러 '링크를 다른 이름으로 저장' 누르기)

대체로 이 특별판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나처럼 들쭉날쭉한 판형부터 문제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싼 가격에 낱권 판매를 안 한다는 사람에 심지어 책에 쓸데없는 인테리어질한다는 사람도 있다. 책의 선정 기준이나 여전한 오탈자 문제야 출판사를 탓할 만하다. 하지만 책이 이러한 꼴로 나오게 된 맥락을 이해하지 않은 채 그저 돈질한다고 하는 비판은 당최 이 특별판, 나아가 이 출판사의 실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정관념의 틀에 갇힌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아주 당연하게도 이 책은 일반 대중을 위한 책이 아니다. 북리펀드로 책을 되파는 사람이나 도서관에서만 빌려 읽는 사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책을 소장할 만한 자산으로 보고, 수집 가치가 있다 싶으면 과감히 투자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물론 척박한 한국의 출판 시장에 이러한 자는 아주 극소수이다. 하지만 애당초 2000세트 한정판이라 한 것은 그런 사람의 수가 아무리 많게 잡아도 2000명을 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특별판 발행을 최종 결재한 사람의 말을 들어서인지 모르지만 이 책에 대한 호감이 높아졌다. 모든 컨텐츠가 디지털로 전환할 것을 강요받는 이 시기에, 오로지 책만이 가지는 여전한 가치를 지키고 높이는 이 시도의 결과는 앞서 말한 대중의 불평과 출판사의 적자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실험이라는 점에서는 이것은 분명 자산이 될 것이다. 적어도 한국 땅에 이렇게 북디자인을 놓고 적극적으로 실험한 예는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칭찬은 했는데... 저 시리즈를 살 요량은 없다. 값도 비싸고 둘 데도 없고 문학에도 별 흥미가 없다. 산다 해도 다른 책 살 돈 2달치를 떼려 박아야 하는데 그러기도 쉽지 않다. 다음주에 구경이나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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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가 죽인 책들교과서가 죽인 책들 - 8점
로버트 다운스 지음, 곽재성.정지운 옮김/예지(Wisdom)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로버트 다운스가 쓴 <교과서가 죽인 책들>은 제목부터 인상적이다. 옮긴이는 이 책에 실린 책들이 "교과서에 몇 줄로 축약되면서 원래의 책이 갖는 의미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막았다"고 지적한다. 교과서를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다소 뜨끔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Books That Changed the World, 즉 '세상을 바꾼 책들'이라는 원제를 그딴 식으로 바꿔 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교과서는 애당초 아주 제한된 분량 안에 교육과정에 언급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내용을 균형감 있으면서도 미학적으로 잘 버무려 담아야 하는 특수한 책이다. 물론 분량이나 표현 수준에서 제약이 있고, 어느 정도 수정, 발췌가 용인되는 교과서라고 해서 앞뒤 잘라먹거나 저자의 의도를 제멋대로 훼손해 싣는 것은 응당 부적절하나, 그렇다고 책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사실 우리가 '고전'을 대하는 태도부터 점검해야 하지 않을까? 흔히 고전은 마크 트웨인이 "고전이란 누구나 읽었기를 바라지만 읽기는 싫은 책"이라 나름 내린 고전의 정의를 떠올려 보자. 이 말은 '누구나 내용에 대해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책'이라 다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차례를 읽으며 <교과서가 죽인 책들>에서 거론하는 책을 살펴보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뒤쎄이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 등. 우리는 교과서이든 다른 책에서든 이 책들을 숱하게 듣는다. 하지만 이 책은 교과서로 배우는 초중고등학생 시점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모름지기 고전은 그것을 읽을 만한 소양이 있어야 온전히 읽을 수 있다. 그런 소양을 미처 갖추기 힘든 학생 시절에는 일단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핵심이라도 잘 파악하고 있는 게 장땡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대학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에게 <군주론>이나 <꿈의 해석>을 발췌한 제시문을 가지고 논술문을 쓰라 하는 파렴치한 출제 경향이 외려 고전을 죽이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물론 고전을 고전답게 제대로 설명해야 함을 역설하는 옮긴이의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의도를 주장하는 데 지나쳐 '오바'했다 싶다. 다시 이 책의 원제를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 원제를 우리말로 옮기면 '세상을 바꾼 책'이다. 저자 로버트 다운스는 인류의 역사(물론 이 책은 서구의 역사를 빛낸 고전만 거론했다.)를 통틀어 획기적인 전환점 내지는 시사점을 던진 책에 대해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앞서 말했듯 대입 논술고사를 비롯한 시험을 공부하면서 대부분 고전을 접한다. 이렇게 읽으면 고전이 아닌 화석을 읽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고전을 읽을 바에는 차라리 당대의 현상만을 잘라 이야기하는 일부 사회과학 서적이나 감성적인 에세이를 읽는 게 낫다.

우리는 종종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종종 간과한다. 한마디로 고전은 그 시대와 당대의 지성의 결합체이다. 따라서 고전을 읽으려면 어떤 시대적 맥락에서 이 고전들이 쓰였는지, 시대와 고전이 어떻게 호흡했는지를 읽어 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좋게 말하면 '엑기스'만 낼름 잡숴 왔다. 그리고 고전을 읽으려 하는 사람을 책벌레나 공부벌레 정도로 취급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세계사를 바꾼 책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고전을 접해야 하는 이유를 대략적으로 이야기한다.

