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완벽하고 풍요로운 도시 경제를 발전시켰다. 수많은 노예가 없었다면 로마 제국의 경제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게르만족 전통에는 축노畜奴 제도가 없었다. 게르만족은 전통적으로 민주와 평등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같은 종족을 노예로 부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게르만족이 부린 소수의 노예는 모두 이민족이었다. 또한 게르만족 노예는 자기 집에서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 살 수 있었다. 중세 봉건 시대의 농노가 영주로부터 땅을 얻는 대신 세금과 부역의 의무를 지는 것과 같은 형태였다.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처럼 노예를 때리거나 가두거나 혹사시키지 않았다. 노예에게 잔혹한 형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노예제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자연히 막대한 부의 병력을 소유한 귀족이 등장하기 어렵다. 그래서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중심지를 점령했지만 선진 상업 경제와 노예제를 활용하는 도시 경제에 적응하지 못했다. 재산도 노예도 없었던 게르만족은 다시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 경제 방식으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중략)

게르만족 대이동 이후 중세 유럽이 암흑기에 빠진 이유는 게르만족 대이동이 수많은 전쟁을 촉발하고 로마 문명을 파괴했기 때문이 아니라, 게르만족이 점령한 유럽 중서부의 로마 문명지가 게르만화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로마 문명은 게르만족의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경제 및 정치 제도의 기반이 무너진 로마 문명이 게르만족에 동화되었다. 이렇게 유럽 문명이 당시 야만인이라고 불리던 게르만족 수준으로 떨어졌으니 문명의 암흑기가 찾아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동양을 대표하는 중화 문명은 노예제 경제가 아니라 장원제를 기반으로 하는 자연 경제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중원에 진출한 야만족들이 중화 문명에 쉽게 적응하고 동화될 수 있었다. 중화 문명은 여러 이민족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풍요로운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 경제와 상품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탓에 끊임없이 이민족에게 시달려야 했다.

- 역사를 뒤흔든 7가지 대이동 / 베이징대륙교문화미디어 엮음 / 현암사 / 20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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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에서 조르주 심놈의 메그레 반장(경감이 익숙하지만 뭐) 시리즈를 내놓을 거라면서 "조르주 심농라는 책을 내놓았다. Buzzbook이라는 시리즈의 2권인데, 열린책들에 따르면 신간예고매체로 "중요 작가의 신작이나 저술을 펴내기 전에 저자나 책에 대해 미리 귀띔해 주는 책"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이 책의 정가는 750원이다. 신간임에도 20% 할인이 적용되는데 이런 책은 도서정가제의 범위 외의 책인가 보다. 750원이라는 가격도 파격적이지만(버즈북 1권은 666원이라 덜 파괴적이긴 하다) 무엇보다 224쪽이나 되는 쪽수는 더욱 파격적이다. 대체로 흑백 인쇄이지만 몇몇 페이지는 컬러 인쇄되어 있다. 적어도 두 대는 컬러란 말인데... 대충 셈해도 이거 팔아 봤자 종이값이나 나올까 싶은데, 즉 팔면 팔수록 손해 보는 책이다. 정말 이상한 책이다. ^^;

열린책들이야 매년 개정판을 내놓는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로 손해 보는 장사에 재미들리더니 이제는 버즈북이라는 요상(?)한 매체로 진정 대인배로 등극하는 듯. 뭐 한국에서 추리소설 매니아를 빼고는 인지도가 거의 없는 조르주 심농의 책을 시리즈로 내놓는다는 것부터 이미 대인배 아닌가? 책 날개에는 무려 20권의 목록이 적혀 있다. 심지어 현존하는 유일한 심농 저작인 '13의 비밀'은 20권 안에 없다. 다시 보니 책 뒤쪽에는 들은 바 있는 75권 목록이 있다. 오우 대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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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작들을 모사한 복제품들은 놀라워요. 왜냐하면 그것들은 어떻게 보면 가장 순수하거든요. .... 말하자면 사심없는 가짜들이죠."
- "어느 박물관의 지하"(마르크-앙투안 마티외/김세리/열화당/2007)

열화당에 들렀다가 이 책의 플래카드에 적힌 이 문구에 반해 버려 결국 책을 샀고 아예 이 시리즈를 사 버렸다. 아름다운, 그리고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유럽에는 이런 만화도 있다. 부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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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책'이라는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면서 이제까지 트위터에서 끼적였던 '이상한 책'에 대한 트윗을 모아 본다. 정리 과정에서 조금 더 맥락을 추가한 경우도 있다.


"운명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자서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작자 자신의 일생을 소재로 스스로 짓거나, 남에게 구술하여 쓰게 한 전기."

그런데 인터넷 서점의 책에 대한 정보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고인이 남긴 저서,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 등과 각종 인터뷰 및 구술 기록을 토대로 출생부터 서거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시간순으로 정리하고 일관된 문체로 정리하는 작업을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았다. 또 퇴임 후 서거 직전의 미완성 회고록 노트를 기본으로 문체를 통일하는 작업을 거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짓지도' 않고 남에게 구술하여 '적게 한' 것도 아닌데, 이것을 '자서전'이라 할 수 있을까?

/ 2010-04-19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개정2판

출간된 지 8년 동안 개정판이 두 번 나왔다. 변화하는 정치 상황에 대한 수용이라 볼 수도 있지만 그러한 변화를 누적하지 않으면서 섣불리 개정판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글을 훼손하는 행태는 책 팔아먹기의 다른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 저자도 책도 존경하지만 책의 속성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 듯해 안타깝다. 더 이상 개정판이 안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2010-06-09


"바다생물 이름 풀이사전"

다 읽고선 우연히 책날개를 펴니 "이 책은 방일영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저술 출판되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책날개를 뜯을까 하다가 그냥 처분해 버렸다.

/ 2010-06-17


"비평고원10"

'블룩'이든 '카페북'이든 결국은 '책'일 뿐이다. 괜한 수식어 달아 놓고 새로운 척, 잰체, 하지 말자.

