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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13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전예수전 - 10점
김규항 지음/돌베개
대학에서 일반 교양으로 들었던 '서양사의 이해' 과목의 기말고사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예수의 죽음을 (신학적, 종교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사회적인 이유를 들어 논하라."

칠판에 적힌 문제를 확인하자마자 속으로 '아싸라비야'를 외쳤다. 그리고 그야말로 일필휘지(日筆揮之)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답안지 앞뒷면을 빼곡히 채워 가며 답을 썼다. 총 소요 시간은 약 20분. 다 쓰고 나서는 점검해 보고 그럴 일은 없었기에 바로 답안지를 제출하고 퇴실했다. 속했던 동아리가 해방신학의 영향 아래 예수 복음을 하나의 운동으로써 삶과 사회에서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동아리이다 보니, 그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은 입회한 이후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공부하고 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하의 악필을 자인하는 나로서는 100명이 넘게 듣는 교양 수업에서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듯하다. 점수는 생각보다 안 좋았다. 결석으로 까먹은 점수도 좀 있었지만.

김규항의 <예수전>은 그런 동아리 생활을 했던 나로서는 아주 식상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는 2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율법 지상의 유대교 사회를 밑바닥부터 뒤흔들었고, 그 때문에 당대 기득권 세력의 견제를 받아 그야말로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돼 죽었다는 것. 김규항은 이런 예수라는 한 사내의 삶, 언행, 죽음 따위를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그의 본 모습을 전(傳)한다. <예수전>에 드러나는 예수의 대척점은 교리의 대상이 되면서 우리에게선 죽어 버린 신이다. 그 신은 부자들의 신이며, 율법의 신이며, 타협의 신이며, 피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신이다. 하지만 김규항은 가난한 이들의 신이며, 율법을 깨 버리는 신이며, 불의에는 비타협적으로 맞서는 신이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에 현재했던 신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또한 예수는 신 이전에 한 인간이라 말한다.

이렇듯 <예수전>에 나타나는 주요 내용은 해방신학 관련 책 좀 읽어 봤거나 하다못해 이현주 목사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 같은 책을 한 번이라도 읽어 본 사람에게는 아주 식상하겠지만, 반대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되뇌이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도구로 여기는 대다수의 기독교인에게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게다. 하지만 무엇이 2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참 모습일까?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예수에 대한 신앙 또한 그렇게 믿을 게다.

김규항은 이런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대본으로 마르코 복음을 골랐다. 4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였기에 종교적 첨가가 가장 적어 예수의 본 모습을 좀 더 전하는 복음서, 마르코 복음 말이다. 거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저본으로는 가톨릭에서 나온 <200주년 신약성서>를 썼다. 이 번역본에서 예수는 반말을 하지 않는다. 반말도 존댓말도 없던 언어로 말했던 예수의 이야기를 존댓말과 반말의 구분이 엄격한 한국 사회에서 올곧게 전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개신교회에서 강변하는 유일신을 강조하는 '하나님'이 아닌 보편자의 모습을 한층 더 살리는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즉 어떻게 하면 2천년 동안 오해로 가득 찬 예수의 본 모습을 제대로 까발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는 말이다. 평소 김규항의 언행에 학을 띈 나로서도 그의 선택에는 십분 공감한다. 그가 전하는 예수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로 공감한다. 문제는 기득권화한 교회와 불화한 채 살다 보니 예수의 복음을 점차 잊고 살아가는 내 모습일 게다.

이 책에서 또 한 가지 발견한 것은 북디자이너인 안상수 선생의 몇 가지 디자인 시도이다. 파란색 합지 양장 커버에 안상수체로 제목 '예수전'을 뚫은 노란색 커버의 조화는 책의 만듦새에 관심이 생긴 내게는 재미있는 시도였다. 또한 본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끝맞춤 정렬이 아닌 왼쪽 정렬로 일관해 텍스트의 흐름을 변화를 준 시도 또한 생각해 보게 하는 시도였다. 물론 그것이 가독성을 더 떯어트릴 수 있다. 하지만 당대의 율법에 맞섰던 예수를 생각하면 양끝 맞춤의 틀에 사로잡힌 우리네 시각에 변화를 주는 그러한 시도는 유의미한 것이다.
http://camelian.tistory.com2009-05-13T11:25:130.31010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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