한편 책의 저자가 고전(학) 전문가가 아닌 도서관학 전문가라는 점이 눈에 띈다. 고전 전문가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저자는 도서관학을 전공하면서 접한 고전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다시 자리 매김 한다. 어떻게 보면 해당 고전에 정통한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도서관(학) 전문가가 질과 양으로 방대한 고전을 대중에게 좀 더 쉽게 전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고전에 관한 짤막한 맛보기의 묶음이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고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고전을 찾아 읽게 하는 데는 괜찮은 책이다. 다만 이 책 한 권 읽고 수많은 고전을 읽은 체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알라딘 TTB리뷰 9월 첫째 주 당선

http://camelian.tistory.com2008-08-28T07:41:12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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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탄생 - 8점
콘스탄틴 J. 밤바카스 지음, 이재영 옮김/알마

철학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 알라딘 서평단 도서(자일)

이 책의 표지를 보면 '철학의 탄생'이라는 큼지막한 표제 아래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 인간과 자연에 던지는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의 현장'이라는 부제가 보인다. 그리고 하단에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크세노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가들의 이름이 거론된다. 그렇다면 표지에서 거론되는 10명 철학자들이야말로 철학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서양철학사 책의 대부분은 탈레스를 거론하며 철학자들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10명의 철학자는 흔히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라 일컬어진다. 서양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탈레스부터 테모크리토스에 이르는 철학자들과 소크라테스의 차이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난다. 이 책은 그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다.
 
탈레스부터 테모크리토스에 이르는 철학자들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로 분류한다면 이들을 설명하려면 소크라테스의 철학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필요하다. 간단하게 도식적으로 설명한다면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에 대한 질문이라는 철학의 기본 과제를 설정하고 풀어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중심에 두었느냐이다. 엄밀히 따지면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 무리 가운데 한 명이었기에 소피스트를 이야기해 보면, 이네들은 철학의 대상을 인간에다 두었다. 거꾸로 이 책에서 언급된 탈레스부터 테모크리토스에 이르는 10명의 철학자들은 철학의 대상을 자연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이 책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사유했는지 이네들의 사상의 궤적을 추적한다.
 
알다시피 철학의 어원은 '지혜를 사랑하는 행위 내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철학을 만학의 근원이라 한다. 이는 오늘날처럼 학문이 분화되기 전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학문으로서 탐구하는 일체를 철학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가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인간을 비롯한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같은 일련의 질문이 나왔을 터이고, 이는 곧 철학의 대상이자 주제로서 인류의 '지혜'였다.
 
 
저자인 콘스탄틴 밤바카스는 먼저 이들 철학자들의 핵심 사상을 네 가지로 정리한 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 표면적인 무질서와 다양함의 심층에는 질서와 통일, 지속성의 세계가 있다. 
  • 이 지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근원적인 원소이며, 세계는 이 원소로부터 만들어졌다. 
  • 따라서 이 근원적인 원소와 우주의 현실은 하나이며, 초자연적인 원인이 아니라 자연적인 원인에만 기초하고 있다. 
  • 인간은 스스로의 힘을 통해 우주의 이러한 자연적인 원인들을 합리적으로 규명해 낼 수 있다.(이상 60-61쪽)
 
이런 명제를 세우고 나서 저자는 각 철학자들의 사상 가운데 주요 개념을 뽑아 차근차근 설명하고 이를 후대 철학자들의 평가를 바탕으로 정리한다.
 
흔히 밀레투스 학파라 일컬어지는 탈레스의 무리는 이 책에서 "자연철학자"라 거론했듯이 세계의 근원에 대해 가장 먼저 탐구해 (서양)철학의 시초자라 불린다. 탈레스를 이야기할 때는 도식적으로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정의가 먼저 떠오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탈레스는 "신화로부터 벗어나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세계의 다양한 현상들 속에서 자연적인 통일을 찾"으면서 "자연 속에서 합법칙적인 인과성을 인식"(이상 85쪽)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탈레스는 합리적인 사고를 거쳐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점에서 탈레스는 신화의 틀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한 첫 사람이었다. 이렇게 세계의 근원을 탐구하려던 아낙시만드로스나 아낙세미네스 같은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들은 점차 우주론의 영역으로 그들의 철학을 확장시켜 나갔다. 아페이론이라는 무한의 기원으로 시작해 따뜻함과 차가움, 습함과 건조함 같은 대립쌍이 우주의 구성요소이며 이들의 창조와 파괴의 과정, 즉 만물이 운동하는 법칙을 이야기했다. 뒤이어 저자는 밀레토스 학파의 뒤를 잇는 피타고라스나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같은 철학자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만물의 근원과 운동, 질서와 조화 등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서 있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분석했는지 그 전말을 설명한다.
 
그런데 5세기 중반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자연이 아닌 인간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후대의 우리는 그들을 소피스트라 일컬었으며, 소크라테스 또한 그 무리 가운데 독특한 일인이었다. 책 말미의 <후기>에서 저자는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대립하는 이론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일하고며 불변 부동하는' 파르메니데스으 존재도, '만물이 항상 변화하고 아무것도 유지되지 않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도, '허공과 보이지 않는 원자로만' 구성되는 데모크리토스의 우주도 쉽게 받아들이지기 어려웠다."라고 이야기한 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사유의 핵심은 현상적이고 경험적인 세계의 뒤에 숨어 있는 궁극적 현실을 찾는 데 있었다."(이상 489-490쪽)라며 이네 철학자의 사상과 그것의 학문적 가치("우리의 과학 전체는 합리적이고 비판적이며 따라서 독단적이지 않은 이론 형성 과정과 연구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통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492쪽))를 간략하게 요약한다. 이런 점에서 앞 부분에 실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한 개관>에서 이들 철학자의 사상을 접근하는 방법론을 취한 뒤 <후기>의 정리를 읽는 것만으로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핵심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정리와 목차를 보면서 관심이 가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개론적으로 정리해 가면 이 책을 읽는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분명 후기에 나타난 저자의 요약과 가치 판단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단순한 철학의 시초자로 보기보다는 과학의 시초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싶었는데, 나중에야 저자의 약력을 보니 자연과학을 전공한 뒤 철학과 자연과학의 인접 영역을 연구하는 사람이라 한다. 이를테면 과학철학 연구자라는 것인가? 앞서 말했듯 이 시대 철학은 인문학인 동시에 자연과학으로서 아직 분과 학문으로 나뉘기 전인 마치 혼돈(chaos) 상태 같은 총체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를 포함한 소피스트들이 철학의 대상을 인간으로 돌리기 전까지 철학자드의 주요 연구 주제는 자연 나아가 우주는 어떻게 구성됐으며 어떻게 변하는가였다. 당시만 해도 신화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던 때 그들은 자연을 접하면서 지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시작의 과정을 한눈에 보여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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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 10점
최규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만화, 삶의 단면을 잘라 내 보이다
 
