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완벽하고 풍요로운 도시 경제를 발전시켰다. 수많은 노예가 없었다면 로마 제국의 경제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게르만족 전통에는 축노畜奴 제도가 없었다. 게르만족은 전통적으로 민주와 평등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같은 종족을 노예로 부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게르만족이 부린 소수의 노예는 모두 이민족이었다. 또한 게르만족 노예는 자기 집에서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 살 수 있었다. 중세 봉건 시대의 농노가 영주로부터 땅을 얻는 대신 세금과 부역의 의무를 지는 것과 같은 형태였다.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처럼 노예를 때리거나 가두거나 혹사시키지 않았다. 노예에게 잔혹한 형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노예제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자연히 막대한 부의 병력을 소유한 귀족이 등장하기 어렵다. 그래서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중심지를 점령했지만 선진 상업 경제와 노예제를 활용하는 도시 경제에 적응하지 못했다. 재산도 노예도 없었던 게르만족은 다시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 경제 방식으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중략)

게르만족 대이동 이후 중세 유럽이 암흑기에 빠진 이유는 게르만족 대이동이 수많은 전쟁을 촉발하고 로마 문명을 파괴했기 때문이 아니라, 게르만족이 점령한 유럽 중서부의 로마 문명지가 게르만화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로마 문명은 게르만족의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경제 및 정치 제도의 기반이 무너진 로마 문명이 게르만족에 동화되었다. 이렇게 유럽 문명이 당시 야만인이라고 불리던 게르만족 수준으로 떨어졌으니 문명의 암흑기가 찾아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동양을 대표하는 중화 문명은 노예제 경제가 아니라 장원제를 기반으로 하는 자연 경제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중원에 진출한 야만족들이 중화 문명에 쉽게 적응하고 동화될 수 있었다. 중화 문명은 여러 이민족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풍요로운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 경제와 상품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탓에 끊임없이 이민족에게 시달려야 했다.

- 역사를 뒤흔든 7가지 대이동 / 베이징대륙교문화미디어 엮음 / 현암사 / 20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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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작들을 모사한 복제품들은 놀라워요. 왜냐하면 그것들은 어떻게 보면 가장 순수하거든요. .... 말하자면 사심없는 가짜들이죠."
- "어느 박물관의 지하"(마르크-앙투안 마티외/김세리/열화당/2007)

열화당에 들렀다가 이 책의 플래카드에 적힌 이 문구에 반해 버려 결국 책을 샀고 아예 이 시리즈를 사 버렸다. 아름다운, 그리고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유럽에는 이런 만화도 있다. 부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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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미도르 파는 이제 왕당파에 대하여 자기들의 보수적 공화주의가 공화주의 원칙에 얼마나 철저한가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테르미도르 파는 군주주의에 반대하는 것만큼 민주주의에도 반대하였다. 테르미도르 파의 공화국은 자유주의적이고 부르조아적이었으나 민주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정책은 상퀼로트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물리치는 동시에 왕당파의 왕정 복고도 거부하면서 부르조아적 규범 안에서 혁명을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오른편에서는 왕당파의 공격을 받고 왼편에서는 서민 계급의 압력을 받았다. 이 공격과 압력을 적절히 배제하면서 부르조아적인 정치 체제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테르미도르 파의 정책은 시종 안정성이 없고 늘 위태로운 상태에 있었다. 그 정치 체제가 쿠데타를 반복하다가 혁명의 본질적 획득물인 1789-1791년의 성과를 확보하기 위하여 드디어 나폴레옹에게 인계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거기 있다. 이렇게 본다면, 테르미도르 파의 공화주의적 이념이라는 게 결국 '1891년 입헌 군주 정치'의 이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794년 여름에 뒤를 돌아다볼 때 국왕은 이미 시해되고 없었다. 거기서 결국 군주정을 회복할 수는 없고 공화정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말을 바꾸면, 테르미도르 파의 이상은 국왕 없는 입헌 군주주의였다. 이 모순에 해결의 길을 제공한 것이 바로 보나파르티즘Bonapartisme이다.
-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꼼뮨까지 1789-1871>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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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노고를 거쳐 획득한 비판적 합리주의의 가치, 문헌학적 기초/원칙, 경험적 적확성과 인과성에 대한 신중한 열린 방식 등을 지금 우리가 단순하게 포기하려 한다면, 이는 진정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손실이 될 것이다. 이후에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고통이 따를 것이며, 혹은 (그러한 노력에 따르는 능력이나 의지가 모자랄 경우) 처음에는 호기롭게 시작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혼란만을 초래할 뿐인 야만주의(barbarism)로 귀결하고 말 것이다. - 에른스트 트륄치,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에 대한 서평, <역사잡지> 120호, 요한 호이징하의 <문화사의 과제>에서 재인용.

위 세 가지에 덧붙여 '비판/오류에 대한 열린 태도'를 추가하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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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철학이 슬픔의 의미와 가치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활동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시인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더면, 나는 80년 광주에서 마지막으로 도청을 지키다 죽어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마당극으로, 탈춤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음악가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것을 소재로 오페라를 작곡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화가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것을 벽화로 그렸을 것이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철학이란 너무도 열등하다. 스스로를 형성하는 예술의 광채에 비하면 게으르게 생각하는 철학은 그저 그것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행히도 시인도 음악가도 화가도 아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생각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들의 수난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는 것, 슬픔의 존재이유를 묻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던 것이다. - <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김상봉, 한길사) 서문에서 옮김
 
출근길에 책장을 보다가 문뜩 이 책이 눈에 띄어 일단 가방 속에 집어 넣고 지하철에서 펴들었다. 서문인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잠시 눈길이 멈추었다. 이 대목의 앞부분에서 김상봉은 이렇게 말한다.
 
형이상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의 근거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모두 80년 광주에 빚진 사람이다. 우리의 삶은 그때 거기서 죽어 간 사람들의 흘린 피 값으로 대신 사 준 것이다. 하기야 우리가 빚진 것이 어디 80년 광주뿐이겠는가? 멀리는 전봉준에게서부터 가까이는 전태일까지 자유를 향한 고통스런 장정에 자기를 바쳤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 상동
 
내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하는 것. 김상봉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철학하는 자신이 가장 먼저 의미와 가치를 성찰해야 하는 대상인 게다.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고작 할 수 있었던 생각하는 것을 택했다는 김상봉은 이런 이유로 세상에 산재한 슬픔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철학은 단 한 번도 시대를 앞서가지 못하고 언제나 시대의 흔적을 뒤치닥거리 했을 뿐이라고 한다. 사실 앞서가면 그것은 예언이며, 현실을 기록하면 문학일 게다. 훗날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묻는 것,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것, 그것이 철학이 할 일일 게다. 저 구절을 읽으며 새삼 철학의 의미를 깨달았다.
 
책의 서문을 읽으며 이토록 짠한 느낌을 받은 책은 처음이다. 진작에 펴 읽지 않았던 게 아쉬울 정도로. 그런데... 생각하는 것조차 못하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심스레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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