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우리말 달인 - 8점
엄민용 지음/다산초당(다산북스)

엄민용 한국어문교열기자협의회 부회장이 쓴 <건방진 우리말 달인>은 다소 반말투로 건방져 보이긴 하지만 그동안 일간지 교열기자를 하면서 배운 교열의 스킬을 유감없이 내뿜는다. 그것의 주 대상은 국어의 금과옥조라 일컬어지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과 국어 교과서이다. 물론 우리네 언중이 자주 혼동하고 틀리기 쉬운 일반적인 맞춤법과 띄어쓰기, 외래어표기법에 대한 안내는 기본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잘못된 사례의 나열이거나 순수 우리말 사용이라는 취지 아래 그렇게 쓰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부터 불러일으키는 데 충실했다. 그에 이 책은 조금 가볍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화체로 사례 하나하나를 코믹한 일러스트와 함께  자세하게 설명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은 국립국어원의 어문규정대로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발음 나는 대로 생각 내는 대로 말을 하고 글을 쓴다. 점점 더 사람들은 자신이 쓰는 말과 글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를 검증하고 부족하거나 잘 모르는 점을 배우려기보다는 뭐 그런 게 중요하냐 내지는 다들 그렇게 쓰는데 왜 피곤하게 따지냐, 라며 배움을 회피하고 유류를 수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는 언어의 고착화이다. 사회가 변해 가면서 언어 또한 변하기 마련이고, 국어사전과 어문규정은 그를 반영해 가면서 나름 지표를 세워야 하는데, 너무나 급격하게 그리고 잘못되게 언어가 바뀌는 통에 사전과 규정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더더욱 예외가 난무해 원칙이 힘을 얻는 지경에 처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일반적인 언중도 아닌 그렇다고 국어학자도 아닌 일종의 경계선인 일간지 교열기자 입장에서 잘못된 언어 사용의 예를 짚어내고 또한 잘못된 규정 또한 짚어내려 한다. 그의 고민은 변화된 언중의 언어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규정 사이의 간극이다. 때로는 사투리가 때로는 북한어가 때로는 외래어가 널리 사용되면서 표준어와 동격 혹은 그 이상으로 쓰이는 판에 한 가지 표준어만 고집하는 국립국어원의 사전 표기에 대해 그는 자주 지적한다. 예컨데 우리가 자주 쓰는 까탈스럽다, 또아리, 개기다, 나래, 과실주 등은 어법상으로 큰 문제가 없음에도 표준어로 인정받지 못한다. 또한 뜨락, 연신 같은 말도 북한어라는 이름으로 잘못이라 규정받는다. 그러나 그는 교열기자의 입장에서 악법도 법이라고 되뇐다. 일단 사회적으로 정해진 것은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는 약속을 지켜면서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데 애써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국립국어원에 펴낸 표준국어대사전과 교육부가 펴내는 국정 국어교과서의 잘못된 표기와 교조적인 규정 적용에 대해서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사실 국어사전 또한 인간이 만드는 것이기에 실수도 많고 오류도 적잖이 있다. 간단하지만 치명적인 오자는 물론, 일률적이지 않는 규정 적용, 언중과 괴리된 표제어 등재, 어색한 순화어 적용 등 숫하게 지적된다. 또한 심심하면 외래어표기법을 바꾸는 관계기관도 지적 대상이다. 물론 언중에게서 관습화된 표현을 이제는 사전에 등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요새 누가 '자장면'이라고 하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언중 대다수가 쓰는 '맨날'을 써야 할지, 어원의 의미 형태소가 분명한 사전에 등재된 '만날'을 써야 할 것인지. 이때 분명 경계할 것은 규정에 얽매인 언어교조주의내지는 언어순혈주의이며, 또한 언중이 쓰면 다 인정해야 한다는 언중추수주의이다. 그 지점에서 저자는 앞서 말했듯 악법도 법임을 자인한다. 그것은 정확한 말을 쓰되 사회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의 선에 근거한다. 책의 뒷표지에는 이런 우리네 언어현상에 대해 주시경 선생의 말을 빌어 의지를 밝히고 있다.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

알라딘 이 주의 TTB리뷰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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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 8점
조윤정 지음, 김정열 사진/대원사

모 시사주간지에 믹스커피를 끊고 원두커피만 마시는 사람으로 소개되긴 했지만, 실제로 원두만 마시기 시작한 건 아직 만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이전 직장 - 지난해 부로 퇴사했으니 이전 직장이 맞다! - 으로 옮기면서 상사가 드립커피 마니아였고, 사무실이 있던 건물 옆 건물에는 선배가 하는 커피하우스 - 몇 차례 이야기한 적 있는 지금은 너무 유명해진 커피하우스 - 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연히 드립커피를 접했고, 이내 그 매력에 빠져들어 필요한 장비를 갖추고 어깨 너머로 배운 지식으로 커피를 내려 마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원두커피를 마시는 데 불을 붙인 것은 직장과 유관단체에서 실시한 커피강좌에 반강제적으로 수강을 하면서부터이다.

당시 강좌는 광화문에 자리한 커피하우스 '커피스트'에서 이루어졌다. 8주 동안 속성이긴 하지만 커피의 기본 배경지식과 핸드드립과 에스프레소 추출법, 베리에이션 조리법 등 배워야 할 것은 그래도 고루 배웠다. 그리고 그 강좌는 커피스트의 조윤정 대표가 직접 가르쳤기에 결과적으로 그는 내 커피사부이다. 해가 지나면서 인터넷서점에서 사부가 쓴 책이 나온다는 광고를 보고선 사야겠다 싶었는데 구입하기에 앞서 실장이 증정받은 책을 보니 이래저래 짜임새 있게 구성돼 있어 반드시 사야 할 책으로 선정해 이달의 구입도서로 구매했다.

(!! 여기서부터는 알라딘 리뷰로 쓰임)
오늘 책을 받아들고서 대략적으로 훑어 보니 대체로 원두커피를 처음 마셔 보는 초급자보다는 초중급자에서 중급자 정도가 읽으면 좋은 책이다 싶다. 커피의 역사와 종류, 재배과정 같은 기초 배경지식과 핸드드립/에스프레소 추출법과 베리에이션 조리법 등이 짜임새 있게 실려 있어 초보자들이 보고선 따라해 봐도 무난하지만, 로스팅과 블렌딩, 테이스팅처럼 어느 정도 원두커피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돼 있어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지 않은 중급 단계 진출자들이 읽으면 좋도록 구성돼 있다. 뭐 이 책을 살 정도의 사람이라면 대개 이 단계에 속하는 이들이겠지만.

이 책은 전체적으로 커피하우스를 직접 운영하고 여러 곳에서 전문강좌를 진행하는 커피전문가가 쓴 책답게 구성이나 설명은 충실하다. 강좌의 교육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하면 될 듯싶다. 또한 커피 전문 사진가가 찍은 사진 재료도 매우 충실하다. 핸드피킹 중에 골라낸 결점두의 사진이라든지 로스팅한 원두의 배전 정도, 그라인딩한 원두의 굵기를 단계별로 찍은 사진은 굳이 별도의 전문강좌를 듣지 않아도 중급 단계 정도 수준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기에 충분하다.

다만 이 책은 커피 생두를 구매해 로스팅하고 블렌딩한 뒤 추출해 마시는 단계에 충실한 원두커피 음용 매뉴얼에 그치는 한계가 있다. 말하자면 철저한 실용서로서 역할을 다한다는 것인데, 커피의 역사적 문화적 접근에는 이르지 못한 채 관련 부분은 기본적인 정보 전달이나 서문 기입 정도에 그친다는 아쉬움을 준다. 커피를 잘 만들어 마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커피가 가져다주는 우리 현실의 문제 역시 중요하다. 커피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도착하는지, 커피가 대중화되면서 변화된 우리의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만드는 법 만큼 쓰여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저자의 다음 책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쓰일 거라는 광고를 보면  다음 책을 기다리기에 앞서 커피부터 잘 만들어 마시는 데 충실하는 게 이 책이 목적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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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기행 - 8점
박종만 지음/효형출판

부산 가는 고속전철 안에서 박종만의 <커피기행>을 꺼내들다가 문득 생각났다. '아차차 커피 안 사고 탔구나.' 모 시사주간지에서 믹스커피를 끊고 원두커피만 마시는 커피광으로 취재원이 될 만큼 커피를 좋아하는 내게 약 세 시간 동안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는 것은 형벌에 가깝다. 그러나 어쩌겠나? 이미 기차는 떠나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세 시간 동안 커피를 참는 것, 아니면 맛대가리 없는 커피를 3천 원이나 주고 사 마시는 것이다. 원두커피라고 해서 팔지만, 그 커피는 500원 넣고 먹는 사무실의 유사-에스프페소 자판기보다 맛이 떨어진다. 처음에는 좀 참다가 부산역에 내려 커피를 사 마시자 하고 책을 다시 펴들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커피 생각만 더 간절해졌다. 결국 나는 항복했다.