/ 2010-07-01


"절대지식 세계고전"

'절대'라는 수식어를 쓰는 책 치고, 제대로 된 책이 몇 권이나 되던가. 심지어 광고 카피는 '품격'을 운운한다.

/ 2010-07-05


감정 커뮤니케이션

석사 학위를 받으려는 제자를 공저자로 넣었다. 제자를 공으로 부리지 않는 '착한' 교수로 보인다. 하지만 제자의 유명세를 판매에 이용하는 '악랄(?)한 교수라는 의혹은 여전히 존재한다.

/ 2010-07-05


"삼성을 생각한다 2"

뜻 하지 않게 대박친 "삼성을 생각한다"의 후속 도서임을 표방하지만 저자는 김용철 씨가 아니라 출판사 사람들이다. 정확한 제목은 "삼성을 생각한다를 생각한다"일 것이다. 말이 이상하면 "삼성을 생각한다 이렇게 만들었다/팔았다"라고 하면 될 것을 후속 도서라 우기고 있다. 생각지 않은 대박은 돈독을 야기하는 법이다.

/ 2010-07-07


"Atlas of the World 아틀라스 오브 더 월드"

"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지도책으로 전 세계적으로 1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본문 내용은 영문으로 구성되었으며, 다루는 모든 지명은 The Times의 입장이다."라고 하는데 그렇게 번역하기가 싫었단 말인가? 그럼 책은 왜 내? 얼마든지 외서 사서 볼 수 있는 시대인데.

/ 2010-07-20


'사용법'을 제목에 단 책들 일반

요즘 참 '사용법'이라는 문구를 제목에 넣은 책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별걸 다 사용하려 든다.

/ 2010-07-21


"축구를 망친 50인"

축 구, 정확히는 잉글랜드 축구를 망친 50인에 대한 책. 그런데 인터넷 서점에서 제공하는 설명을 보면 굳이 책을 안 사 봐도 될 법하다. 지나치게 자세하다. 보도자료 만든 편집자는 자기의 선한 의도로 책을 못 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봐야 한다. 선한 것과 좋은 것은 다르다.

/ 2010-07-27


"자유는 누구의 것인가"

원래는 웅진씽크빅의 임프린트인 프레시안북에서 '자유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는데 절판되고 웅진지식하우스에서 재출간되었다. 원제를 살린 제목이긴 한데 임프린트를 정리하는 수순으로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책들이 많이 품절이다.

/ 2010-11-26


"한국 대표 시인 초간본 총서"

"초간본 모습 그대로 편집되어 출간됐다"라고 해놓고선 "표기는 원칙적으로 현행 맞춤법에 맞추었"다고 한다. 초간본 총서라는 이름값 하려면 초간본 그대로 내야 하는 게 순리이다.

/ 2010-11-26


"문교의 조선" 세트

정가 1032만 원. 인터넷 서점에서 정가의 5% 주는 마일리지만 무려 46만 4400포인트이다. 알라딘 MD 말로는 알라딘에서 파는 가장 비싼 책이라는데 주문 들어오면 상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팔 수 있다고 한다. 이 정도 가격이면 실제로 파는 책이라기보다는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과 몇 군데 대형 도서관에 납본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책으로 보인다. 실제로 후덜덜한 가격을 달고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만을 목적으로 하는 책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 201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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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 지 오래된, 그런데 최근에 재쇄를 찍은 책의 경우 읽다 보면 낯선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대부분 타이포의 문제인데 컴퓨터에 만들어진 서체가 아닌 예전 활판에서 찍어 나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책을 손가락 끝으로 만져 보면 활판 인쇄 특유의 요철감은 없이 밋밋하다. 따라서 활판 인쇄에 대한 향수에 왜 그런 요철감이 없냐고 출판사에 항의 전화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고 한다.

현재 출판단지에 있는 활판 공방을 제외하곤 국내에서 활판 인쇄하는 곳은 없다. 즉 요철감을 느끼는 인쇄는 그러한 느낌을 구현할 수 있는 인쇄기를 사용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며, 그런 인쇄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왜 그런 활판 인쇄 느낌의 타이포로 인쇄되었냐 하면, 옛날 책을 촬영해 새로 인쇄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쿽익스프레스이든 인디자인이든 컴퓨터로 책을 조판하기 전에는 전산조판이라는 입력기를 쓰던 때도 있었고, 아예 활판 인쇄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때의 자료는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호환이 되지 않는다. 즉 예전 책을 다시 찍으려면 직원이든 알바이든 책의 텍스트를 타이핑한 뒤 북디자이너가 새로 레이아웃을 잡은 뒤에 조판해야 한다. 즉 오래된 책 새로 만드려면 생고생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옛날 책을 촬영하거나 스캔해 디지털 파일을 만들고 이것을 바탕으로 정해진 판형에 그냥 앉히는 작업을 거쳐 책을 인쇄한다. 따라서 예전의 타이포가 느껴지는데 요철감은 없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 경우 오타 수정이 곤란하다. 최대한 예전 타이포의 느낌을 살리는 서체를 고르고 장평과 자간도 그에 맞게 조절해 수정자를 만들고 그것을 사진이나 필름에 덧붙여야 한다. 이거 역시 생고생이다. 따라서 생산자의 윤리 따위는 눈 찔금 감고 독자의 원성 따위는 휴지통에 구겨 넣고 그냥 배째라 인쇄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표지 정도만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 개정판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조금 양심적이면 판형이라도 교체하는데, 이 경우 여백의 미를 좀 더 살리거나 사진을 약간 확대하면 된다. 뭐 양심적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외려 더 사기치는 느낌이 든다.

