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공화국
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후마니타스
 

0.
30여 년 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아파트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 이유야 빤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파트에 살 만한 형편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파트에서 살 일이 있을까 싶다. 형편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는 계층이라는 말로 바꿔 써야 맞을 듯하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아파트는 중간-중상류 계층이 집단적으로 서식하는 사회문화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1.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쓴 <아파트 공화국>은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의 아파트 문화에 대한 보고서이다. 원래 한국에서 체류하면서 한국의 아파트문화에 관심을 가진 그는 전 세계적으로 무척이나 독특했던 이 문화를 가지고 결국 박사학위를 받았고, <아파트 공화국>은 이에 바탕을 두고 한국 독자의 눈높이에 맞도록 다시 서술한 책이다. 신간소개에서는 박사학위 논문이 원문이라는 말에 프랑스인의 저작이라는 선입견에 다소 딱딱하고 고답스러울 줄 알았는데, 술술 읽히는 게 프랑스는 한국처럼 학위논문을 짜증나게 쓰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한국사람에게 "한국에는 왜 아파트가 많을까"라고 물으면 백중 구십구-팔은 "좁은 땅에 인구는 많으니까"라고 답할 게다. 내게 물어도 마찬가지일 듯. 적어도 줄레조의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러나 한국사람이 아닌 타자의 시선으로 이러한 질문을 한 줄레조는 과연 그럴까 싶었나 보다. 게다가 지도상에서 나타난 한국의 아파트단지를 군사단지라고 오해하는 동료의 말에 그는 열심히 왜 한국 땅에는 이리도 아파트가 많을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 탐구의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계층 상승 혹은 계층 확인을 목표로 하는 '중산층의 외형적 표시'라는 것이다.
 
3.
사실 한국의 아파트에 중산층이 산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사실 아파트에서 산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 자신도 중산층임을 대내외적으로 확인받는 장치이다. 박정희 정권 이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중소 상공인, 자영농 같은 기존의 구중간계급이 아니라 대기업 사원이나 고위 공무원, 전문직 종사자 등으로 이루어진 신중간계급이 늘어났고, 정부는 주로 이들을 대상으로 중대형 아파트를 공급했다. 기존의 한옥 구조와 달리 서구화된 구조의 아파트는 이들의 기호와 욕구를 충족시켜 줬고, 이러한 이들이 집중적으로 특히 강남의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는 이들의 계층을 공공히 해 주는 도구가 됐다. 반대급부로 아파트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중산층의 전유물, 혹은 중산층이 되고 싶은 하류층의 희망사항이 됐다.
 
4.
줄레조는 단순히 좁은 땅에 인구가 많아 아파트가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을 서울의 구별 인구밀도에서 밝힌다. 기존의 통례대로라면 아파트가 밀집한 강남구와 서초구 등에 인구밀도가 높아야 하나, 반대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은 하류층 밀집지역인 동대문구와 영등포구였고 서초구와 강남구는 매우 낮았다. 결국 서울의 인구밀도와 주택구조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는 이야기이며, 그저 아파트단지는 "주거공간을 조직하고 조밀화시키는 국토개발의 해결책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아파트 건설 초창기에는 하류층을 위한 중소형 아파트가 여타의 이유로 실패해 중산층을 위한 중대형 아파트 위주로 개발된 것, 그리고 장기임대보다는 임시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단기임대와 소유를 목적으로 분양 위주로 개발된 사례를 거론한다. 하류층이 밀집했던 지역(이른바 철거촌)을 재개발한 후에 그들이 아닌 타지의 중산층을 위한 중대형 아파트가 지어졌다는 사실만 봐도 줄레조가 밝히는 논리는 설득력 있다. 여기에 투자와 투기의 수단으로서 아파트가 지니는 역할은 일종의 확인사살이다.
 
5.
주로 5장에서 중산층 거주지로서 아파트를 이야기한 줄레조는 7장에서는 "아파트는 정말 '현대적'이고 '서구적'인가"라며 묻는다. 줄레조의 답은 한국의 아파트는 외형적으로는 서구적/현대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공간의 활용을 보건데 이는 한국의 전통적 생활양식과 서구적공간구조가 결합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줄레조는 "한국에서 아파트의 성공 요인은 현실로서의 아파트가 인기를 끌었다기보다는 한국인들이 '현대적 주택'에 대해 만들어 낸 이미지가 인기를 끈 결과"라고 말한다. 아파트의 생활양식에서 드러난 기술의 진보는 순수하게 한국적 산물이었지만, 아파트=서구화=현대화라는 단순한 도식 속에서 아파트에 서구화/현대화 모델로서 독점적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대척지점에는 불편했던 과거 한옥의 구조이다.
 
6.
책을 읽다 보면 줄레조는 사실을 밝혀냈다기보다는 정리했다는 게 맞다. 그동안 한국 내에서 이러한 연구가 없었던 이유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고정된 시선이었을 게다. 게다가 대부분의 내용은 이미 다들 아는 내용이지만, 그 내용들은 따로국밥으로서 분절돼 있었다. 하지만 한국사람이 아니었기에 줄레조는 한국사람들의 이 결정론적 사고방식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외국인이 왜 이런 데 관심을 갖느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힘들게 인터뷰를 하고 자료를 조사해 이러한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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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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