박종만의 이력이야 커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으니 더 이야기하는 것은 사족이다. 하지만 그가 커피의 발생지부터 전파 경로를 따라간다고 떠난 커피로드 기행은 제법 흥미로운 일이다. 커피가 처음 발견됐다는 에티오피아의 짐마에서 출발해(여행 경로상 케냐와 탄자니아를 먼저 들렀지만 애초 이 기행의 시발점은 에티오피아부터이다.) 아비시니아고원을 지나 지부티에서 홍해를 건넌 커피는 예멘의 모카항에서 터키의 이스탄불을 거쳐 유럽으로 전파됐다. 저자는 이 과정을 약탈당하거나 입국을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차를 빌리고 얻어타면서 갖은 고생을 다한다.

애초 이 기행은 험난함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단 돈 백 원부터 오육천 원 내면 편하게 또는 우아하게 그윽한 향과 맛을 즐길 수 있는 커피라는 품이 아닌, 아프리카인들 삶 속에 뿌리 깊게 내린 부나(에티오피아에서 커피를 부르는 말)을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익히 알다시피 커피는 카파라고 불렸던 짐마에서 칼디라는 소년이 처음 발견한 뒤 이슬람을 거쳐 유럽의 유입됐다. 하지만 칼디가 발견한 커피와 유럽에서 음료로 만들어 준 커피는 분명 다르다. 이는 단순히 커피를 끓여 마시는 방식이나 첨가하는 재료가 달라서가 아니다. 커피는 그것을 마시는 곳마다 다른 문화양식을 만들어 냈다. 박종만은 그러한 모습을 제대로 포착해 냈다.

흔히 스타벅스 카페라테 한 잔을 팔 때 그것에 들어간 원두를 재배한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단돈 50원 정도라는 말이 있다. 박종만을 비롯한 커피탐험대는 바로 그 모습을 접한다.

"케냐 농부들은 아침 8시에 나와서 저녁 6시 반까지 일하지만, 대우는 썩 좋지 않다. 하루 100케냐실링의 돈을 받는데, 79케냐실링이 약 1달러이므로 우리 돈 1,000원이 조금 넘는 셈이다. ... 이마저 벌지 않으면 구걸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커피는 이들에게 삶의 버팀목이나 다름없다."(39쪽)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원두를 사거나, 생두를 사 로스팅을 한 뒤 추출하고 마시는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파종, 재배, 수확, 제조, 집산/등급화, 수출/거래, 유통/제조, 굽기/섞기, 분쇄/추출, 음용의 10단계를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앞의 7단계는 생략돼 있다. 하지만 이 7단계는 커피로 먹고사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삶 그 자체이다.

커피나무는 기후나 토양에 민감하다. 일조량과 강우량에 따라, 가지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커피나무는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게다가 이런 재배는 일일이 사람 손을 타야 한다. 게다가 고도의 집중력과 기술이 요구된다. 커피열매의 과육 부분을 제거해 이른바 생두를 뽑아내는데는 그래도 기계화가 돼 있으나 모든 농장이 기계화되지는 않았다. 아프리카의 만성적인 물 부족은 함부로 기계를 돌릴 수 없어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말리고 벗겨내고 골라내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그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아주 일부분이다. 그나마도 먹고살으려 아프리카인들은 오늘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

저자가 또 하나 이 기행에서 천착하는 것은 커피를 음용하는 문화이다. 세계대전 와중에 만들어진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던 문화는 이제 이탈리아에서 발원한 에스프레소 방식으로 추출해 마시는 방식으로 다변화됐다. 하지만 이 모두는 서구의 문화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이 커피일 줄 안다. 신선한 원두를 스트레이트로 혹은 잘 블렌딩된 것을 맛과 향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으로 추출해 여유롭게 마시는 것. 이것은 유럽식 커피 문화일 뿐이다. 아프리카, 정확히는 커피를 재배해 먹고사는 사람들에는 그런 커피는 없다.

아프리카인들은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 궁금해한 탐험대는 한 농가에서 커피를 끓여달라고 주문한다. 농가의 한 아주머니는 어둡고 좁은 부엌에서 흙탕물을 아궁이에서 끓인 뒤 언제 사뒀는지도 모르는 곱게 갈린 커피가루를 물의 양보다 적은 분량을 한웅큼 넣는다. 거기에 정제되지 않은 설탕을 쏟아붓고는 잔이라고 할 수 없는 그릇에 담아 내놓는다. 하지만 이 커피를 마시려 동네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커피는 비록 손수 재배할지라도 쉬이 마실 수 없는 귀한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은 생강이나 약재를 듬뿍 넣어 커피를 기호식품이 아닌 약으로 마신다. 또한 에티오피아인들은 복잡하면서도 고단한 과정을 거치며 커피 세레모니를 진행한다. 이는 손님에게 음료를 대접하는 것을 넘어 손님을 맞는 하나의 의식이다. 이렇듯 아프리카인들의 커피 문화는 서구의 그것과 무척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원두의 신선도나 추출방식 등을 이야기하며 '틀리다'고 말한다. 그렇게 보면 설탕이  듬뿍 든 달짝지근한 다방커피는 서구와 다른 한국식 커피 문화일 게다. 커피의 맛과 향을 살리지 못했다고 말할지언정 그것이 잘못된 커피 음용 방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또한 저자는 에티오피아의 분나에 초점을 맞춘다. 앞서 말했듯 분나 혹은 분나는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를 부르는 말이다. 짐마의 옛 이름 카파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지만 커피의 고향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커피를 반드시 분나라고 부른다. 물론 이렇다 해서 전 세계에 통용되는 커피를 분나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김치와 기무치, 인삼과 진셍을 분나와 커피에 오버랩시킨다. 무엇이 옳은 것일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이전에 적어도 분나가 지니는 의미를 우리는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저자와 커피탐험대는 커피 그 자체를 넘어 아프리카땅에서 커피의 기원과 그것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문화를 탐방한다. 이 기행에는 일반적으로 커피가 가져다주는 낭만적인 면모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저 커피를 수입해 자기네들 방식으로 가공해 하나의 그들만의 문화로 만들어 낸 서구의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 서구의 커피 문화는 전 세계에 펼쳐졌다.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는 서구식 커피하우스가 등장하고 처음으로 바리스타 경연대회가 열렸다. 커피농장의 고단한 삶 속에서는 아프리카인들의 커피 문화가 남아 있다고 하지만, 그들 또한 값싼 로부스타종으로 만들어진 인스턴트커피를 사 마실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들만의 소중한 커피 문화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불행한 변화를 세계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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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날들의 철학 - 8점
베르트랑 베르줄리 지음, 성귀수 옮김/개마고원

이 리뷰는 알라딘 서평단으로 선정돼 작성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존재한다. 누구나 기쁨을 생각하는 것은 쉽게 편하게 여기지만, 슬픔은 절래 손을 젓기 일쑤다. 그런데 살다 보면 우리는 기쁨보다는 슬픔을 더 많이 접한다. 오늘 하루만 봐도 우리는 출근하기 싫어하며, 집안 살림하기를 힘들어하며, 재미없는 TV 프로그램에 짜증을 내며, 인터넷 답글에 격분한다.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더 슬픔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기 십상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세상은 얼마든 즐거울 수 있다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것은 우리네 인생에서 잘 포장돼 진열장에 놓인 비싼 케이크 같은 것이다.