범우사에서 나온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011년 개정판. 판형은 조금 커졌는데 쪽수는 93년 초판과 일치한다. 여태까지 말한 것에 의해 새로 인쇄된 것으로 보인다. 도서관 관계자에게는 새로 교정 봤다고 하는데... 글쎄... 과연 그 생고생을 했을까? 뭐 품절된 채로 있는 것보단 그래도 이게 낫다. 이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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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엔진에 '사나운 새벽'이라고 입력하면 검색 결과의 대부분은 판타지 소설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20년 전에 나와 오래전에 절판된 외국 소설이 검색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켄 폴리트의 대표작, '사나운 새벽'. 원제가 'Pillar Of The Earth'인지라 '대지의 (불)기둥', '지구의 표주' 같은 제목이 어울릴 법한데 뜬금없이 '사나운 새벽'이다. 물론 중세 말기의 스산한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지라 코끝 찡하게 추운 새벽의 사나움이 연상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나, 번역자와 출판사의 의도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어쨌든 판타지 소설이 제목으로 차용할 정도이니 제법 그럴듯한 제목임은 분명하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중학교 시절 밤새워 가며 읽었던 정말 재미있던 소설.

몇 년 전에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에 선정되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지만 한국에서는 오래 전에 절판되어 헌책방을 수소문해야 구할 수 있었다. 나는 몇 군데 헌책방을 뒤진 끝에 4권으로 된 절판본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뭐람. 리들리 스콧이 8부작 드라마, 곧 미드를 만들어 인기를 끄니 급기야 모 출판사에서 재발간했다. 이번에는 '대지의 기둥'이라는 원제에 가까운 제목으로. 그런데 권 수는 하나 줄었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 고생하며 절판본을 모으던 기억은 이제 미드 주인공의 얼굴이 박힌 매끄러운 새 판본의 표지와 맞닥뜨린다. 솔직히 별로다.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에 선정되었음에도 절판된 채로 내버려 두었던 책이 미드 붐에 편승해 재발간된다는 게. 반대로 이렇게라도 다시 세상을 보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대표작 '바늘 구멍'이라든가 속편인 'The World Without End'도 출간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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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유한 책 가운데 모 인터넷서점에서 품절 또는 절판이라 뜨는 책을 목록으로 만들었다. 사실 구매 버튼 대신 '품절' '절판'이라는 문구가 뜨면 왠지 뿌듯해지면서 안도의 한숨이 내쉬게 된다.

책이 품절 또는 절판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출판사가 망해 절판된 경우, 둘째, 출판사 측에서 책이 팔리지 않아 재고 보유로 인한 손실을 줄이고자 절판시키는 경우, 셋째 개정판을 내거나 출판사가 바뀌면서 재출간되는 경우, 넷째 출판사가 피인수되면서 새 주인이 기존의 책을 털어 버리려는 경우이다. 첫째는 어쩔 수 없다치지만, 둘째와 세째, 그리고 네째는 출판사가 돈벌이에 혈안이 돼 그리 된 걸 종종 보아 왔다. 그런 책을 볼 때마다 화가 치민다. 하지만 책이 잘 팔리면 그런 일은 대체로 없으니 역시 안타깝기는 매한가지이다.

몇 가지 절판 사유를 더 알게 되어 추가한다. 그중 하나는 타국과 자국의 출판 환경의 차를 고려하지 않은 채 외서를 계약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예컨데 하드커버와 페이퍼백 시장이 다른 미국에서는 별개의 계약을 맺는 경우가 있는데, 국내에서는 그런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섣불리 계약했다가 피눈물 쏟는 경우가 있다. 계약은 페이퍼백으로 해놓고 하드커버로 책을 내놓으면 명백한 계약 위반이다. 바다출판사가 <역사의 원전>과 <지식의 원전>이 양장본을 절판하고 반양장을 다시 내놓은 게 이에 해당하는 사례인 듯. (이 페이지에 따르면 잘못 알았던 사실.)

그리고 저자 스스로 지나간 책이 시중에 유통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절판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공저자와 다툼을 벌인 끝에 의절해 둘의 이름으로 나가는 것을 원치 않을 수도 있고, 스스로 졸저라 생각하거나 자신의 책이 지금 시일에 맞지 않는다 판단해 책이 사라지기를 원하기도 한다. 심지어 저자가 출판사(정확히는 사장)가 마음에 안 들어 절판하는 경우도 있다.

추가. 번역서의 경우 외국 에이전트들이 판권료를 무자비하게 올리는 바람에 대박으로 나가는 책이 아닌 양 군소 출판사가 감당하지 못하고 판권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읽는 것이 바로 나'라는 패러디성 문구도 있지만, 무슨 자랑질 하는 것도 아니고 내/아내가 보유한 책의 목록을 공개한다는 게 다소 추잡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올해 구매 도서 목록도 그런 맥락에서 비공개로 돌려놓았다. 이 글 또한 비공개로 전환하거나 아니면 목록 부분만 떼로 떼어낼까 하다가 일단 두기로 했다. 이는 이러한 품절/절판 도서가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열심히 노력해 장만하라는 뜻이다. 품절/절판 도서 구매는 손품이든 발품이든 열심히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 목록을 보면서 미리 품절된 만한 책을 장만해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덧.

1.
품절/절판된 책 구하는 방법으로 검색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각종 헌책방을 온라인 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열심히 발품을 파는 것. 다른 하나는 해당 출판사에 연락해 사정하는 것이다. 대개 품절된 지 얼마 안 된 책은 출판사에 보관용으로 남아 있는 게 좀 있다. 잘 보이면 득템할 수 있다. 책 구하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유입이 많아 헌책을 구하는 방법에 관한 포스팅을 따로 했다. http://camelian.tistory.com/288

2.
내가 보유한 품절/절판된 책의 권 수를 세어 보니 모두 90권이다. 흐믓하기보다는 씁쓸하다.

