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는 철학이 슬픔의 의미와 가치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활동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시인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더면, 나는 80년 광주에서 마지막으로 도청을 지키다 죽어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마당극으로, 탈춤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음악가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것을 소재로 오페라를 작곡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화가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것을 벽화로 그렸을 것이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철학이란 너무도 열등하다. 스스로를 형성하는 예술의 광채에 비하면 게으르게 생각하는 철학은 그저 그것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행히도 시인도 음악가도 화가도 아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생각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들의 수난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는 것, 슬픔의 존재이유를 묻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던 것이다. - <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김상봉, 한길사) 서문에서 옮김
 
출근길에 책장을 보다가 문뜩 이 책이 눈에 띄어 일단 가방 속에 집어 넣고 지하철에서 펴들었다. 서문인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잠시 눈길이 멈추었다. 이 대목의 앞부분에서 김상봉은 이렇게 말한다.
 
형이상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의 근거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모두 80년 광주에 빚진 사람이다. 우리의 삶은 그때 거기서 죽어 간 사람들의 흘린 피 값으로 대신 사 준 것이다. 하기야 우리가 빚진 것이 어디 80년 광주뿐이겠는가? 멀리는 전봉준에게서부터 가까이는 전태일까지 자유를 향한 고통스런 장정에 자기를 바쳤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 상동
 
내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하는 것. 김상봉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철학하는 자신이 가장 먼저 의미와 가치를 성찰해야 하는 대상인 게다.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고작 할 수 있었던 생각하는 것을 택했다는 김상봉은 이런 이유로 세상에 산재한 슬픔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철학은 단 한 번도 시대를 앞서가지 못하고 언제나 시대의 흔적을 뒤치닥거리 했을 뿐이라고 한다. 사실 앞서가면 그것은 예언이며, 현실을 기록하면 문학일 게다. 훗날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묻는 것,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것, 그것이 철학이 할 일일 게다. 저 구절을 읽으며 새삼 철학의 의미를 깨달았다.
 
책의 서문을 읽으며 이토록 짠한 느낌을 받은 책은 처음이다. 진작에 펴 읽지 않았던 게 아쉬울 정도로. 그런데... 생각하는 것조차 못하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심스레 반성해 본다.
Posted by Enit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