실제로 철학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고 겪는 부정적인 것을 들여다보는 데서 그 의미를 지녀 왔다. 인류 문명이 번영할 때보다 혼란과 파괴가 준동하는 데서 철학은 자신의 임무를 시작한다. 예컨대 ‘이놈의 세상은 왜 이리 각박하단 말인가’라는 질문에서 철학자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무관심과 탐욕을 논파해 왔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의 이면에 잠복해 있는 부정의 근원을 탐구하는 인간 정신의 파수대이다. 그런 철학은 당연히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슬픔 또한 들여다봐야 한다. 무엇이 인간을 이토록 괴롭히는가? 그런데 그것은 왜 인간을 괴롭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간은 즐겁고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바로 철학의 존재 목적 그 자체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슬픔의 요소 하나하나에 돋보기를 가져다 든다. 물론 메스를 들 목적은 아니다. 인간의 정신이란 게 그리 후딱 제거하거나 바로 잡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저자는 생각을 한다. 그 슬픔의 근원이 무엇이며, 무엇과 연관돼 있으며, 그것을 인간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섬섬히 들여다보면서 슬픔의 의미를 끄집어낸다. 저자가 다루는 슬픔의 주제는 다양하다. 시험, 시간, 질병, 부당함, 죽음, 절망, 비극, 악, 소외, 고통…. 하나같이 우리 인간들의 정신에 잠복하면서 우리의 영혼을 흔드는 것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섣불리 이것을 나쁘다거나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다 존재하는 이유가 따로 있으며, 인간은 그것이 품고 있는 나름의 의미를 이해하고 담담히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힘겨움에 쉽사리 굴복하기에 슬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철학함을 통해 우리를 괴롭히는 슬픔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고 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다양하면서도 병렬적이라 목차에서 읽고픈 마음이 든 주제라면 무엇이든 하나 펴 보고 읽어 나가면 된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이야기하는 슬픔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식으로 자리 매김을 다시 하느냐이다. 자, 책을 펴고서 마음이 동하는 것 하나를 읽어 보자. 가령 과거에 집착하느라 힘든 이는 150쪽의 〈후회에 관하여〉를 펴 보면 된다. 저자는 글 초반에서 ‘후회’와 ‘미련’을 구분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전자는 가책이라는 방식으로 우리를 도덕과 대면시키는 반면, 후자는 회상이라는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시간과 대면하도록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둘을 구분하기보다는 혼동한다. 그런데 그 혼동의 결과는 자못 심각하다. 어떤 일을 다시 행하기 원치 않는다는 미명 아래 우리는 과거의 행위 모두를 지워 버리려 한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저자는 “우리는 우리가 경험해 온 것의 총체”라고 말한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미련과 후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경험해 온 것의 누적값인 자기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신의 삶을 완성해 간다. 다시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 다시 해 보면서,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을 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완성해 간다. 저자는 여기서 나아가 용서와 오만, 양심과 가책을 이야기하며 용서를 “참다운 후회와 회한을 이끌어 내는 자세”라며, 잘못에 대한 책임 회피가 아닌 일종의 투쟁에 동참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그 투쟁은 슬픔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 “명징한 의식과 단순 명료한 현존성의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저자가 다른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이와 대동소이하다. 저자는 말한다. “삶 속에는 슬픈 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해명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런 날들의 존재를 가릴 수 있다. 반면 그것에 함몰돼 자신을 불행의 늪으로 내몰 수도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단호히 말한다.
“슬픈 날들이란 하나의 숙명이 아니다. 그것들은 미처 체험되지 못한 삶을 표현할 때 드러나는 우리의 무지와 한계의 결과일 뿐이다. 그 점을 이해하는 즉시 슬픈 건 아무것도 없게 된다. 슬픔 그 자체조차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슬픔 속에는 아직 뭐라 말할 수 없는 미래의 삶을 향한 모색이 담겨 있다.”
이러한 저자의 말은 자못 높은 곳에서 삶을 관조하는 듯한 빤한 경구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 자체를 수동적으로 바라볼 때, 정확히는 체념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다. 삶의 한 부분으로서 슬픔은 늘 우리와 함께 있다. 저자가 이런 슬픔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는 태도이며, 동시에 그것을 해명하는 일이다.

이 책은 ‘차 한 잔과 함께하는 철학 에세이’라는 제목을 단 ‘포즈필로’ 시리즈 중 하나이다. ‘차 한 잔과 함께한다’는 말에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접하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철학하기를 시도한다는 말일 게다.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와인, 쇼핑, 걷기 같은 역시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한다. 시리즈의 다른 책보다는 자못 무거워 보이는 주제를 달았지만, 이 책은 앞서 말했듯 슬픔이라는 타이틀을 달아 조금은 무거워 보이지만, 우리가 하루에도 여러 번씩 내뱉는 일상의 개념 하나하나를 잡고 철학하기를 시도한다. 물론 이 책 한 권 읽는다고 철학하기가 일상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철학이라는 게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어려운 개념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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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 10점
장 크리스토프 빅토르 지음, 김희균 옮김/책과함께

제러미 블랙이 쓴 《지도, 권력의 얼굴》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의 요지는 권력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도모할 목적으로 지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블랙이 “지도는 권력의 얼굴”이라 칭했듯, 지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세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게 아니다. 제국주의 시대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착취할 목적으로 자원 생산지를 지도에 표기했고, 냉전 시기에는 서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할 목적으로 현실세계를 교묘히 왜곡해 지도를 그렸다. 《지도, 권력의 얼굴》이 ‘지도는 정치적이다’라는 명제를 이론화해 설명한 원론이라면,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은 각 국가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그에 따른 권력 구도가 어떤 식으로 지도상에 드러나는지를 충분한 사례로 증명하는 각론 성격의 책이다.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의 1부인 〈지정학 지도〉에서는 세상을 유럽, 미국,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로 나누고 그 속에서 지리가 정치와 경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지도로 설명한다. 연일 자살폭탄테러로 끔찍한 참변을 겪고 있는 팔레스타인. 웬만한 독자들이라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왜 이토록 참혹한 분쟁을 벌이고 있는지 익히 들어서 알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나쁜 놈이다’ ‘영국의 간교한 식민지 정책 때문이다’로만 이해하면 반만 아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예루살렘 지도를 통해 팔레스타인 원주민들과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어떻게 뒤섞여 있는지, 이스라엘이 어떤 식으로 장벽을 설치해 팔레스타인을 갈라놓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내 보인다. 예루살렘만 보더라도 이곳은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세 종교의 성지이며, 여기에 아르메니아인 구역까지 자리 잡은 아주 복잡한 성격의 도시이다. 서로 이곳만큼은 지켜 낼 필요가 있으니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렇듯 이 책은 현실 지리 속에 숨겨진 지정학적 의미를 하나하나 짚어 준다.

한편 2부인 〈다가올 세계〉에서는 오늘의 세계가 직면한 다양한 위기, 특히 국가 간 분쟁과 지구온난화나 식량부족으로 불안한 세계경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석유는 물론이고 물과 식량 자원이 어떻게 특정 국가에 편중됐는지, 각종 사망률 편차를 통해 건강의 불평등이 세계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사막화로 인해 지구상의 산림이 얼마나 줄어들고 있는지 같은 환경생태문제를 다양한 지도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이끈다.

이 책을 화려하고 다양한 지도가 많이 들어간 지리부도쯤으로 여기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지도를 통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읽을  것을 종용하는 ‘정치지리의 세계사’ 책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도가 현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라고 책표지에 적힌 문구를 다시 살펴보자. 그리고 지도에 담긴 현실의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용솟음치는 애국심에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독도와 동해 혹은 다케시마와 일본해라는 용어의 차이가 어떤 식으로 세계인들에게 이해되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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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8점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이제이북스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한국어의 사용자는 대략 7,500만 명으로 세계에서 열두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라는 사실을 들어봤는가? 프랑스어보다 사용자 수가 많다고 하니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진다. 하지만 한국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언어 5,000여종 중에서 하나일 뿐이다. 한국어를 포함한 상위 15개 언어의 사용자 비중은 47.5% 정도이지만, 나머지 언어는 대부분 사용자 수가 만 명 이하이다. 그런데 전체 언어의 60%는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으며, 지난 500년 동안 전 세계 언어의 절반이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죽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의 저자들은 언어를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닌 인식의 틀이며, 또한 생태계에서 살아 숨 쉬는 유기체로 본다. 그런 맥락에서 그들은 언어가 소멸하는 이유와 과정을 정치, 경제, 역사, 환경 등 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것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따져 묻는다. 일반적으로 소수민족의 언어는 원시적이라 생각되지만, 애초에 우월한 언어 따위는 없었다. 그저 그 지역과 그 사회에 적합한 언어가 존재했을 뿐이다. 이누이트에게 ‘눈’을 표현하는 단어가 수십 가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식상하다.

아득한 옛날부터 다양한 언어들은 서로 보완적 기능을 하며 공존해 왔다. 그런데 ‘지리상의 발견’시대와 제국주의시대 서구가 전 세계를 지배하면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수많은 토착어를 붕괴시켰고, 그들의 언어만을 쓸 것을 강요했다. 이렇듯 서구가 언어를 지배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며 저자들은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한다. 그것은 생물학적 다양성과 언어의 다양성,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언어가 소멸되는 곳에서는 생물도 그만큼 소멸돼 가고 있으며, 언어가 소멸되면서 하나의 문화 역시 사라지고 있다.