3.
품절과 절판의 차이를 검색어로 들어오는 유입이 좀 있다. 나도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선배에게 물으니 공식적으로 출판사에서는 절판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설사 앞으로 책을 찍어 낼 일이 없다고 해도 출판사에서는 체면치레 겸 책임 소재로부터 도망갈 요량으로 절판했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품절이라고 한단다.
다만 출판권을 소멸한 경우에는 어쩔 수 절판이라고 한단다. 예를 들면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는 녹색평론사에서 나오다 현재는 중앙북스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럴 경우에나 절판되었다고 한단다. 아니면 출판사가 아예 망하거나 꽤 오랫동안 품절 상태로 있던 경우나 새 판본을 내놓으려 구판을 폐기했을 경우 절판이라 한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으로 적용된다고는 볼 수 없다. 몇몇 출판사는 앞으로 출간할 의사가 없을 경우 절판이라고도 선언하는 듯 보인다. 예컨대 세미콜론의 신시티 시리즈 중 몇 권은 절판 딱지가 붙어 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슬쩍 일시품절 같은 면피를 붙였다가 슬쩍 품절로 바꿔 놓는데, 재고가 떨어지자마자 아예 절판 딱지를 붙여 버렸다. 이럴 때 책을 애타게 찾던 독자의 슬픔은...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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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내와 아이가 일주일 동안 처가에 가 있는 동안, 작년 이사 후 여태 하지 못했던 책 정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격이 안 맞는 책끼리 '가오' 떨어지게 등을 맞대고 있는 일도 참 뵈기 싫기도 하지만, 뭔 책이 어디 있는지 몰라 있는 책을 또 살 것 같은 불안감이 때때로 엄습했다. 매일 야근해야 하는 처지이긴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올지 모를 '그때'[각주:1]까지 책 정리는 언감생심, 그저 꽂힌 순서를 외우는 게 더 나을 게 뻔했다.[각주:2] 하지만 책 정리라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내가 책 사는 패턴을 보면 의도했든 아니 했든 '가오'라는 말을 빼놓을 수 없다. 책의 상당수가 두툼한 양장본이고, 책장에도 안 들어갈 만한 사이즈의 커다랗고 무거운 책도 제법 있다. 사는 책의 분야도 철학이나 역사를 위시한 인문학이나 교양, 미술 분야가 많다. 물론 만화책도 적지 않다. 이러니 책의 권수는 늘어나고 책 한 권 자체가 묵직한 게 많다.

2.
처가에서 돌아오는 날부터 매일 두세 시간씩 책 정리를 했다. 먼저 책을 책장에서 다 끌어내 분류했다. 천 권이 넘는 것으로 측정되는 책을 분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모든 책이 딱딱 분류되는 것도 아니다. 목차라도 읽어 봐야 분류되는 책도 제법 있으니 분류 자체가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내가 분류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망정이지 이 짓 할 짓 못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책이 다가 아니다. 한 절반쯤?


분류 다음 단계는 서가 배치. 아내는 자기가 공부할 철학과 정치사상/철학 쪽은 서재방에 놓아달라고 부탁. 그런데 이 책들이 앞서 말한 '가오'를 뽐내기에 적합한 책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서가에서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는 쪽에는 어떤 책을 놓아야 할까? 미술/사진/건축을 배치할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경제학 책을 꼽기로 했다. 그래 내가 명색은 경제학과에 8년 반이나 적을 두다가 졸업은 한 사람 아니던가. 그리고 대외적으로 폼이 안 나는 만화책은 제일 아래쪽 구석에, 그중에 대여점용 코믹스는 신발장 옆 수납장으로.[각주:3] 그리고 아내의 오래된 잡지는 베란다 구석 수납장으로. 그다음부터는 역사, 교양 책 중심으로 거실 서가를 배치했다. 그리고 문학이나 사회 분석 같은 생각보다 부부의 관심을 덜 받고 의외로 폼도 안 나는 책은 서재 서가로.

3.
물론 이렇게 배치하는 와중에 책의 먼지를 털어내면 좋으랴만, 도저히 그렇게 했다간 일주일 내에 작업을 끝내지 못할 듯. 그래서 손과 발에 먼지 때가 진득진득 달라붙는 것을 눈 감고 일단 꽂아 버렸다. 그런데 이사 와서 버려진 책장도 하나 주어 오고, 책장 외 수납장에도 넣고, 유아와 육아는 아예 서가에서 빼놓고 건넌방에 둘 생각이었는데도, 책장이 부족한 상황 발생. 뭐 그동안 겹겹이 꽂아 둔 책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이럴 수가. 결국 의도와 달리 책을 다른 책 위에 쌓아야 하는 상황 발생.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겹겹이 쌓아 뒤 책이 안 보이는 상황이 발생하면 난감. 다행히 애초에 분류를 포기한 시디와 디비디만 그리 하는 선에서 난감한 상황은 모면했다.

하지만 좀체 계통과 장르를 알 수 없이 마구 꽂아진 시디와 앞뒤로 겹겹이 쌓여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디비디는 이번 정리의 루저들. 좀 불쌍하지만 니들은 정황상 뒷전이다며 달래 주었지만 에휴. 그래도 이것들은 책에 비하면 정리는 껌이니 다시 여유가 생기면 재차 작업을 해야지. 수납박스 같은 것도 좀 구해 봐야 하고.

이제 남은 건 유아와 육아 책을 건넌방 수납 박스에 꽂아 두기만 하면 된다. 물론 집안 전체가 책에서 떨궈진 먼지로 가득해 가족 건강이 심히 위태로우므로 쓸고 닦고 해야 하지만, 그리고 은근히 발생한 정체 불명의 잡동사니도 정리해야 하고. 남은 건 오늘 밤 하루 달랑. 그래도 가능할 듯싶다.

3.5.
남은 유아와 육아 책도 정리. 잡동사니 상당수를 정리하고 청소까지 완료해도 정리할 것은 여전히. 그리고 기약할 수 없는 시디와 디비디 정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리(?)된 거실 책장. 저거 4칸치 서재방 책장도 완료. 정리는 해도 '가오'와는 거리가 좀 멀다.




4.
다시는 이사 가기 싫다.
책 좀 그만 사야겠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을 결심.