만화가 최규석과 요새 철학사 수업을 함께 듣는데(물론 그와 통성명한 적 없이 그런 사람과 함께 수업을 듣는다는 것을 아는 정도이다), 수업 중 일생 중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경험을 말해 보라는 선생의 말에 최규석은 집 위에 집이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선 정말 충격받았다고 했다. 그가 충격받은 건 강남의 타워팰리스도 신도시의 15층 고층 아파트도 아닌 지방 소도시의 2층 건물이었다. 그는 평야라는 걸 보지 못해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지지리도 가난한 산골 출신에다 형제 많은 집의 막내라는 겹겹의 산에 둘러싸인 그로서는 당연한 충격이었을 게다.
한겨레21에 연재된 만화를 엮은 <대한민국 원주민>에 내비친 최규석과 그의 가족의 삶을 보면, 최규석과 나의 나이 차는 고작 한 살 차이임에도 똑같은 시대를 살아온 나와 그가 살아온 궤적의 간극은 태평양까지는 아니어도 동해 바다 정도 되어 보인다. 나 또한 지방 도시 변두리에서 살면서 용돈 한번 받아 본 적 없고 내 방 한번 가져 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규석이 보낸 어린 시절은 70-80년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50-60년대 한국사회의 풍경과 비슷할 정도로 나와 달랐다.
물론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가난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못하더라도 궁상스런 삶의 흔적은 언제나 기억 속에 도사리고 있다. 당시 우리네 삶은 서울-지방 도시-시골이라는 3단계의 분명한 위계제에 얽매여 있었다. 그나마 나는 최규석보다 한 단계 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거꾸로 내 위에는 서울 사람들이 있었다. 중3 때 세운상가에 컴퓨터를 사러 왔을 때 서울역에서 지하철 패스를 뽑지 않고 지하철을 탔다가 종로3가역에서 망신당했던 기억만 떠올려도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서울과 지방의 경계는 좀 더 명확해진다. 그리고 도시와 시골의 경계 또한 명확해진다.

최규석이 <~원주민>에서 그려 낸 그의 어린 시절의 키워드는 단연코 '가난'이다. <~원주민> 말미에도 실린 시네21 인터뷰 기사에서 시네21의 김혜리 편집위원은 최규석을 이야기하면서 "가난에 익숙하지만 궁상맞진 않다"라고 단언했지만, <습지생태보고서>에서 최규석이 자신을 모델링한 최군을 두고 "3대를 이어온 가난 때문에 온몸에 궁상이 배어 있다"라고 설명했을 정도로 만화 안에서 인물들이 일상적인 생활 모습을 보면 궁상이라는 말 외에는 별 다른 대체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는 비록 매사에 궁상을 떨지언정, 이따금 가난한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낄지언정, 가난을 현대인이 가져서는 안 될 절대악으로 치부하는 성장 만능 사회가 강요하는 일반적인 관념 따위는 무시하고 가난이라는 소재를 정면 돌파한다.
그렇기에 <~보고서>나 <~원주민>에서 그는 가난 때문에 기죽거나 굽신거렸던 모습을 그릴지라도, 그 모습은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링 안의 클린치에 불과하다. 외려 그는 우리네 정서를 작극해 가슴 한 켠을 뭉클하게 만드는 스트레이트 펀치를 수시로 날려 대고, 이따금 한 회의 말미에서는 피식 웃게 만드는 데 그쳐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결정적 어퍼컷을 아주 효율적으로 구사한다. 즉 그는 전형적인 인파이터 복서라 할 수 있다. 궁핍했던 자신의 가족사를 수치심으로 덮어 버리지 않고, 이를 잘라 내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으로 읽어 내는 그의 스토리텔링은 어줍잖은 웹투니스트의 명랑 컨셉과는 애당초 다른 길을 걷도록 했다.