한국어는 사용자 수도 많고 안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한국어는 이미 많은 고유어를 잃어 왔으며, 일상 언어에는 수많은 외래어가 뒤섞여 있다. 지역 고유의 색깔을 담은 사투리는 ‘표준어’라는 이름의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이 쓰는 말에 밀려 촌스럽다고 치부되며 코미디의 주된 소재로 전락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영어 발음을 좋게 한다는 이유로 아이의 혀 아래 힘줄설소대을 찢기도 하며, 심심하면 영어공용화론이 흘러나온다. 이렇듯 한국의 다양한 언어‘들’은 표준어에 밀려 사라져 가고 있으며, 표준어로서의 한국어 역시 영어라는 ‘강력한’ 언어에 짓눌려 있다. 그런 와중에 지방의 다양한 토속문화는 사라져 버렸고, 한국의 독특한 문화는 ‘글로벌스탠다드’라는 허울 아래 더 이상 존속을 장담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 다양성은 문화적 다양성의 척도이며, 한 언어가 사멸하면 그 생활양식도 사라진다는 점에서, 언어의 소멸은 문화 소멸의 징후”라는 저자들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언어가 사멸하면 그 세계 자체가 사라진다. 그래서일까? 식민지시대 일제가 그토록 ‘조선어’를 쓰지 못하도록 한 이유는 여기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이 글이 길다 싶으면(원래 12매로 썼던 글을 7매로 압축했는데 길까?) 다음 동영상을 봐도 된다.
EBS의 <지식채널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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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 이론, 그 후 100년 - 6점
정재승 기획, 김제완 외 14인 지음/궁리


상대성이론, 뭔 말인지 알지

― 김제완 외 14인의 《상대성이론, 그 후 100년》

하나 묻겠다. 아인슈타인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말인 '상대성이론'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거의 대부분의 문과 출신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비슷한 수의 이과 출신 또한 고개를 설레설레 젓지 않을까? 설사 대답한다 하더라도 ‘아인슈타인이 발명해 노벨상을 받게 한...’이라고 우물거릴 뿐 개념에 대해 자세하게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영화 〈딥블루씨〉에서 요리사는 “아리따운 아가씨와의 하룻밤은 순간이지만 뜨거운 프라이팬위에 있는 것은 영원과 같다"라며 칼테크(캘리포니아공과대학)를 졸업한 연구원보다 상대성이론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결국 상대성이론의 요지는 관측자의 상태, 예컨대 공간과 시간에 따라 관찰한 결과가 달라진 것이다.

언뜻 간단해 보이는 이 개념은, 일개 특허사무소 직원이었던 아인슈타인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리학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상대성이론은 그 후 과학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놀랍게도 상대성이론은 과학계뿐만 아니라 철학, 미술, 사진, 문학, 영화, 건축을 비롯한 우리의 일상생활 곳곳에 엄청난 영향을 줬다. 우리에게 《과학콘서트》의 저자로 친숙한 정재승 교수의 기획 아래 각계 전문가 14인은 《상대성이론, 그 후 100년》에서 상대성이론이 우리네 삶을 변화시킨 모습을 다양한 시각에서 설명한다.

먼저 이 책의 1부는 아인슈타인의 생애, 상대성이론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 상대성이론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각 분야 별로 전공자들이 상대성이론으로 인한 각 분야의 변동을 이야기한다. 이중 가장 쉽게 사례를 접할 수 있는 분야는 SF문학과 영화 쪽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4차원’ ‘블랙홀’ ‘우주여행’ 같은 개념들은 무수한 영화와 소설에서 자주 등장한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밀레니엄 팰콘호의 광속비행이나 〈혹성탈출〉에서 시간이동은 모두가 상대성이론에 근거해 고안됐으며 그것에 의해 설명된다. 아마 상대성이론이 아니었으면, 이들 영화와 소설에서 나타난 현상들은 그저 공상 속에 존재했을 게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역시 상대성이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GPS는 지구 궤도 상에 떠 있는 인공위성으로부터 신호를 받아 현재 위치를 추적하는 장치이다. 그런데 지구의 자전속도와 인공위성의 자전속도는 다르며, 중력의 차이로 인공위성은 지구보다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간다. 그렇기에 인공위성은 매일 발생하는 오차를 수정해야 한다.

시간의 예술인 사진․영화와 공간의 예술인 미술․건축도 상대성이론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철학이나 음악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상대성이론과 관련 없는 분야가 별로 없어 보일 정도이다. 게다가 하루같이 변하는 오늘날, 상대성이론의 영향은 자꾸만 커져 간다. 이런 마당에 상대성이론이 뭐냐는 질문에 대답은 물리학자들이 해 줄 거라는 무책임한 방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당치 않은 태도이다. 상대성이론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부터 하나씩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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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 10점
김상봉 지음/한길사


우리에게는 한국사회의 교육문제를 비판한 《학벌사회》와 《도덕교육의 파시즘》으로 유명한 김상봉이 쓴 《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는 제목 그대로 그리스비극의 근본정신이 무엇이며, 어떠한 역사적 배경으로 형성됐는지에 대해 가상의 독자에게 편지 형식으로 쓴 책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그리스로마신화’라는 이름으로 흔히 접하는 영웅들의 업적과 비극적 운명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대신 왜 하필이면 고대 그리스시대에 인생과 운명의 쓰디쓴 아픔을 노래하는 《안티고네》나 《오이디푸스왕》이 지금으로 치면 〈이산〉이나 〈왕과 나〉처럼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는지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 준다.

고대 그리스, 특히 아테네에서 비극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는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고도로 발전했던 기원전 5세기 무렵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같은 이전 시대에 쓰인 영웅서사시가 인륜적 보편성을 노래했고, 사포의 서정시는 개인적 주체성을 노래했다면, 그리스비극은 이 둘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렇다면 굳이 왜 이때 아테네에서 이런 비극이 융성했을까? 그리스비극은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니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나 아이스퀼로스 같은 비극의 저자들은 그리스비극 안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보편적 고통을 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즉 민주정 아래 자유로운 존재인 아테네의 시민들은 그리스비극에 시련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이에 저항하고 극복하려는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한다. 바로 그것은 남의 부림에 당하는 노예가 아닌 운명에 맞설지라도 행하는 자유인의 모습이다. 또한 모두가 동일하게 고통을 겪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으면서 아테네의 시민들은 비로소 저 혼자 잘 먹고 잘사는 이기적인 존재가 아닌 타자의 고통에 연민의 정서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폴리스라는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적극적인 존재, 즉 자유로운 시민이 된다.

《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저자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리고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철학하는 길이라 말한다. 이런 까닭에 저자는 그런 슬픔을 이야기하며 철학이 한가한 유희가 아닌 시대의 정신을 찾는 일임을 이야기한다.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시대의 정신은 무엇일까? 진정 자유로운 시민이 되기 위해선 우리는 그리스비극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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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낭 브로델
김응종 지음/살림


0.
내게 페르낭 브로델은 다소 골치 아픈 사람이었다. 대학 1학년 때 들었던 일반경제사 수업에서 선생은 둘씩 짝 지워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을 읽고 요약해 오는 과제를 냈다. 물론 과제는 발표와 연계됐다. 말이 요약이지 그것은 한마디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도록 하는 선생의 폭거였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일상의 이야기가 방대하게 망라된 한마디로 책을 붙잡으면 한숨부터 나오는 책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떻게 요약을 해 발표를 했는지 당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도무지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정말 나와 친구, 그리고 함께 수업을 듣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머리를 싸매 가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1권이라 하지만 상/하 두 권으로 돼 있으며 각 권은 꽤 두껍다)을 읽었다. 그리고 쓸데없이 양만 늘려 가오잡으려 한다며 브로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후로도 브로델이나 아날학파는 그리 좋은 인상은 남지 못했다. 그네들이 말하는 주장은 일면 동감하면서도 요약할 때 느꼈던 그 지난함은 그들을 미워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브로델 이후 아날학파의 거두가 된 조르주 뒤비가 편집한 <지도로 보는 세계사>에 환장하기 전까지는.

그러다 십여 년이 지난 후 나는 <역사철학의 이해>라는 강좌를 들었고, 그 강좌의 한 챕터는 역사이론을 소개하는데, 아날학파는 마르크스주의와 함께 20세기 역사학의 가장 굵직한 흐름이기에 역시나 수업시간 중 많은 부분을 할애해 소개됐다. 특히 아날학파 2세대이자 가장 큰 거목이라 할 수 있는 페르낭 브로델에. G선생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같은 거 읽다가 주화입마 당하지 말고 그냥 책 한 권만 읽으면 아날학파와 브로델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며 김응종의 <페르낭 브로델 | 지중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소개해 줬다. 그리고 나는 수업이 끝난 다음 주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책을 읽었다. 책 읽은 소감은 한마디로 재미있네, 이제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도 읽어 봐야겠군, 이다.