  1. 심지어 다음 이사, 나아가 몇 번의 이사를 끝내고 나서일 수도 [본문으로]
  2. 실제로 가오선생은 이렇게 한단다. [본문으로]
  3. 때마침 박쥐가 아이디어를 주었다. 그런데 수납장 사이즈가 그지같아서 겹겹이 쌓아야 하는 상황 발생. 하지만 이게 어디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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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 사회 지도 : 집약본
8점

손낙구의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 - 수도권편"의 출간 이야기에 책을 사려 했더니 정가 10만 원. 인터넷 서점에서 10% 할인받고 적립금을 고려해도 후덜덜. 그래도 자료 확보 차원과 출판사에 대한 애정을 생각해서 구매할까 했지만 아내의 반대로 끝내 구입하지 못했다. 그러다 몇달 지나 집약본이라는 이름으로 정가 1.7만원짜리 발췌본이 나왔다. 서문에 달린 출간 배경이 기가 막히다.

2010년 2월에 펴낸 <대한민국 정치 사회 지도: 수도권 편>의 10만 원이라는 가격이 독자들이 돈을 주고 사서 읽기엔 너무 비싸다는 이유에서다. 한 독자는 서민의 관점에서 쓴 책이 서민이 사서 읽기 어렵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며, 요약본이라도 내달라는 주문을 했다. 한 번은 이 책을 주제로 한 학술회의에서 필자가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30명 정도가 참여했는데, 청중은 말할 것도 없고 토론자도 이 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한 사람은 언론에 소개된 내용과 필자의 발표문만 참조했고 다른 사람은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고 했다.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은 서점에서 이 책을 손에 쥐고 살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결국 내려놓았다며 구매자의 고민을 말해 주었다. 책값 때문에 책을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어, 언론에 실린 기사를 통해서만 이 책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문제라는 생각에 서민판을 내기로 했다.

학술회의 토론자들조차 사지 않는 책. 나처럼 도서구입지원비를 받는 사람조차 구입하지 못하는 책. 도서관에서 빌려 보려고 해도 가격이 후덜덜 해도 뜻 있는 사서가 아니면 한정된 예산 때문에 선뜻 구매하기 힘든 책. 그런 책을 낸 저자도 출판사도 오판한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집약본이라는 이름으로 가격을 대폭 낮춘 책이 나왔지만 1660쪽에 B5 사이즈의 책을 440쪽에 A5로 축약하다 보니 책의 핵심 자료인 시군구별 자료는 강남구, 수원시, (인천)남구만 빼고 통째로 사라졌다. 정작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인 마포구나 곧 이사 갈 파주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볼 수 없는 것. 이게 어디 나만 그러겠는가.

저자가 수 년 동안 손품 팔아 생성한, 귀한 자료를 출판사에 내놓으라 할 수 없으니 결국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듯, 10만 원짜리 수도권편을 손 떨어가며 사든가 도서관에서 빌리든가 아니면 대형 서점에서 훑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든 생각은 POD이다. 이른바 주문자 제작 출력. 예시로 실린 강남구, 수원시, 남구 대신 자기가 사는, 또는 관심이 가는 시군구만 골라 책을 엮는 것이다. 조금 방식을 달리하면 기존의 집약본과 별개로 시군구별 예시만 자신이 골라 출력해 제본할 수도 있겠다. 적잖게 찍었을 수도권편이 안 팔리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지만, 그래도 오로지 가격 때문에 자기가 사는 동네의 지표를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손익 계산을 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현재 POD는 문제가 있다. 가장 큰 것은 POD가 결코 싸지 않다는 것. 교과서를 제작하면서 여러번 POD를 이용해 봤는데, 출력의 질은 차치하고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다. 4도 양면의 경우 쪽당 200원. 해 보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단도를 대략 100원이라 하면 440쪽의 경우 4.4만원이 나온다. 제본비야 1천 원 정도이니 별 의미 없다 쳐도 가격이 후덜덜해진다. 물론 마스터 인쇄도 가능하고 대략 쪽당 15원 정도니까 가격은 확 내려간다. 학위 논문으로 주로 취급하는 업체의 경우 10부 정도부터 가능하고 100부 이상부터는 어느 정도 할인이 되는 만큼 시도해 볼 만하다.

이렇게라도 해서 좀 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봤으면 하는데, 그저 집약본 나온 것에 감지덕지해야 할까? 기왕지사 실책을 인정하고 집약본을 낸 만큼 최소한 고려 정도는 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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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지 고전 선집이라는 고전 번역 시리즈가 있다. 처음에는 '고전천줄'이라는 이름을 달았다가 언제인가부터 '선집'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천줄'이 가지는 상징성에서 조금 자유로워지고 싶었나 보다.[각주:1] 아무튼 이 시리즈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몇 가지 논란이 있다.

1. 3600종 시리즈 완간이 목표로 (세계 최대의 시리즈인 펭귄 클래식의 두 배 규모로) 다양한 언어권의 인문, 사회, 예술, 자연과학 등 인류사의 거의 모든 고전을 번역하고자 한다.

2. 완역이 아니라 약 천 줄 분량[각주:2](신국판 기준 160쪽 안팎)으로 고전의 주요 부분을 발췌하여 번역한다.

3. 중역이 아니라 해당 언어의 전공자, 관련 분야 연구자가 직역한다.

3번이야 당연 그래야 하는 것이고, 1번의 경우 다소 마케팅적인 수사이긴 하지만 영어권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언어권과 영역에서 책을 펴 낸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문제는 1년에 천 종씩 낸다는 엄청난 계획인데, 실제로 2년 2개월(군대냐~) 동안 한 편집자가 책 백 권 만들고 퇴사했다고도 한다. 출간 2년 전부터 원고를 생산해 왔다고 하지만 저 규모의 책을 펴 낸다는 것은 사람 참 혹사하기 좋은 수준이다. 뭐 이거야 편집자들 문제라 치고.