사실 그가 이름을 알린 건 <아기공룡 둘리>를 패러디해 현대 산업사회와 마이너포비아 성향을 고발한 <공룡 둘리>였다. 80년대 군부 독재 시기 어른에게 반말하고 어른의 권위에 대들려고 공룡의 탈을 써야만 했던 아이가 성장했을 때 겪어야만 했던 처절한 삶을 최규석은 무자비할 정도로 어둡게 그렸지만, 그것은 IMF 금융 위기를 겪었던 우리네 소시민들의 일상이었으며, '습지'에서 서식해야 했던 그가 겪은 이 사회의 아주 거친 단면이었다. 가난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아는 그로서는 위선적인 착하고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는 대신 최대한 벼랑 끝으로 캐릭터를 잔인할 정도로 몰아붙인다. 덕분에 사람로부터 찬사를 얻는 동시에 그는 불안한 시선도 함께 받는다. 예켠대 <고래가 그랬어>에서 화화(畵禍) 사건을 일으켰던 <불행한 소년>에서 최규석은 발행인 김규항의 변을 인용하면 "무작정 운명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든가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고 내세에만 관심을 갖게 한다든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저항을 폭력이라 몰아붙인다거나 하면서 힘센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가짜 천사"를 소년이 죽임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는 순응의 허황된 이미지에 속지 말 것을 강변했다.
최규석의 그림 속에서 이렇듯 드러나는 인파이터 기질은 우리의 미시적 삶에 천착하면서 삶의 단면을 뭉텅 잘라내 버린다. 물론 그의 방식은 만화의 익숙한 관습을 차용하거나 화사한 기교를 쓰기보다는 다소 투박한 선과 퍽퍽한 색채를 주로 쓴다. <~원주민>에 실린 그림을 보면 색감은 음습하거나 어둡다. 펜터치도 사실적인 듯하면서 구체적인 디테일을 살리지 않고 어느 순간 뭉개 버린다. 말하자면 예리한 횟칼보다는 묵직한 고기 써는 칼로 내리쳐 살덩이를 부러트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가 써는 칼질은 아프다. 그만큼 그의 만화는 우리를 아프게 한다. 하지만 삶은 고통의 씨앗으로부터 자라는 나무이다. 그래서일까? 최규석의 만화는 우리에게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며, 우리의 삶을 가장 절실하게 드러내 보인다. 단지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다는 측면에서 리얼리스트가 아니라 삶의 진정한 모습을 그대로 그려 낸다는 점에서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실된 리얼리스트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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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에게 '신'이라든지 '선'이나 '정의'라든지 하는 추상적 개념을 가르치기란 쉽지 않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재간도 없거니와 어른 또한 그것을 정확히 언어로 표현하기란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기껏 하는 일이란 '믿으라' 내지는 '그런 게 있어' 정도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구드룬 파우제방의 소설 <하느님, 한 번 더 기회를 드릴게요!>는 한 아이의 하루 일상을 따라가며 질문을 던지고 동시에 답을 내리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아홉 살 니나는 하굣길에 차에 치어 죽어가는 고양이를 목격한다. 목숨이 아홉 개라는 시쳇말처럼 고양이는 바로 죽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게다가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는 새끼 고양이는 어미의 사정도 모르고 배 고프다 칭얼거린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아홉살 소녀는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느님, 너무 해요! 누가 하느님한테 기도를 하거나 뭘 빌어도 하느님은 신경도 안 쓰시죠?"
니나가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고양이가 누구한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왜 고양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해요? 하느님은 선하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아요! 거지 같은 하느님이라고요!"
...
"하느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더 드릴게요. 제발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세요."
...
이제 더는 못 참아요.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시라고 했죠? 지금부터 저는 하느님을 안 믿을 거예요!"
독 실한 기독교 신자라면 펄쩍 뛸 불경(?)스러운 말이 소녀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아이가 이제껏 알아 온 또한 믿어 온 '하느님'은 공정하고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하느님'은 어미 고양이를 살려달라는 니나의 요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어른이라면 말로는 반응을 요구할지라도 실제로는 그것이 실현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니나는 이제 아홉 살 어린이일 뿐이다. 어른들이 이제껏 설명해 온 자비로운 하느님을 믿어 왔으나, 니나는 이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즉 불신의 순간에 처했다.
의심은 자신을 괴롭게 한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이 정작 현실에서는 일그러지는 건 더더욱 괴롭다. 지진과 태풍으로 아무런 잘못 없는 이들이 죽어가는 현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보다 부덕하게 사는 사람들이 더 잘사는 현실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이든 그저 보편적인 세계이든 이것이 옳냐고 항변한다. 어른도 이럴지언대 아이라고 못할까? 외려 아이들은 더더욱 큰 혼란에 처하기 마련이다. 니나는 혼돈의 상태에서 신을 의심하고 절망하고 부정한다.