1-1.
나는 본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관심이 많다. 시장은 태초부터 있었고 그 안에서 자본주의가 생겨났다고 믿는 주류경제학과 달리 나는 시장은 근대 초기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가정 아래 논의를 진행하는 실재주의적 경제학, 그리고 그 안에서 시장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다른 형태에 관심이 많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자기조정적 시장체계가 영국에서 형성되는 과정에 초점을 둔 칼 폴라니의 견해를 상당 부분 신뢰하는데, 브로델은 다른 맥락에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관계를 조망한다. 브로델이 바라보는 그 관계의 핵심은 인간의 경제구조는 물질문명의 토대 위에 시장경제가, 시장경제의 토대 위에 자본주의가 위치한다는 삼중구조이다. 이런 점에서 브로델은 인간의 경제생활이 발전하면서 시장이 만들어지고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또 그 안에서 상업자본주의-산업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 식으로 단선적으로 변한다는 일종의 진화론에 대해 강하게 부정한다. 그리고 그는 세 구조의 위계 속에서 그 존재방식에 따라 '복수의 자본주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행 자본주의는 경쟁을 모토로 삼는 시장경제와 달리 독점을 추구하며 "시장경제를 교란시키는 반시장경제"라고 말한다.

1-2.
브로델은 역사학과 경제학에 남긴 엄청난 영향력과 달리 저서가 그리 많지 않으며, 그의 사상체계는 <지중해>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집중돼 있기에 저자인 김응종은 두 권의 궤적을 따라가며 브로델 사상의 핵심을 설명한다. 먼저 브로델의 박사학위 청구 논문을 출판한 <지중해>는 앞으로 그가 말할 구조주의 역사학의 시원이다. 여기서 그는 구조-콩종튀르-사건이라는 삼중구조로 된 역사방법론을 제시하고, 여기서 콩종튀르의 중요성을 논파한다. 이전까지 역사학의 주된 관심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건을 '먼지'에 불과하다며 일부 정치적 사건을 제외하곤 사건 따위는 역사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폄하한다. 대표적인 게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지중해 패권이 이슬람에서 스페인에게 넘어갔다고 외우는 '레판토해전'이다. 하지만 브로델은 레판토해전 이전과 이후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흔히 브로델의 역사관에 대해 듣는 개념은 '장기지속'이다. "가장 느린 변화가 가장 중요한 변화"라는 테제에서 알 수 있듯 아주 서서히 구조가 변하는 데 브로델은 초점을 두고, 인간은 그 구조의 감옥 안에 수형된 '죄수'라며 구조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 주력한다. 물론 브로델의 이러한 인간을 자유롭지 않는 존재로 보며 구조의 꼭두각시 정도로 취급하는 방법론에 대해서 처음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논란이 일고 있으며 브로델의 견해는 철저히 소수의 견해로 존재한다. 하지만 브로델의 이러한 주장은 분명 당시로서는 신선한 것이었으며 그 신선함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브로델은 구조를 읽는 데 사건과 연결시키는 '콩종튀르'를 중요하게 여긴다. 브로델에게 거의 전가의 보도로 쓰이는 콩종튀르는 본디 '여러 상황circustums들이 만나 생겨난 '국면situation'으로 한 변화의 출발점'을 뜻하는 말로 "변하되 주기적으로 순환하면서 변화가 예측 가능하도록 경제활동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주기"를 뜻한다. 대표적인 콩종튀르가 콘드라티에프가 이야기한 '50주년 주기' 같은 장기적 콩종튀르이다. 콩종튀르는 경제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인구변동, 국가의 크기, 전쟁 같은 다양한 콩종튀르가 존재하며, 주기의 폭도 세기 단위의 장기부터 수년의 단기까지 폭넓게 존재한다. 브로델은 이렇게 다양한 콩종튀르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설명이라고 말했다.

1-3.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세계-경제'와 '세계-제국'을 비교하며 현행 자본주의 발전을 이야기한다. 브로델이 말하는 세계-경제는 세계적인 경제를 말하는 세계경제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로서 다른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경제권을 의미하는데 정치제국과 상응하는 경제제국이라 할 수 있다. 세계-경제는 교환을 매개로 움직이며, 국가로부터 자유로웠던 도시는 세계-경제의 상층부에 위차하면서 이러한 세계-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에너지원이다. 브로델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 시골로부터 분리돼 형성된 (자유)도시는 원거리무역을 바탕으로 시골 또는 타 도시와 끊임없이 교환을 행하며 세계-경제를 움직여 왔다. 여기서 브로델은 수위가 같으면 물이 흐르지 않듯이 도시로 상징되는 교환체계의 위계가 위계적일수록 전압 차이가 발생해 교역이 활발해진다는 비유를 통해 세계-경제가 활기차게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에는 교환이 이루어지며 이는 전적으로 불평등한 교환이다. 경제는 이러한 불평등을 더욱 확대시키며 세계-경제의 구성원을 양극화시킨다.

이러한 세계-경제의 개념은 세계-제국과 대비된다. 세계-제국은 본디 브로델의 충실한 동반자였던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창안한 개념으로 중국, 인도, 이란, 러시아 등에서 존재했던 정치적 강압에 의한 전제적인 제국을 의미하며, 마르크스가 언급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기반한 정치 중심의 체제로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어떤 상인도 자본가도 자유롭게 활동할 여지가 없어 교육을 활성화시키지 못해 자본주의로의 발전이 저해된다. 물론 세계-경제는 세계-제국으로 변질된 가능성이 많으며, 그렇지 않고 지속적으로 팽창하면 16세기 유럽처럼 자본주의가 팽창적 발전을 꾀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브로델의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은 유럽 자체의 고유한 역동성 때문이라 읽히며, 이는 다분히 유럽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의심받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프랑크 같은 반유럽중심주의자들로부터 공박당했다.

2.
브로델은 유럽 세계-경제의 발흥시점을 상파뉴 정기시(상설시장)가 열린 13세기로 잡는다. 이미 그때부터 유럽이 동일한 가격의 콩종튀르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본래 영역은 생산이 아니라 '교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브로델의 교환우위론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천착하는 마르크스의 '생산양식론'과 크게 다르다. 이 지점에서 브로델은 교역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면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의 차이를 분명히 이야기한다. 앞서 말했듯 경쟁을 원천으로 하는 시장경제는 독점을 원천으로 하는 자본주의 - 정확히 말하면 숫한 자본주의 중 지금의 자기조정적 시장을 가지는 근대적 자본주의 - 는 명확히 다르다는 것이다. 김응종은 브로델이 정의하는 자본주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에 자리 잡고 그곳에서 변영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시장 경쟁의 '경쟁'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게ㅔ 유리하도록 교환을 왜곡시키며 질서를 교란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에서 나왔지만 시장경제와 대립한다. 시장경제가 합리성의 영역이라면, 자본주의의 영역은 계산과 투기의 영역이다. 시장경제는 투명한 데 반해 자본주의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시장경제를 토대로 삼는 것이기에 시장경제 없이는 생성될 수 없다. 자본주의는 가장 높은 층에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 경제생활의 세 요소인 물질문명-시장경제-자본주의 가운데 자본주의만이 잘율적이다. 자본주의는 때에 따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리하여 교대로 또는 동시에 상업이익이나 산업이익, 지대, 국가에 대한 대부, 고리대금업 등 어는 것이든 추구한다. 자본주의는 진입해 들어갈 영역이아 포기할 영역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 "선택한다는 것,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비록 그 선택이 아주 제한적이라고 해도 그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자본주의는 단 하나의 선택 속에 갇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하나의 영역에 전문화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익의 추구, 이익의 극대화는 자본주의의 무언의 법칙이다. 자본주의는 높은 이익이 나는 곳으 향해 수시로 변신한다. 자본주의는 이익을 좇아 자유롭게 선택하고 민첩하게 움직인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165-116쪽)


브로델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본질을 규명하면서 흔히 알려진 것처럼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시대에서야 시작된 게 아닌 전산업화시대, 즉 상업자본주의시대부터 존재했음을 이야기하고, 상업자본주의는 여러 자본주의주의 가운데 하나임을 이야기한다. 상업자본주의시대 대상인들은 이후의 자본가들과 달리 국가권력과 공모해 시장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원거리무역을 통해 오히려 거꾸로 시장을 조종한 이들이다. 하지만 19세기 초 이들을 대신해 산업 자본가가 등장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의 시대를 연다. 하지만 이들의 등장과 새 시대의 도래를 인정하면서도 브로델은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심대한 위기가 닥쳤을 때 혹은 이윤율이 현자하게 떨어졌을 때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거의 순간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능력이다"라면서 자본주의의 특징을 정의 내리며, 산업자본주의 또한 복수의 자본주의 중 하나임을 분명히 역설한다. 때문에 과다한 경쟁으로 인한 이윤율의 하락으로 붕괴될 거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을 부정하고, 본질적인 불평등을 인위적으로 제거한 사회주의는 "자본의 독점을 국가의 독점으로 대체한 것이며, 하나의 해악 위에 다른 또 하나의 해악을 더한 것"에 불과하다며 현실성 없는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며 공박한다.