문제는 2번이다. 저 중 600권은 별도의 시리즈 명으로 완역을 목표로 책을 내고 있다고 하지만, 나머지 3000권은 발췌 번역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가득한데 나 역시 발췌 번역에 대해서는 일단 부정적이다. 3000권 중에는 두루마기나 팸플릿 수준의 짧은 고전도 있겠지만, 수십 권에 달하는 고전도 있고 서문부터 부록까지 저자의 의도에 따라 구조적으로 짜인 고전을 그저 천 줄 분량으로 덜컥 잘라 내 번역한다는 게 뭔 의미가 있겠나 싶은 것이다. 자칫하면 겉핥기만 하고 고전을 잘못 이해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럴 바에는 고전에 대한 해설서[각주:3]가 차라리 낫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이것에 대한 변명은 있다. 실제로 고전은 유명세와 달리 사람들 대부분이 안 읽는, 아니 못 읽는 책이다. 기껏 고전을 읽는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뿐이다. 공부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야 완역된 책을 한 장 한 장 더듬으며 문장을 쪼개어 가며 책 전체를 아우르며 저자의 집필 의도, 당대의 시대/사회상, 오늘에 끼치는 의미 등을 하나하나 깨우쳐 가며 찬찬히 읽겠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차마 그런 것을 하지 못하거나 조금 해 보다 말고 지쳐서 고전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것일 뿐이라며 고개만 절래절래 흔들 뿐이다. 뭐 사실 나도 완역된 고전을 몇 권 가지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다 읽은 적은 별로 없다. 읽다가 내버려 둔 책도 꽤 된다. 공부를 업으로 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교양을 쌓거나 영혼을 맑게 하려 공부하는 수준에 그런 고전 읽기는 자학에 가깝다.

이 시리즈는 그런 점에 포착한 듯싶다. 게다가 3000권이라는 방대한 양으로 기획된 시리즈인 만큼 균일된 볼륨과 레벨을 유지하는 것도 시리즈 기획의 한 일환일 것이다. 또한 방대한 분량으로 독자의 기를 죽이는 게 아니라 이 정도쯤은 읽을 수 있잖습니까 하는 그 나름 배려의 방식일 수도 있다. 더 앞서 나가면 향후 나올 완역에 앞서 발췌역을 먼저 선보여 예수를 기다리던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맡길 수도 있다. 실제로 홍기빈은 칼 폴라니의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에 <거대한 변환>의 핵심 부분 두 장을 먼저 번역하여 내놓아 그동안 절판되어 갑갑해하던 독자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고, 후일 완역본을 내놓기도 했다. 뭐 이 시리즈도 별도로 추진되는 완역 시리즈가 있는 만큼 그런 모양새가 엿보이기도 한다. 거기에 발췌역과 달리 완역은 출판사나 번역자나 엄청난 시간과 자금이 투입된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출간해 봤자 몇 권 팔리지 않는 빈약한 고전 시장을 생각하면 완역은 그저 보기 좋은 떡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출판사는 적자를 감당할 수 없고, 편집자는 정리당한다.

이쯤 되면 발췌역이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어 보인다. 발췌역 3000권 중에서 겨우 2할뿐인 600권만을 완역하려고 계획을 세운 것은 좀 아쉽지만, 번역 한 번 되지 않은 고전을 일부나마 소개한다는 것은 의미는 '쪼까' 있어 보인다. 물론 비번역작이나 절판작만 내놓은다면 모를까 삼국사기처럼 번역도 여러 차례 된데다가 무엇보다 방대한 분량을 달랑 천 줄로 번역해 소개하는 것은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완역 시리즈가 600권에서 1200~1500권 정도로 확대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 책을 누가 사 준다고...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새는데, 고전 아무리 완역하고 감수해 내놓는다고 해도 몇 권 팔리지 않는다. 뭐 언론 좀 타고 명사가 추천해 개중 몇은 그나마 재쇄를 찍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 많은 고전은 거의 십 년 동안 초판을 구경할 수도 있다. 그러고는 초판이 겨우겨우 다 나가면 품절, 사실상 절판이다. 헌책방을 뒤지고 복사해 저작권법을 이용하고 심지어 도서관에게서 불법적 소유권 이탈을 해야 읽어야 하는 수도 발생한다. 한국처럼 인문학 도서 시장이 협소하고 빈약한 데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도서관에서 그 책을 다 사 주면 좋겠건만 그러기도 힘들다. 이 시리즈도 그런 점에서 내놓은 마케팅 제작 전략이 재미있다.