2.
새끼 고양이를 돌보겠다고 어미 고양이에게 약속한 니나는 어미 고양이가 끝내 죽자 집으로 돌아가나 어머니는 냉혹하게 고양이가 싫다 하신다.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니나는 집을 나가 무작정 폴란드로 향한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선하기는 하지만 니나를 이해 못하는 할머니, 니나를 이용해 도둑질을 하는 소년, 노래를 잘하는 걸인 할아버지, 니나를 유괴하려는 남자, 자기 잘못을 애써 외면하려는 이기적인 할아버지등 니나가 만나는 숱한 사람들은 의심과 혼돈에 둘러쌓인 니나에게 아무런 답도 내려주지 못하고 외려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가진 것 없는 가출 소녀 니나는 춥고 배고프다. 새끼 고양이 아하에게 먹일 우유를 달라 하는 니나에게 어른들은 처음에는 불쌍해하는 듯 대하지만, 니나와 아하에게 본질적으로는 관심이 없다. 그저 니나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어른의 입장에서 가출한 아이를 훈계할 뿐이다. 오히려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정치적 망명해 온 물루네만이 그나마 니나를 도와주고, 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것을을 설명해 주지만, 그네들은 독일 땅에서는 낯선 이방인이라 섣불리 니나를 대하다 추방당할 것을 걱정한다. 니나를 도와줄 사람, 정확히 어른은 아무도 없다. 니나는 춥고 어두운 길거리를 헤매며 불안과 의혹의 하루를 보낸다.
3.
니나가 마지막으로 만난 이는 아하의 어머 고양이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니나가 믿는) 돼지신을 그린 거리의 화가. "착한 일을 하면 상을 주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주고, 모든 사람들을 친절하게 보살펴 주고,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는" 산타클로스처럼 우리네 의식 속에서 박제화된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이 아닌 진짜 신, 인간신을 그려 달라는 니나에게 거리의 화가는 신의 존재 유무와 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신과 정의의 관계, 그리고 지금 니나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준 사건인 어미 고양이의 죽음을 니나 스스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대화로써 일러준다.
"어미 고양이가 혹은 사람이 자식만 남겨 두고 갑자기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고 치자. 이건 정의랑은 관계가 없어. 그런 일이 있으면 인간은 절망에 빠져서 왜 이런 일이 생겼을가,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묻곤 하지. 인간은 그 까닭을 모르고 누가 설명해 주지도 않아. 우리 인간은 신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없으니까. 우린 상황을 바꿀 수 없고 그저 이런 사실을 견디는 수밖에 없어."
자못 신과 정의의 관계를 허무적이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듯하지만, 거리의 화가는 밤하늘을 빛내는 별을 바라보며 니나에게 좀 더 너른 시선으로 우주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우리도 지금 저런 별에 앉아 있는 거야. 그것도 아주 아주 작은 별에. 말하자면 저기 있는 저 은하수 가운데 하나에.”
스프레이 화가가 안개처럼 보이는 별무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렇게 앉아 있는 동안 우리는 이 별을 타고 다른 별들 둘레를 도는 거지. 다른 별들은 또 다른 별 둘레를 돌고. 상상해 봐!”
니나는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중략)
“그래. 어지러울 수도 있어. 그래서 이 우주에 있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신이 만든 모든 것 가운데 인간이 가장 위대하다고 믿는 걸 거야.”
“우린 작은 먼지 알갱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말이에요.”
“하지만 거대한 설계도 속에 들어가 있는 존재지. 그러니까 꼭 있어야 하는 존재라고.”
(중략)
" 네가 잘 못 지내고, 추위에 떨고, 스스로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너를 좋아해 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 너는 한가운데에 있는 점이 돼. (중략) 그럼 넌 이 점이 되어 중심의 둘레를, 말하자면 신의 둘레를 돌게 되지."
"신이 한가운데에 있는 점이라고요?"
니나가 생각에 잠겨서 물었다.
"중심점이지. 그게 아니면 뭐겠니?"
스프레이 화가는 말했다.
"아하는 어디에 있어요?"
"내가 너를 아주 크게 그렸기 때문에 아하도 네 점에 들어갈 수 있어. 너희 엄마는 물론이고 네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도 다 들어갈 수 있어."
(중략)
" 넌 돼지신을 알아봤잖아. 그걸 알아본 사람은 너뿐이야. 그렇게 영리한 사람이라면 인간이 신을 인간과 다른 모습으로 상상할 수 없다는 것쯤은 이해하고도 남을 텐데. 말하자면 인간의 얼굴과 인간의 성품을 지닌 신을 상상하는 거지. 우리가 신이어야만 신을 정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러니까 정말 신다운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는 거야."
4.
동화는 어른들의 세계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어른들의 세계를 보자. 세상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픔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하지만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순간 그것은 남의 일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르면 몰랐지, 아픔과 슬픔을 아는 순간 함께 괴로워한다. 그리고 묻는다.
"왜 그(들)는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요?"
설명해 주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어른조차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된 인간 근원의 질문이다. 저자는 신의 존재, 정의, 약속과 책임, 생명 같은 다소 난해한 철학적 주제에 대해 아홉살 니나의 시선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니나가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대답으로써 차근차근 답을 내려 간다. 다소 숱한 등장인물들이 말한 것에 비하면 거리의 화가가 너무 많은 것을 한번에 말하는 느낌을 주긴 하지만, 저자는 도그마적인 '하느님'을 설명하는 데로부터 벗어나 인간 스스로가 신과 소통하면서 인간의 본질적인 의문을 스스로 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괴테가 말했듯 신을 통해 세상을 내면에서 결속시킬 수 있다.
니나처럼 아홉 살배기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그리 쉽지 않게 이야기하지만, 또한 그 아이 입장에서는 니나의 질문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을 내렸는지는 다소 의심이 가긴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빤한 정답을 내려주기보다는 니나의 여정을 독자가 함께 따라가며 자기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만들어 가는 데 있다. 사실 철학에는 애당초 정답이 없다. 사실 답이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저 철학에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며 서로 생각을 나누는 일련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이 스스로 "내가 만일 니나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이라는 가정을 제시하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답을 내리도록 이끄는, 이 책은 섣불리 철학적 주제에 섣부른 어른의 대답을 주입하기보다는 아이 스스로 답해 나가도록 일러주는 일종의 나침반 같은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동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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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고아 - 8점
모리 에토 지음, 고향옥 옮김/생각과느낌
 