3.
앞서 말했듯 브로델은 인간의 경제생활을 물질문명-시장경제-자본주의라는 독창적인 삼중구조로 설명한다. 특히 이 부분에서 자본주의는 시장경제 위에 존재하는 하나의 형태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경쟁을 추구하는 시장경제와 독점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대립시킨다. 이는 시장경제를 자본주의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보는 주류 경제학과 상당히 다르며, 산업이 아닌 교환을 시장경제의 중심에 두고 사회주의 역시 독점의 한 양식이라 주장하면서 마르크스 경제학과도 명백한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현재의 자본주의는 무수한 자본주의와 경제양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점에서 경제와 시장의 실재성을 따져 묻는 칼 폴라니의 경제관과 어느 정도 맥을 함께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시장경제 위에 자본주의를 두면서 거대한 물질의 교환시스템으로서 시장을 이야기하면서 시장을 자본주의의 주요 메커니즘으로 보는 폴라니의 견해와 달리 경제구조를 이야기한다. 물론 주류/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칼 폴라니의 시장 개념과 브로델의 시장은 전적으로 같지 않다. 브로델의 시장 개념은 다른 경제학자들과 달리 좀 더 크고 광활한 개념인데,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이런 점에서 브로델이 말하는 시장의 개념이 다른 경제학의 개념과 비교해 명확하게 설명돼 있지 않다. '시장'이라는 말이 달리 쓰인다면 그것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정의와 쓰임새를 비교, 대조해 개념을 명확히 인식하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 브로델의 사상에 대해 어렵지 않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브로델과 아날학파에 대한 개론서로는 나무랄 데 없지만, 경제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좀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는 데서는 개론에 그쳐 다소 아쉽다. 물론 이러한 아쉬움은 살림출판사의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가 갖는 전체적인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권을 더 읽어야겠다는 욕망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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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10점
정희진 지음/교양인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듣는 소통의 시발점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굳이 페미니즘의 ‘페’자가 나오지 않아도 여성에게 유리하거나 거꾸로 남성에게 불리하다 싶은 뉴스가 나오기가 무섭게 기사에는 수십 개의 답글이 달린다. 그 답글은 안타깝게도 본래의 목적인 상호간의 소통을 꾀하는 게 아닌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한 맺힌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다. 사실 남성들도 다 안다. 한국사회는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체제가 강고히 들어선 경직된 사회이며, 여성은 그 안에서 소수자이며 피해자라는 사실을. 하지만 아는 것과 인식하는 것은 다르다.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끼치는, 아니 이익을 가져가는 순간 다수자는 마치 자신이 소수자가 된 양 입에 거품을 물며 자신들이 피해 입은 바를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로한다. 깨놓고 말하면 자신들만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전에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어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는 사실은 과감히 휴지통에 넣어 버린 채.

여성학자 정희진은 그런 한국사회와 그 안에서 도사린 남성중심적 가부장체제를 지적하며 페미니즘이 이에 도전할 수밖에 없음을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도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남자들을 못 잡아먹어 혈안이 된 ‘꼴페미’들의 한 맺힌 전투적인 자기방어가 아니다. 정희진은 이 책에서 이리 말한다.
나는 페미니즘은 저항이론․저항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의 목소리들도 들리게 된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제까지 잘 들리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존재, 특히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다양한 가치를 창조해 세상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고 이를 통해 서로 성장하자는 거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그러기에 앞서 (남성들에게) 너무 익숙해져 육안이 돼 버린 색안경을 벗을 것을 주문한다. 그래야 비로소 남성들에 의해 타자他者화됐던 여성의 현실이 보인다. 그러면서 동시에 계급, 인종, 민족, 학벌, 외모, 출신지, 나이, 장애, 성정체성 같은 우리 사회에서 차별을 자행하는 억압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서서히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 더 하면 인간은 누구나 어느 측면에서는 차별받는 소수자이며 누구도 모든 면에서 ‘성골’일 수 없다는 게다.

이쯤에서 남자들만 군대에 간다고 억울해하는 당신, 억울함을 토로하기 전에 이 사회가 얼마나 남성들에 의해 재단돼 있는지, 그 속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힘겹게 세상을 대하는지부터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자신의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 여자친구의 입장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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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공화국
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후마니타스
 

0.
30여 년 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아파트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 이유야 빤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파트에 살 만한 형편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파트에서 살 일이 있을까 싶다. 형편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는 계층이라는 말로 바꿔 써야 맞을 듯하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아파트는 중간-중상류 계층이 집단적으로 서식하는 사회문화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1.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쓴 <아파트 공화국>은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의 아파트 문화에 대한 보고서이다. 원래 한국에서 체류하면서 한국의 아파트문화에 관심을 가진 그는 전 세계적으로 무척이나 독특했던 이 문화를 가지고 결국 박사학위를 받았고, <아파트 공화국>은 이에 바탕을 두고 한국 독자의 눈높이에 맞도록 다시 서술한 책이다. 신간소개에서는 박사학위 논문이 원문이라는 말에 프랑스인의 저작이라는 선입견에 다소 딱딱하고 고답스러울 줄 알았는데, 술술 읽히는 게 프랑스는 한국처럼 학위논문을 짜증나게 쓰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한국사람에게 "한국에는 왜 아파트가 많을까"라고 물으면 백중 구십구-팔은 "좁은 땅에 인구는 많으니까"라고 답할 게다. 내게 물어도 마찬가지일 듯. 적어도 줄레조의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러나 한국사람이 아닌 타자의 시선으로 이러한 질문을 한 줄레조는 과연 그럴까 싶었나 보다. 게다가 지도상에서 나타난 한국의 아파트단지를 군사단지라고 오해하는 동료의 말에 그는 열심히 왜 한국 땅에는 이리도 아파트가 많을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 탐구의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계층 상승 혹은 계층 확인을 목표로 하는 '중산층의 외형적 표시'라는 것이다.
 
3.
사실 한국의 아파트에 중산층이 산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사실 아파트에서 산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 자신도 중산층임을 대내외적으로 확인받는 장치이다. 박정희 정권 이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중소 상공인, 자영농 같은 기존의 구중간계급이 아니라 대기업 사원이나 고위 공무원, 전문직 종사자 등으로 이루어진 신중간계급이 늘어났고, 정부는 주로 이들을 대상으로 중대형 아파트를 공급했다. 기존의 한옥 구조와 달리 서구화된 구조의 아파트는 이들의 기호와 욕구를 충족시켜 줬고, 이러한 이들이 집중적으로 특히 강남의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는 이들의 계층을 공공히 해 주는 도구가 됐다. 반대급부로 아파트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중산층의 전유물, 혹은 중산층이 되고 싶은 하류층의 희망사항이 됐다.
 
4.
줄레조는 단순히 좁은 땅에 인구가 많아 아파트가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을 서울의 구별 인구밀도에서 밝힌다. 기존의 통례대로라면 아파트가 밀집한 강남구와 서초구 등에 인구밀도가 높아야 하나, 반대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은 하류층 밀집지역인 동대문구와 영등포구였고 서초구와 강남구는 매우 낮았다. 결국 서울의 인구밀도와 주택구조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는 이야기이며, 그저 아파트단지는 "주거공간을 조직하고 조밀화시키는 국토개발의 해결책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아파트 건설 초창기에는 하류층을 위한 중소형 아파트가 여타의 이유로 실패해 중산층을 위한 중대형 아파트 위주로 개발된 것, 그리고 장기임대보다는 임시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단기임대와 소유를 목적으로 분양 위주로 개발된 사례를 거론한다. 하류층이 밀집했던 지역(이른바 철거촌)을 재개발한 후에 그들이 아닌 타지의 중산층을 위한 중대형 아파트가 지어졌다는 사실만 봐도 줄레조가 밝히는 논리는 설득력 있다. 여기에 투자와 투기의 수단으로서 아파트가 지니는 역할은 일종의 확인사살이다.
 
5.
주로 5장에서 중산층 거주지로서 아파트를 이야기한 줄레조는 7장에서는 "아파트는 정말 '현대적'이고 '서구적'인가"라며 묻는다. 줄레조의 답은 한국의 아파트는 외형적으로는 서구적/현대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공간의 활용을 보건데 이는 한국의 전통적 생활양식과 서구적공간구조가 결합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줄레조는 "한국에서 아파트의 성공 요인은 현실로서의 아파트가 인기를 끌었다기보다는 한국인들이 '현대적 주택'에 대해 만들어 낸 이미지가 인기를 끈 결과"라고 말한다. 아파트의 생활양식에서 드러난 기술의 진보는 순수하게 한국적 산물이었지만, 아파트=서구화=현대화라는 단순한 도식 속에서 아파트에 서구화/현대화 모델로서 독점적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대척지점에는 불편했던 과거 한옥의 구조이다.
 
