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 달랑 들고 화장실에 갔는데 휴지가 없다. 핸드폰도 두고 와 외부와 연락할 길도 요원하면, 남은 것은 어떻게든 종이를 구해 처리하든지 아니면 자연건조 하는 법뿐. 차라리 신문을 들고 갔으면 괜찮을 터이지만, 하필이면 들고 간 책은 새로 산(정확히는 증정받은) 단행본. 책 좋아하기에 앞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은 책을 훼손하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화장실에서 탈출해야 하는데.

1/3쯤 읽은 책을 앞뒤를 들춰 본다. 다행히도 면지가 앞뒤 두 장씩 있다. 항상 책이라는 꼴을 보면서 불필요하다 여겼던 면지. 기껏해야 저자나 역자가 독자에게 사인해 주는 칸 정도로만 인식되는 면지. 그런 이유로 일부러 면지를 두지 않는다 말하는 출판사도 있었다. 이 사족 같던 면지도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보이기 마련. 그러나 대부분의 면지는 본문 용지보다 빳빳하다. 그리고 면지 한 장 뜯어 내려다가 본문 용지까지 함께 뜯어져 책 전체의 제본 상태가 흐트러질 수도 있다.

조심스레 면지 한 장을 뜯어 낸다. 최대 4장의 면지 중 그나마 한 장이라도 건지려면 조심스레 뜯어 내야 한다. 앞서 말했듯 다른 종이까지 뜯어지면 안 되니, 천천히 조심스레 뜯는다. 한 장의 노랗고 빳빳한 면지가 몸체에서 유탈했다. 다음은 휴지 대용으로 사용하도록 종이의 빳빳함을 없애야 한다. 옛적 신문지를 구기던 시절을 회상하며 뜯어 낸 면지를 구긴다. 종이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구기되 절대 찢어져서는 안 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은 언제나 힘든 법이다. 종이를 구길 때도 마찬가지.

조심스레 구기고 구긴 끝에 좀 전의 빳빳하기 그지없던 면지는 사라지고 신문지 정도의 경도만 남은 한 장의 휴지가 나타났다. 아, 한 장 아니 두 장을 더 만들어야 하나? 아니면 최대치인 4장을 만들어야 하나? 책으로서 애초에 지닌 의미를 살려야 할까? 지금 필요한 만큼 변용을 해야 하나? 잠시 짧은 선택의 순간이 화장실을 스쳐 간다. 결론은...

책은 본디 읽히려 만들어진다. 하지만 책은 베개로도, 냄비 받침으로 쓰이며, 또한 얼마든지 무기로도 쓸 수 있다. 어찌 됐든 책은 그것의 독창적인 꼴로 세상에 나타남으로써 모종의 구실을 수행한다. 하지만 가장 비참한 용도는 이렇듯 화장실에서 뜯어짐과 구겨짐, 그리고 휴지통 속으로 사라짐으로서 자신의 생을 다하는 것이리라. 뜯겨 나간 책의 한 부분 면지에게 애도를...

'책 또는 그 밖의 무언가 > 섭씨 233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리소설 이야기  (4) 2008.09.17
뉴욕 대 서울  (0) 2008.09.17
Immaculate Conception  (4) 2008.08.21
낚시를 하려면 밑밥을 뿌려라  (0) 2008.08.20
나는 불온하지 않다!  (0) 2008.07.31
Posted by Enit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