짜릿한 이웃집 지붕 오르기
 
1.
내가 기억하는 첫 집이자 열네 살 때까지 살았던 집은 단층 혹은 이층 단독주택들이 밀집한 동네 한가운데 있었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 시 외곽에 위치한 중산층도 저소득층도 아닌 말 그대로 서민들이 주로 살던 신흥 주거지에, 일명 '집장사'들이 비슷한 설계도에 따라 집을 지어 수요자들에게 팔았던 집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기에 이웃한 집은 대개 집의 구조나 모양새가 비슷했다.  '국민학교' 시절 - 분명 초등학교라 해야 하지만 왠지 '국민학교'가 더 어울린다 - 성격상 동네 친구들과 몰려 노는 데 한계가 있었던 나는 책을 읽거나 몽상으로 부모님이 일하느라 계시지 않은 시간을 많이 때웠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뒷집 지붕에 올라가는 데 재미를 붙였다. 이웃한 바로 뒷집은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딱 붙어서 어린아이도 쉽게 집을 건너다닐 수 있었는데, 온전히 옥상으로만 된 우리 집과 달리 뒷집은 장독대 놓는 공간을 제외하곤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 나는 그 뒷집 기와가 덮인 지붕에 자주 올라가 어딘가 멀리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각종 담을 타고 옆집과 앞집을 가리지 않고 넘나들었고, 이따금 동네친구들까지 꾀어 옆집 안에 있는 공터에서 놀기까지 했다. 내게 그럼 담타기 혹은 지붕 올라가기는 넘는다는 희열감과 함께, 어딘가 멀리 본다는 기대감, 동네 누구보다 높은 데 선다는 우월감 같은 여러 복잡한 감정을 뒤섞은 묘한 정서를 가져다줬다.
 
2.
인쇄소를 운영하는 부모가 일이 많아 거의 둘만 지내다시피 하는 연년생 중학생 남매 요코와 린은 남의 집 지붕에 오르는 데 재미를 붙인다.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오르다 차츰 지붕 오르는 데 원칙을 세우고, 난이도를 높여 가며 슬슬 재미를 붙여 갔다. 부모의 실질적인 부재와 재미없는 학교 생활, 친구들 사이에 존재하는 따돌림에 이르기까지 내내 갑갑하게 때로는 우울하게 청소년 시기를 보내야 했던 남매에게 일탈이 주는 묘한 쾌감은 삶의 팍팍함을 날려보내는 에너자이저였다. 그리고 여기에 친구들로부터 은근히 따돌림당하던, 요꼬네 반 아야코가 함께한다. 이들에게 지붕을 오르는 행위는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탈 행위이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가 흔히 대중매체에서 접하는 흡연, 음주, 가출, 약물, 섹스 은 일반적인 범주에서는 다소 벗어난 다소 '얌전한' 일탈을 감행한다. 물론 남의 집 지붕에 집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오르는 행위는 가택침입죄에 해당하는 불법 행위이다. 아직 '성숙'되지 못한 중학생이기에 설사 이들을 교도소로 보낼 만한 건수는 아니라 해도 어른들, 에컨대 집주인이든 부모이든 하다못해 우연히 이들의 행동을 목격한 이웃의 어른들이 이러한 아이들의 불법 행위를 보면 길길이 날뛸 것이다.
 
만약 붙잡혔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밤중에 아무 볼일도 없이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간 것이다. 용서를 비는 일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고 울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색을 하고 놀이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아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요코는 이리 말하지만 이들은 차츰 지붕 오르는 일에 중독된다. 대부분의 일탈은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또는 호기심으로 시작되지만 이내 중독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모종의 질서와 어긋날 경우 발생하는 묘한 불협화음은 여느 스릴러 영화보다 짜릿한 재미를 선사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웃집의 담은 내게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출입구였으며 넘기 힘들수록 고단함이 가중되는 통과의례였다. 또한 그렇게 통과의례를 밟으며 오른 이웃집 지붕은 새로운 세계를 내다보는 전망대 내지는 갑갑한 현실과 동떨어진 나만의 해방구였다. 조심조심 기와를 밟을 때 발에 느껴지는 묘한 감촉과 뿌지직하는 소리 때문에 느낀 짜릿함은 그것의 덤이었다. 나 또한 담타기와 지붕 오르기에 중독됐었다.
 
3.
소설 속 아이들은 함석지붕을 잘못 디뎌 소리를 내 주인을 깨우긴 했지만 끝내 적발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창밖의 '등산객'을 요코네 반 왕따 키오스코가 맞닥뜨리면서 이들의 지붕 오르기는 위기에 봉착한다. 어른이 아닌 친구, 그것도 왕따 친구에게 적발된 이들은 친구를 자기네 패거리로 꾀어 내는 수법으로 자신들의 불법 행위를 만회하려 한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거나 재미있으면 놀이가 되는 거라고!"
"지붕에 올라가는 게 재미있니?"
"글쎄 재미있다니까!"
"이해가 안 가."
절망, 내가 넌덜머리가 나서 발밑의 낙엽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옆에서 린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올라가 보면 알아."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극히 소심하기 일쑤이고, 키오스크 또한 그렇다. 비록 일탈을 위한 불법 행위일지라도 아이들에게는 "뭔가를 시험한다든가, 극복한다든가, 그런 거창한" 행위가 아닌 그냥 놀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세기말의 우울함을 떨치지 못하던 왕따 소년 키오스코 - 그의 본명은 가즈오이지만 역내 매점인 키오스크처럼 아이들에게 이용만 당하다 보니 어느덧 별명으로 자리 잡았다 - 는 일탈과 안주, 스릴과 공포 속에서 지붕 오르기를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키오스크는 등교를 3주 넘게 거부하다 어느 날에는 자살하다 실패했다는 소문이 돈다.
 
4.
키오스크를 포함해 네 명의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지붕에 오르던 날, 키오스크는 인도로 떠나 버린 전임 담임교사인 스미레가 한 말을 다른 이들에게 읊어 준다.
 
"우리는 모두 우주의 고아이기 때문에, 따로따로 태어나서 따로다로 죽어 가는 고아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반짝반짝 빛나지 않으면 우주의 어둠 속으로 삼켜져 버린대."
 