초판은 달랑 300권만 찍는단다. 2000-3000권 돌려 줘야 채산이 맞는 일반적인 오프셋 인쇄는 애당초 포기하고 복사와 크게 다르지 않는 마스터 인쇄를 한단다. 허긴 컬러로 인쇄해야 하는 고전이 몇이나 된다고. 그리고 초판에 한해서만 양장으로 제본하고, 재쇄부터는 보급판이라는 이름으로 페이퍼백으로 내는데 이마저도 마스터가 아니라 POD[각주:4]로 책을 만든다고 한다. 이러니 고작 160쪽짜리 책이 양장은 1.2만 원, 페이퍼백은 9500원[각주:5] 하는 거다. 가격은 완역 수준, 내용은 발췌역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안 팔리는 종은 그저 시리즈의 이를 맞추는 데 만족한다는 극악의 디마케팅(Demarketing) 전략도 재미있다. 가령 아프리카 문학 같은 분야의 책은 읽을 사람이 워낙 없어 초판 300권 팔기도 힘들다. 그런 책을 애써 팔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3000권을 목표로 하는 시리즈인 만큼 그것의 일부로서 구색을 맞추는 데 의미를 둔다면, 번역자의 속은 탈지언정 시리즈 전체로 볼 때에는 으레 있는 일일 것이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지만지 고전 선집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발췌역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시리즈를 기획하고 상품을 내놓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 기획은 시장을 파악하고 아이디어를 얻는 데 보탬이 되었다. 특히 단행본도 마스터 인쇄와 POD로 책을 만들어 공급할 수 있다는 점, 안 팔고 만다는 디마케팅도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 될 수도 있음은 나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1. 천 줄 분량이 안 되는 책도 있었다고 한다. 책 만들다 보면 천백 줄이 될 수도 있고. [본문으로]
  2. 현대인이 하루 동안 읽는 데 적합한 양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3. http://camelian.tistory.com/55 참조 [본문으로]
  4. 행여나 모를 분도 있을 텐데 Print On Demand라고 해서 수요자 (소량) 주문 생산이라고 보면 된다. 주문을 받으면 책을 인쇄가 아닌 출력(print)한 뒤 제본해 책을 만드는 방식이다. [본문으로]
  5. 출판일 잘 모르는 사람들은 160쪽짜리가 이리 비싸다고 툴툴거리는데, 마스터든 오프셋이든 기계를 돌리는 기본 부수가 있는지라 300부 돌려서는 적정 가격을 맞출 수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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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상 사야 할 책들이 많은데 찾다 보면 품절된 책이 많다. 이럴 때에는 출판사에 연락하거나 헌책을 사야 하는데, 전자로 가능한 책은 별로 없기도 한데다 피차 다 아는 판에 아쉬운 소리 싫어 헌책을 사기 마련이다. 그런데 헌책을 사는 것은 정말 발품을 팔아야 한다. 요새는 거의 대부분 온라인으로 검색이 가능해 예전처럼 정말 발품 파는 일은 없지만 숱하게 많은 헌책방들 뒤져 원하는 책을 찾는 것은 손품을 팔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손품 파는 것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테면 헌책방 통합검색 또는 개인 판매자 중개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일단 후자에는 알라딘 중고샵과 북코아가 있다. 시작은 북코아가 먼저 했지만 알라딘이라는 거대(?) 인터넷 서점이 서비스를 시작하니 대부분 이쪽에서 거래되는 느낌이다. 전문 헌책 판매자도 많이 입점했다. 특히 숨책처럼 웹사이트가 없던 헌책방도 입점해 책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다. 북코아는 오늘 처음 이용해 봐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하루에 5천 권 이상씩 거래되는 것을 보니 만만치 않다 싶다.

헌책방 통합 검색은 더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이용하는 것은 헌책사랑, 북아일랜드, 고고북 3곳이다. 헌책사랑은 사실 말만 통합 검색이지 일일이 헌책방 버튼을 눌러야 하기에 이용이 꺼려지지만, 알짜배기 개인 판매자를 중계해 주기도 한다. 알라딘 중고샵이 생기기 전에는 꽤 이용했다. 말만 개인 판매자이지 전문 헌책 판매자로 보이는 사람이 많다. 북아일랜드는 헌책사랑에 비해 확연히 통합검색 능력을 잘 보여 준다. 오늘 알게 된 고고북은 북코아를 함께 검색해 주기에 검색 결과가 북아일랜드보다 좀 더 많다. 북아일랜드와 고고북에 얼마나 많은 헌책방이 링크되어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북코아 검색 분을 제외하면 북아일랜드에서 검색 결과가 좀 더 많은 것으로 보아 느낌상 링크는 북아일랜드에 더 많이 되어 있는 듯하다.

대충 이 다섯 사이트에서 헌책을 검색해 보면 어지간한 책은 구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모두 놓치는 책을 구글을 뒤져 미처 링크되지 않은 헌책방에서 책을 찾기도 한다. 그러한 일은 드물 듯하니 결국 이 다섯 곳에서 책을 찾지 못하면 남은 방법은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수밖에 없다. 복사나 제본을 하는 것은 개인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이다. / 2009/09/16 14:51


추가

1. 인터넷 교보문고와 예스24가 중고 서적 중개를 시작했다. 대체로 알라딘과 비슷해 보이는데, 광화문 교보문고 한켠에 헌책방에 들어선 꼴이다.

2. 고고북에서 알라딘 중고샵과 옥션/지마켓 중고 물품 장터도 함께 검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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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이 자신의 블로그에 자신이 e북에 관해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엮은 <e-북이 아니라 e-콘텐츠다>의 텍스트를 공개했길래 링크를 모아 봤다. 첫 번째 e북 열풍이 불었던 10년 전에 나온 책이라 지금에 와서는 다소 낡은 느낌이 들지만, 한기호 소장은 자신의 관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나 역시 대체로 그의 주장에 동의하며, 현재 온라인 서점 주도의 e북에 대해서는 다소 우려된다. 거칠게 말하면 10년 전보다 e북 리더만 좋아졌을 뿐이다. 책들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만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출판에서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목적은 무엇일까, 콘텐츠의 성격에 따른 다양한 미디어를 어떤 식으로 최적화해 독자에게 공급할까이다. e북이든 디지털 미디어이든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서문

1장 e-북, '문자 르네상스' 꽃피울까?

2장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는 출판시장

3장 소설은 e-북으로 다시 꽃필 것인가?

4장 e-북은 없다 1 

5장 e-북은 없다 2 

6장 아날로그 종이책의 가능성을 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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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섭 씨가 "웬만하면 <삼성을 생각한다> 빨리들 확보해두시길. 레어 아이템 후보되겠습니다."라며 트위트를 날리길래 품절, 절판된/될 책을 사 모으는 나로서는 낼름 구매해 버렸다.  오늘 아침에 읽은 블로그 글프레시안 기사를 보니 일일 방문자가 고작 40-60 정도밖에 안 되는 나라도 광고 지면을 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로그에 광고를 일체 달지 않기로 했지만, 뭐 대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나름 공익적 성격이 있다고 판단되어 예정 광고 이미지를 게재한다. 아마 오늘 책이 도착할 텐데 바쁘더라도 리뷰는 짤막하게나마 써야겠다.