6.
책을 읽다 보면 줄레조는 사실을 밝혀냈다기보다는 정리했다는 게 맞다. 그동안 한국 내에서 이러한 연구가 없었던 이유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고정된 시선이었을 게다. 게다가 대부분의 내용은 이미 다들 아는 내용이지만, 그 내용들은 따로국밥으로서 분절돼 있었다. 하지만 한국사람이 아니었기에 줄레조는 한국사람들의 이 결정론적 사고방식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외국인이 왜 이런 데 관심을 갖느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힘들게 인터뷰를 하고 자료를 조사해 이러한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알라딘 이 주의 TTB리뷰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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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이정익 지음/길찾기
 
암울함을 인지할 때 느끼는 먹먹함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갔을 때,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덮었을 때 순간 내게 던져진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먹먹함에 한참을 멍할 때가 있다. 이정익의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는 그러한 책이다.

이 책은 만화책이다. 그리고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인권사'라는 부제가 달렸다. 만화라는 형식이 손 쉽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어 선뜻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전달하기 쉬운 까닭에 그동안 '인권'을 다룬 만화책은 적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내용을 전달하는 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다루는 내용인 한국현대사도 인권도 많다고는 할 수 없어도 비교적 다루어진 편이라 그닥 새롭지도 않다. 게다가 이 책에 그려진 만화 아니 그림은 온통 어둡고 칙칙하고 음울하다 못해 암울하기까지 하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러한 암울함이다. 70년대 광주대단지사건부터 동일방직분뇨사건, 인혁당재건위사건, 유신정권이 자행한 고문들, 그리고 극악에 달한 한국현대사의 가장 암점인 광주민주화항쟁. 시대가 암울했는데 그것을 묘사하는 그림이 암울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게다. 밝고 맑은 그림에 암울한 내용은 가당치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인 이정익은 그래서인지 철저하게 어둡고 칙칙하고 음울한 그림 속에서 자기 스스로가 그러한 사건들을 글로 접했을 때 가졌을 법한 먹먹함을 그림에 담아냈다. 그리고 이러한 과거의 일들이 보스니아와 팔레스타인, 이라크 등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잔혹한 권력에 대해 두려움을 표출해 낸다.
 
그렇다. 다시는 그러한 두려움을 느끼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이 여전한 폭력 앞에 작가는 어두운 과거를 또한 어둡게 그림에 담아낸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드러나듯 사람들은 그저 옛날일, 불가피했던 일, 자기와 관련 없는 일로만 치부하며 한 때의 이야기로만 치부한다. 저자는 그래서 더더욱 슬퍼한다. 그래서일까? 제목은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이다.
 
대학 신입생 때 선배들은 으레 80년 광주에 관한 사진을 보여 주곤 했다. 그리고 세미나 주제도 그러한 암울한 현대사였고, 종종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그것이 여전함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도록 했다. 참혹함을 알게 됐을 때 가졌던 그 먹먹함. 이 책은 그 먹먹함을 내게 되살려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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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볼 효과 - 8점
제임스 버크 지음, 장석봉 옮김/바다출판사

도끼장이의 선물 - 8점
제임스 버크 외/세종서적

화이부동님께서 제임스 버크의 <핀볼효과>를 사셨다는 말에 마침 요즘 읽고 있는 책인지라 한마디 거들었다. 흥미로운 책이다. 마치 핀볼게임기 안의 공이 여러 가지 트랩과 스틱의 조종에 따라 조합되는 여러 가지 우연성에 의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듯, 인류 문명 특히 근대의 물질문명 역시 수많은 사건의 발생과 사물의 발견/발명으로 만들어지는 우연성의 카오스 안에서 그것들이 상호연관되며 발전해 왔다고 말한다.
저자 제임스 버크는 그러한 사소함에서 기인하는 문명의 발달과정을 '나비효과'와 비슷하면서 다른, 말하자면 영화 <수면의 과학>에서 스테판이 주창하는 평행적-동시적-임의적parallel-synchronous-random한 사건이 상호연관되는 '핀볼효과'라는 말로 설명한다. 예컨데 파마기술의 발명으로 인해 붕사가 필요했고 이는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의 원인이 되고... 뭐 이런 식으로 하면서 뜬금없이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점프하면서 나아가 정기우편선이 도입된 역사적 사건을 끄집어 내는 식이다. 사무실에서 한 장씩 틈틈히 읽고 있는데, 너무 자주 점프하는 바람에 맥락을 놓치기도 하지만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저자 제임스 버크는 <우주가 바뀌던 날 그들은 무엇을 했나>로 한국에 소개됐다고 한다. K씨도 지성사가 중요하다면서 이 책을 추천하곤 했는데, 품절된 지 오래이고, 헌책방에서도 도무지 발굴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 제임스 버크가 로버트 온스타인과 함께 쓴 <도끼장이의 선물>라는 책을 우연히 한 인터넷 개인 헌책방에서 발견해 냈다 샀는데, 이 책 또한 제임스 버크의 손길을 탄 책인지라 매우 흥미롭다. 이 책은 우선 인류사 전반에 대한 문명 발전의 궤적을 따라가며 통사적으로 기술한다. 책 뒤편에 적힌 소개글을 옮겨 본다.
 
<도끼장이의 선물>은 지금과 같은 문명세계를 주는 대신 우리의 의식을 빼앗아 간 사람들(도끼장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사장, 천문학자, 인쇄업자, 추기경, 기술자, 과학자 등으로 대표되는 그들은, 최초로 숲속에서 돌을 쪼아 도구로 사용하던 도끼장이로부터 오늘날 슈퍼컴퓨터를 이용하는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에 걸친 발견과 혁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수많은 문명의 이기라는 도구를 선사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양날을 가진 선물이었다. 편리함과 함께 '인류 파멸'을 가져왔넌 것이다. 이렇게 인류가 인식하지 못한 채 파멸로 치닫는 여행을 계속했던 이유는, 새로운 도구들이 정신을 잃게 하는 매력과 전문성, 그리고 내밀함을 가지기 때문이다. 또한 도구 발달을 통한 혁신과 그에 따른 인간의 두뇌 발달이라는 상호관계가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켜 왔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고방식을 만들어 왔는지를, 뛰어난 상상력과 치밀한 논리성, 그리고 인류역사와 서양문명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풀어낸다. <도끼장이의 선물>은 한 세기를 마감하는 중대한 시기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류의 현안 문제와 그 해결방안을 희망적으로 모색한다.
 
 
'도끼장이axmaker'라는 개념부터 흥미롭다. 책의 부제인 '양날을 가진 인류문화의 역사'에서 보이듯, 도끼장이가 가진 도끼는 발전과 파멸이라고 하는 양날을 가진 문명을 말하며, 도끼장이는 이러한 문명을 일구어 낸 사람이자 이용하고 전파하는 사람으로, 도끼를 바탕으로 인류를 지배하는 집단을 일컫는다. 예컨데 현생인류에게 최초로 기술로 나타난 도끼 제조, 문자의 발명, 논리학의 성립, 신학을 통한 신앙의 권력화, 인쇄술을 통한 언어권 통합, 신대륙 발견으로 인하 세계질서의 재편 같은 일련의 문명발전과 그로 인한 파장의 명암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를 통한 인쇄술이다. 이전까지 책은 오로지 필사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게다가 라틴어로만 쓰였기에,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돼 있었다. 하지만 손 쉽게 책을 만들 수 있게 되자 각종 기록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게 됐고, 이는 또한 라틴어가 아닌 자국의 지배적인 언어로 쓰이면서, 프랑스는 파리, 영국은 런던, 이탈리아는 토스카나 지역의 방언이 국어로 채택돼 그곳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영토국가의 성립을 예견했다. 또한 문자화된 라틴어를 통해 유럽세계를 지배하던 가톨릭교회는 반대급부로 급속도로 세력이 약화됐고, 그것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한 달만에 전 유럽을 떠돌 정도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또한 루터가 성서를 독일어 번역하면서 결정적으로 가톨릭교회의 권위는 급속도로 약화됐다. 반면 대중은 자국어로 손 쉽게 성서를 비롯한 각종 서적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특정 소수에 집중됐던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됐으며, 이를 강화하고 또는 재지배하기 위해 대중교육이 나타나게 됐다. 인쇄업자라고 하는 도끼장이는 대중에게 자유로운 지성을 선물했으나 또한 중세세계의 몰락을 앞당기기도 했다.
 