지붕에 오르는 '비행청소년'을 다루는지라 자못 뜬금없던 소설의 제목인 '우주의 고아'는 누구나 힘들 때 헤쳐 나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이들은 갑갑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려 기꺼이 불법 행위를 감행했다. 또한 자살하려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친구의 오해를 풀어주려 기꺼이 자신들의 행동을 고백하려 한다. 직장, 돈, 연애 같은 어른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오리 아줌마와 대화를 나누며 위안을 얻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반면 직접적으로 뒷집 지붕을 비롯해 이웃집 담을 넘던 내 행위는 적발되지는 않았더 하더라도 이웃들이 그것을 몰랐을까? 아마도 부모님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압박을 넣었을 게다. 그래서였는지 어머니에게 혼난 기억도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즉 내 스스로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인지했더라도 부조화를 일으키며 내 행동에 제동을 걸지 못했고, 결국 나는 그저 일탈을 감행한 문제아가 돼 어른들의 제재를 받은 수동적인 존재가 돼 버렸다. 반면 소설의 네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혼날 것을 각오하고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한다.
 
5.
 이 소설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성장소설의 일반적인 공식과 관습을 충실히 이행한다. 이 시대 아이들이 겪는 성장통을 지나치게 극단적인 상황을 부각시키며 풀어가는 방식 대신 소소한 일탈을 보여 줌으로써 무겁지 않게 풀어간다. 때문에 오늘날 아이들에 당면한 왕따 같은 심각한 문제도 자못 가볍게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갈등상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데다 너무나 쉽게 해결하는 인상을 주어 소설을 읽는 맛인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데는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껏 일탈한다는 게 남의 집 지붕 오르는 거라는 아이들의 귀여움, 그리고 어떻게든 문제상황을 스스로 해결할 것을 선포하는 외유내강적인 그네들의 꿋꿋함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알라딘 이 주의 TTB리뷰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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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 8점
이택광 지음/아트북스 
그림을 읽는다는 것은 시대를 읽는 것이다

1.
많은 이들에게 그림은 '보는 것'이겠지만, 그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면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는 것'으로 대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림을 단순히 보지 않고 읽어야 한다. '그림을 읽는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그림이라는 하나의 텍스트, 즉 원전 속에 파묻혀 있는 콘텍스트, 즉 맥락을 파악한다는 말이다.
본디 '맥락'은 "사물 따위가 서로 이어져 있는 관계나 연관"을 뜻하는데, 대체로 시대적 배경, 사상적 조류, 창작자(군)의 의도와 심리상태 같은 다양한 무형의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림을 읽으려면 그림을 둘러싼 혹은 그림 안에 담겨 있는 여러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그림을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수동적 행위가 아닌 그림을 세상의 움직임과 연계시켜 그 속에서 그림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 파악하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행위이다.

2.
근대 미술 사조 중에서 '인상파'라는 말을 처음으로 등장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끌로드 모네의 <인상-해돋이>를 보자. 붉은 해가 뜨는 새벽녘의 바닷가 풍경을 캔버스에 유채 물감으로 흐릿하게 칠해 그린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해돋이 때 화가가 느낀 인상, 즉 사물과 빛의 색감을 화가 스스로 받아들인 감흥을 그림으로 옮긴 것인데,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의 저자 이택광은 이 그림은 노동 혹은 노동자의 삶을 그렸다고 단언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림의 왼쪽 상단부의 흐릿하게 그려진 푸릇푸릇하게 삐죽 솟은 형상은 부둣가의 크레인이라 말한다. 저자가 말하기 전에는 그것이 크레인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실 그것이 크레인이 아니라 부둣가에 정박한 배의 돛이라 해도 상관없다. 또한 화가인 모네 스스로 노동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정말로 부둣가에서 맞은 해돋이의 인상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림이라는 텍스트에 한정해 그림을 보면 누구나 능히 해 볼 만한 감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택광은 모네가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 모네가 미술계 안에서 취했던 행동과 가졌던 사상 같은 일련의 맥락을 파악할 것을 주문한다.
한창 인상파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19세기 말은 격동의 시기였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등이 폭풍우처럼 밀고 지나간 시기 정치사상은 물론 미술사조에 이르기까지 백화쟁명의 시기였고, 인상파는 그중 하나의 흐름이었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뭉뚱그려서 편의상 인상주의자들 또는 인상파라 불려서 그렇지, 인상파 화가들을 하나로 묶을 도리는 없"는지도 모른다. 인상파 안에는 노동자들의 자치정부 파리코뮨을 찬양한 좌파에서부터 파리코뮨의 가담자들을 80년 광주의 시민들처럼 밀어 버린 공화 정부를 지지하는 우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런데 끌로드 모네는 이들 중에서 좌파 내지는 중간 즈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였던 만큼 아무리 자연을 주로 그린 화가라 해도 그의 그림 속에는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면서 '세계'를 만들어 가는 노동자의 애환이 담겨 있다는 뜻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3.
물론 모네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오바'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근대 시기 그림 속에 담긴 맥락을 파악하는, 즉 그림을 읽는 행위를 설명하는 하나의 실례일 뿐이다. 자, 이 책의 표지에 쓰인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그린 <유럽의 다리>를 보자. 저자는 멀리서 솟아오르는 수증기, 다리 바깥을 바라보는 행인의 시선, 길을 걷는 두 남녀의 행색, 그리고 하다못해 강아지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 보면서 익숙해 보이는 그림을 해석하며, 아울러 이 그림이 지닌 맥락을 이야기한다.
결론은 근대의 산물 중 하나인 기차의 등장이다. 익히 알려졌듯 기차는 근대를 상징하는 지표이다. 당시 그 어떤 교통/운송수단보다 빨리 가면서 공간은 물론 시간을 압축해 버린 기차는 속도와 생산성 지향의 근대성을 무엇보다 대변하는 핵심 지표이다. 그런 기차를 구경하는 평범한 파리 시민의 모습을 그림에 담으면서 카유보트는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인 소비 지향의 중산계급의 도래를 이야기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우리가 보기에 화가는 일상적인 풍경을 본 대로 그렸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당시의 세계를 오늘에 투영하며 그 세계를 읽어야 한다. 저자는 카유보트는 과학에 근거한 세계관을 가진 이로 평가한다. 당시 인상파를 위시한 화가들에게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은 중세기 종말로 설명됐던 유토피아를 자신들이 사는 현재를 좀 더 풍요롭고 다채롭게 변화시키는 하나의 지향점으로 여겼다고 한다. 따라서 그림 속의 기차를 구경하는 파리 시민은 새로운 변화를 눈으로 구경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하는 만인 중 일인이라는 말이다.