덧붙임
1. 까먹었는데 이 광고는 캡콜드 님의 글을 보고 따라한 것이다.
2. 2월 한 달 내내는 좀 그렇고, 설 연휴 전날인 12일까지 광고를 블로그 맨 상단에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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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취미를 (안 팔리는) 영화 표 사주기[각주:1]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안 팔리는 영화는 요즘 같은 와이드 개봉 시대에 단관 내지는 전국 다섯 관 이하 수준으로 개봉하는 마이너 영화를 말하는데, 소위 마니아 영화라고도 하며 예술영화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마니아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 마니아가 아니면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없는 마니아가 볼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또한 마이너 영화는 예술영화를 포괄하지만 상업 영화, 대중 영화임에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말 그대로 마이너 영화이다. 일 년에 50-70편 정도 보면서 이런 영화를 절반 정도 봐 주었으니 마이너 영화 표 사 주기라는 표현은 그다지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하지만 출산과 함께 일 년에 영화 한두 편 보는 상태로 전락했지만 몇 년 안 남았다. 과연?

원래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요즘 취미는 품절, 절판된 책 사 모으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수집이나 컬렉팅이라는 용어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희귀한 책, 고서처럼 값이 비싼 책을 사지는 않는다. 원가 대비 가장 비싸게 주고 산 게 정가 1.2만 원짜리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민음사 본을 2만 원에 주고 산 게 가장 비싸게 산 책이다. 나머지는 여러 헌책방 또는 아직 재고가 남아 있는 서점을 두루 훑어서 산다. 그리고 품절, 절판된 책을 예측(?)[각주:2]해서 미리 사 두면 알아서 품절, 절판된다. 알라딘에 만들어 놓은 리스트를 보니 126권이다. 세트로 묶인 책도 있고, 결혼 전 아내의 책을 아직 리스트에 넣지 못해 대략 20여 권 정도 더 추가될 수 있다. 적지 않은 숫자인데 그만큼 뿌듯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간혹 리스트에서 빠져야 할 이들이 있으면 왠지 일시보호 하던 아이를 입양 보내는 느낌이며, 행여나 재출간되면 죽었던 아이가 살아오는 느낌이다. 반면 이따금 구매 리스트를 훑다가 품절된 책을 발견하면 정말 안타깝다.

이래저래 괜찮은 취미 같기는 한데, '품절 절판된 책 사 모으기, 하지만 수집이나 컬렉팅은 아님'이라는 말은 너무 길다. 뭐 좋은 말 없을까?
  1. http://gile.egloos.com/3229462 글 참조 [본문으로]
  2. 인문학 서적은 다른 분야에 비해 품절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재쇄를 찍을 확률은 낮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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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노작 <사기>는 기전체 서술의 효시인 만큼 본기, 세가, 열전, 표, 지로 다소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제왕의 역사를 기술한 본기와 여러 제후의 역사를 기술한 세가, 그리고 신하나 이민족 같은 세세한 인물들의 역사를 기술한 열전을 구분함으로써 유교적 세계관에 근거해 하나의 역사를 분리해 기술한다. 아울러 표와 지로써 장대한 역사를 서술하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따로 보충함으로써 인물의 언행에 국한되는 역사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기도 한다. 물론 유교적 세계관이라는 게 장점이자 명확한 단점이기도 하지만.

<사기>라는 텍스트는 사마천 1인이 저술했다고 믿기 않을 만큼 방대하게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앞서 말했듯 기전체라는 독특한 구성 방식은 그 장대한 중국사를 한눈에 파악하기 힘들게 한다. 그런 점에서 고작 '열전'의 전부, 심지어 일부만 번역해 책으로 내놓은 일은 원전에 대한 그릇된 접근 방식이다. 아무리 <사기>에서 '열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렇다고 <사기>의 기전체식 기술 방식을 부정하고 시대 순에 따라, 즉 편년체 방식으로 재구성해 기술한 서해문집에서 내놓은 <불멸의 인간학, 사기 세트>는 애초에 사마천이 역사를 기술하면서 가졌던 문제의식을 부정하는 게 아닐까 한다. 영화 <메멘토>에서 한 인물이 겪는 이야기를 순방향과 역방향으로 교차 편집되어 있어 보는 이를 무척 혼란케 한다고 이를 시간 순으로 편집한 판본이 영화의 독특한 맛을 유지하고파 했던 팬들에게 끝내 사장되었고, <무간도> 3부작 영화를 비슷한 방식으로 재편집해 DVD에 탑재하려고 했던 한국의 출시사의 기획이 홍콩의 영화사에게서 거부당했듯, 애초에 저자가 구상한 개념을 편집이라는 이름으로 훼손하는 일은 무수한 문제점을 양산한다.

정 많은 이들에게 <사기>를 올곧게 그리고 쉽게 읽히고 싶었다면 상세한 해설과 함께 '표'를 바탕으로 사건과 인물을 배치한 레퍼런스를 제공했어야 했다. 그래서 그러한 레퍼런스로 전체적인 맥락을 읽으면서 관심 있는 부분은 해당 권이나 장을 찾아 읽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편년체 식으로 재구성한 <사기>를 읽으면 사마천이 '자객열전'이나 '유협열전' 같은 열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없다. 또한 제후가 아니었던 공자가 왜 제후들의 이야기인 '열전'에 포함되지 않고 '세가'에 등장하는지 파악할 수 없다.

다행히도 이러한 무모한 번역 방식은 책을 번역한 기획 집단의 독창적인(?) 도전이 아닌 일본의 출판사가 이미 저지른 것이다. 적어도 학문의 영역, 번역의 영역에서 한국보다 한 수 높다고 할 수 있는 일본의 대학 교수들이 허튼 짓을 한 것은 아닐 게다. 하지만 쉽게 읽히려고 원작의 형식을 허무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의문이 든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역사책을 읽는 것은 저자가 당대 또는 그 시대를 왜 그렇게 기술했는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것을 방기한 채 역사적 사건과 텍스트적 해석만을 아는 것은 역사책을 읽는 가장 잘못된 방식 중 하나이다. 굳이 초중고 12년 동안 잘못 저지리는 역사 수업을 반복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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