두 권 다 절반쯤 읽었는데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갈지 사뭇 궁금하다. 덕분에 수업과 세미나에 제출할 페이퍼 작성을 못하고 있다. 이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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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문제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코믹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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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처럼 무난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럭저럭 평범한 가정에서 생활해 온 나이지만, 나는 콩가루집안 이야기와 대안가족을 비롯한 다채로운 가족을 포함해 이른바 '비일상적인 가족'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일까? 2005년 내가 꼽은 최고의 한국영화는 <다섯은 너무 많아>였고, 2006년은 <가족의 탄생>이었다. 이런 내가 마감의 와중 사무실에서 굴러다니던 만화책 한 권을 읽었다. 그림체부터 전형적인 소녀 취향의 일본만화가 연상돼 그냥 넘어갈 법했지만, 마감인지라 머리 좀 식히려 펴들었는데 의외로 재미있다.
 
1.
이마 이치코의 <어른의 문제>는 한 아버지가 뒤늦게 게이임을 깨닫고 이혼하는 데서 시작한다. 마치 TV시리즈 <프렌즈>가 아내 수잔이 커밍아웃과 함께 이혼하면서 버림받은 로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듯 말이다. 그리고 나서는? 아버지는 동성의 파트너와 관계를 맺고, 아들과 전 아내는 나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아들은 이런 부모의 제멋대로 선택으로 괴로워하는데... 과연 그럴까?
 
2.
보통 이런 스토리에서는 캐릭터의 색깔이 중요하다. 주요 인물들에 대해 한번 읊어 본다. 먼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하라시마 나오토는 다섯 살 때부터 이혼한 어머니와 쭉 둘이 살아오고 있다. 그런데 나오토의 고민은 아버지의 성적 취향인 동성애가 자기에게 유전될까이다. 어렸을 적부터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 20살 어린 나이에 원형탈모증이 생겨 항상 모자를 쓰고 다닌다. 어느날 아버지가 결혼하면서 부인을 자신의 형으로 입적시켰는데, 나이가 자기와 여섯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새 '부인'일까? 의붓형일까?
 
이 만화의 모든 소동의 근원인 나오토의 아버지 하라시마 유지는 나오토가 다섯살 때 게이임을 자각하고 합의이혼 한 뒤 여러 애인을 전전하다 결국 한참 연하인 스물여섯 살 에비 고로를 자기 호적에 양자를 입적하는 형식으로 일종의 동성 간 결혼을 한다. 이전의 배 나온 아저씨 스타일에서 꽃미남 스타일로 취향을 바꾼 셈인데, 이 관계는 얼마나 오래갈까?
 
아버지의 새 '부인'인 에비 고로는 유지와 결혼하면서 그의 호적에 양자로 입적돼 하라시마 고로가 된다. 하지만 유지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도 있지만, 고로의 속셈은 보석디자이너로서 성공을 위해서는 새우라는 뜻의 에비보다는 하라시마라는 성이 더 보기 좋아서 그런 것. 그런데 이자 꽃미남에 능력 있는 보석디자이너이지만, 심술 궂기는 이루 말할 데 없기니와 매사에 거짓말과 신경질적인 말을 툭툭 던지는 왕싸가지이다. 대신 요리를 비롯한 가사에 능하다. 이것은 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에게 가사를 전담시켜서 그런 것. 아닌가? 스스로 택한 것일까?
 
나오토의 어머니인 (하라시마) 스기야마 유미코는 남편과 이혼한 뒤 아들을 데리고 여자가 아닌 그저 어머니로만 살다가 늦은 나이에 연애전선에 뛰어들었다. 간만에 뛰는 연애전선 그리 녹록치 않다. 이러저러 하다 얽힌 상대는 전 남편의 '부인'인 고로의 형 에비 하지메. 전 남편과의 관계도 관계이거니와 10살 연하에 여섯 살 배기 딸이 있는 유부남. 이른바 불륜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고, 심지어 법률로 넘어선다. 
 
고로를 다시 집으로 불러드리려 하다가 생활설계사인 유미코에게 발목 잡혀 버린 하지메는 지금 최악의 상태. 훤칠한 외모에 명석한 두뇌, 뛰어난 스포츠감각과 방정한 태도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전형적인 엘리트. 하지만 아내는 걸핏 하면 집을 나가고 딸은 왕따이다. 게다가 남동생은 게이이며, 다른 누이 셋은 전부 미혼. 이런 그에게 제멋대로 고집불통인 유미코는 고로와의 요상한 관계, 열 살 많은 나이라는 문제와 상관없이 꽂혀 버렸다. 게다가 현재 유부남 신분이니 말하자면 불/륜/관/계.
 
3.
이거 지난번 이야기한 <미스 리틀 선샤인>과 또 다른 종류의 콩가루집안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집안도 사실상 세 군데. 게다가 이 복잡한 관계 맺기는 또 뭐일까? 이야기는 유지가 커밍아웃하면서 집을 나가고, 다시 결혼할 사람이라고 데리고 나타나면서 시작한다. 원만하게 이혼해서인가? 아니면 유미코가 재혼하지 않아서인가? 나오토와 유미코, 그리고 유지의 관계는 그럭저럭 괜찮다. 가끔 유지가 남자친구에게 채였다고 징징대지 않는다면. 그런데 결혼할 거라고 데리고 온 남자는 나오토보다 여섯 살 차밖에 안 되는 젊은 꽃미남, 고로. 그가 나타나면서 유지와 고로 사이에 나오토와 유미코가 끼어들고, 다시 고로의 형 하지메와 그의 가족까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한층 복잡해진다.
 
4.
이 만화는 단행본 1권으로 된 일본 망가치고는 무척 짧다. 그래서 이 복잡한 관계와 캐릭터는 지면에 쏟아지기가 무섭게 타오르고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현실에는 있을 것 같지 않은 해피엔드. 하지만 이마 이치코는 마지막에 가서 한마디 툭 던진다. "가족은 증식해 가는 것이다"라고... 그렇다 처음에는 그저 다른 두 가족의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이 두 가족은 서로 관계 맺음을 해 가면서 얽히고 새로 관계 맺음을 해 가면서 서서히 가족의 관계를 증식시킨다. 이것은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얽히며 살아가는 모습, 특히  '어른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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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실일까?’ 과학기사를 읽는 우리의 자세

‘과학시대를 사는 독자의 주체적 과학기사 읽기’라는 부제에서 이미 저자는 지금의 과학기사가 어떠한지, 독자는 어떻게 그것을 읽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사실을 전한다는 매스미디어, 그중에서도 엄밀한 데이터를 근거로 과학 현상을 분석하는 신문의 과학기사야말로 사실을 그대로 보도한다고 믿기 쉽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대학에서 과학사회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신문지상에 실린 숱한 과학기사를 하나하나 뒤적이며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사실과 확률의 혼동, 첨단기술에 대한 미신적 숭배, 영웅에 대한 열광을 부추기는 선정적 홍보 같은 과학기사의 뒷모습을 밝혀낸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성찰하며 읽을 것을 제시한다.
과학기사는 어떻게 사실을 왜곡하는가? 흔히 나노기술 하면 새로운 과학의 미래로 칭송된다. 하지만 모든 기술에는 명암이 있는 법. 특히 작은 크기로 인체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나노입자는 아직 그 위험성 여부가 확인되지 못한 미완의 기술이다. 하지만 나노기술에 대해 과학기사는 ‘장밋빛 전망’ ‘찬란한 미래’를 내세울 뿐 그것이 지닌 위험성을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으려 한다. 또한 암모니아합성법으로 노벨상을 받은 화학자의 업적을 이야기하면서 인류가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기사에 대해 저자는 암모니아합성법이 화약 생산과 연관되며 그 화학자 또한 독가스 개발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거론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인류 중 일부는 여전히 기아로 고통받고 있음에도 신기술이 전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선동적 수사만 가득한 기사의 행태를 고발한다.
과학기사 하나하나 조목조목 뜯어보며 저자는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책 제목이다. 독자가 과학기사의 선정적 보도에 휘말려 신화에 열광하지 않고, 기사에서 다뤄진 과학기술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스스로 성찰해 왔다면, 이른바 ‘황우석 사태’ 같은 국가적 차원에서 벌어진 이성의 집단적 마비상태가 일어났을까 하고 의문을 던진다. 다시 줄기세포 연구 지원 재개가 보도되는 이 시점에 우리는 그 기사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비단 과학기사, 신문기사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미디어를 통해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드는 이 시대, 우리는 쏟아지는 정보를 어떻게 가려내야 할까?
조금은 빤한 대답이지만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일단 제목을 잊고 기사 후반부도 꼼꼼히 읽으며, 숫자를 의심하며 돈과 관련된 문제를 생각하고, 기사의 분량과 빈도로 연구의 중요성을 판단하지 말고, 여러 신문의 기사는 물론 지난 기사도 되새겨 읽으며 비교하고, 권위에 의존하지 않은 채, 논리적 사고에 기반해 자기 자신만의 시각을 구축하라고. 모두가 이미 알고 있으나 잊기 쉬운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열광하지 않고 성찰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다.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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