4.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을 보면 이러한 인상파들이 근대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또 알 수 있다. 파리 근교의 한적한 지역인 아르장튀유를 그린 여러 그림을 보면 배경인 물빛은 쪽빛이다. 이는 파리 코뮨 이후 도심 재정비 때문에 근교로 쫓겨난 염색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의 색깔이다. 아르장튀유는 이런 염색공장의 집결지였고 그 일대 강물은 폐수로 오염됐으며 하늘로는 매연이 뿜어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에 개의치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보트놀이를 즐긴다. 마네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저자는 "마네에게 아르장퇴유는 여가를 즐기기 위한 곳이며 동시에 근대의 산업화가 자연을 침범해 오는 모순의 공간"이라 말한다. 마네는 강이 더럽고 냄새날지언정 놀이를 즐겨야 하는 근대인을 그려 낸 것이라 말한다. 이는 매음녀의 누드와 흑인 하녀를 도발적으로 그려 낸 <올랭피아>처럼 지금 화가가 처한 시대의 모습을 금기를 넘어 현상 그 자체를 사실적으로 그려 낸 행위라는 것이다. <폴리베르제르의 주점>이나 <풀밭 위의 점심>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같은 인상파라 불리었던 모네는 똑같은 아르장튀유의 풍경을 그리면서 마네와 반대로 공장의 매연이나 폐수로 오염된 강물을 제거한 채 근대의 산업화가 가져다준 풍경을 그의 그림에서 지워 버린다. 왜 그랬을까?
저자는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을 빌려 "모네는 마네보다 더 강렬한 '유토피아 충동'을 갖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자연과 대립되는 것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완전히 소거해 버림으로써, 그 경험 자체를 아예 그림의 제작 과정에서 분리"해 회화에 대한 인습과 규정을 부정하고, 기법과 전통을 분리함으로써 실험과 혁신에 대한 '자의식'을 색채에 기탁해 표현했다고 한다. 마네와 모네의 이런 대립된 화풍은 예술가가 현실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고 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마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파리의 중간계급은 모순된 현실을 폐수 위에서 보트놀이를 함으로써 모르쇠하며 현실을 냉담하게 외면한다. 반면 모네는 아예 현실의 모순을 그림 속에서 드러내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풍경, 허구적인 자연 풍경으로 바꿔치기 했다. 이는 열정적 공화주의 지지자의 대열에 서 있기도 한 모네의 모순적인 저항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마땅히 현실의 모순을 사실 그대로 하다못해 에둘러서라도 담아야 한다는 기존의 관습을 거부한 예술가였다. 그와 반대로 노동계급의 삶과 근대의 파괴적 풍경을 정면으로 그려 낸 마네는 노동의 상품이 돼 버린 현실을 그대로 그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상품'을 그려 낸 이로 평가된다.

5.
우리는 이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읽으면서' 그들의 삶과 그림 속에 투영된 근대의 모습, 그리고 근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읽을 수 있다. 단순히 그림을 미적 측면에 한정돼 '본다'면 화가의 사상과 시대적 배경 등까지 알아야 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미술을 좋아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따라서 평범한 시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시대를 읽어야 한다. 과거를 들여다봄으로써 현실을 읽고 나아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해야 할 과제이다. 물론 이는 먹고살기에 바쁜 세상에 밥 먹고 할 짓 없어 궤변을 늘어놓는 행위로 치부된 지 오래됐다. 하지만 밥만 먹고 사는 삶, 그것이 아름다운가? 소수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것도 사전에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는) 미술관에 고가의 그림을 걸어놓고 잰 체 하는 것보다는 인터넷에 굴러다니는 조막만한 사이즈의 디지털 코드로 된 그림을 '읽음'으로써 자신을 넘어 인류가 닥칠 미래를 조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예술을 사랑하는 행위가 아닐까?


잡설
글에 거론된 그림의 이미지를 찾아 붙일까 하다가 너무 '구차나' 포기했다. 언젠가는 할지도 모르나 그럴 확률은 테제가 밤에 한 번도 안 깰 확률과 비슷하다. 또한 이 책은 인상파 이외에 라파엘전파를 아울러 다루나 그들을 다룬 부분은 솔직히 잘 이해가 안 간다. 물론 인상파 부분이 다 이해 가는 것도 아니지만, 인상파는 그동안 들은 게 쬐금이나마 있어 선무당이 돼 작두 타 봤다. 그다지 책 읽을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 처했다가 마침 울산에 결혼식이 있어 장거리 여행을 하는 바람에 책 한 권 읽을 시간, 그리고 팀장이 외근이라 마음놓고 블로그질할 시간이 있어 리뷰를 간만에 써 봤다. 이런 게 낙이라면 낙인 게다.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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