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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20 변환이든 전환이든, 우리 시대의 기원을 묻다 2
거대한 전환거대한 전환 - 10점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길

홍기빈이 한겨레에 연재되는 '고전 다시 읽기'에서 자신이 지금 <거대한 전환>을 번역한다고 광고한 게 한 3년 전쯤인가? 그때 몹시 열받았다. 몇주 전에 8천 원짜리 박현수의 구 번역본을 무려 2만 원 주고 헌책으로 구입했기 때문이다. 대우학술총서로 민음사에서 나온 <거대한 전환>의 구 번역본은 헌책방 계에서 그동안 레어템으로 통하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운 좋게 구입했다 했는데, 새 번역본이 나온다니... 으하하하. 물론 박현수 본은 번역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아 예전에 읽을 때 좀 고생한지라 새 번역은 기대할 만했다. 게다가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폴라니 전공자인 홍기빈이 한다니. 하지만 해가 지나도 번역본은 나오지 않았다. 홍기빈은 공부하는 사람치곤 딴따라 기질이 얼굴을 물론 글에도 쓰인 사람인지라 그러려니 했다. 사실 이 칼 폴라니의 역작은 쉬이 변역할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어설프게 나올 바에야 제대로 하는 게 훨 낫지 않겠는가? 그러다 작년에 참여사회연구소를 끼고 홍기빈이 번역본을 가지고 세미나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는 나오겠지 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역시 그 해에 출간되지 못하고 올해 여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왔다. 책을 구입하기 전에 본사에 들렀다가 마침 계간지 편집팀에 있길래 잠깐 훑어봤는데 역시 기대할 만했다.

무려 657쪽이나 되는 홍기빈의 새 번역본은 차례만 훑어봐도 우선 풍성해 보였다.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발문이 14쪽, 프레드 블록의 해제가 29쪽, 루이 뒤몽의 프랑스어판 서문 26쪽, 그리고 옮긴이 해제가 30쪽. 이러한 부록(여기에 구 번역본에도 있는 로버트 매키버의 발문 6쪽 포함)을 빼도 500쪽이 넘는데, 계간지 편집자는 박현수 본이 완역본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글쎄, 지인을 통해 캐나다에서 구매한 영어본(보스턴 Beacon Press)은 문고판에 대략 300쪽 정도였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쪽수가 늘어나는 것(구 번역본은 381쪽)과 과거의 빡빡한 조판을 고려할 때 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차례 대조만 해 봐서는 누락된 부분은 없어 보인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 보면 그 말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있을 듯.

대학 때 경제사회학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교수가 복사해 준 영어본 의 일부를 저본 삼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참고해 가며 떠듬떠듬 읽으면서 칼 폴라니에게 매료됐다. 그때 이후로 칼 폴라니에 대해 쭉 관심을 가져왔지만, 한국 땅에서 칼 폴라니는 좀체 인기가 없었다. 그의 책은 모두 절판. 나도 사회학과에서 경제사회학 수업을 듣기 전에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 당시 학과 교수들에게 물어봐도 거의 대부분이 그의 이름을 모를 것을 확신할 정도로 그는 경제학계에서 그야말로 '듣보잡'이었다.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우꼴들에게 사탄의 배후로 낙인찍힌 칼 마르크스가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 그러다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식자층에서 칼 폴라니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단체로 약 먹었나 싶을 정도로 이전에 비해서는 꽤 많이 언급됐다. 그런데 이제는 새 번역본까지 나온다니. 상전벽해요, 격세지감이다. 나야 돈 삼만여 원이 더들긴 하지만 그 정도는 투자할 만한 게 바로 칼 폴라니의 역작 <거대한 전환>이다.

책 내용 자체에 대한 리뷰는 내가 논술 교재(?)용으로
예전에 썼던 글인 '시장의 신화를 벗겨 내다'로 대신해도 될 듯하여 여기서는 구 번역본과 새 번역본을 비교삼아 좀 끼적거리려 한다. 일단 두툼해진 두께와 함께 신 번역본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표지에 쓰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이다. 이제껏 블레이크를 시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림까지 그렸다니. 헛, 천재일세. 그런데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을 표지에 썼다는 것은 이 책을 아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움을 선사한다. 폴라니는 이 책에서 블레이크의 시구를 인용해 자기조정적 시장을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라 칭했다. 산업화로 등장한 기계 때문에 제분소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로 시장이 스스로를 조정하다 못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요즘의 세태를 볼 때 블레이크의 저 시구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적확한 묘사이다. 또한 이 책의 내용은 그것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다. 또 하나 드러나는 특징은 제목의 변화이다. 원제인 'Great Transformation'을 두고 박현수가 '거대한 변환'이라 한 반면, 홍기빈은 폴라니의 다른 팸플릿에 이 책의 두 장을 번역해 실은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에서 '거대한 변형'이라 했다가 새 번역본을 내놓으면서 '거대한 전환'이라 바꿔 칭했다. 이에 대해 홍기빈은 '옮긴이의 말'에 그 사연을 밝힌다.

글자 그대로 옮긴다면 '변형'(變形)이 적당하겠으나, 이 책에서 폴라니가 이 단어를 사용하는 맥락을 그렇게 옮기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라틴어에서 왔지만 그리스어 '변태'(metamorphosis)의 동의어이며, 굼벵이가 나비로 변하는 것과 같은 급격하고도 완전한 변화, 도저히 그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변화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 또 이것이 바로 폴라니가 19세기 초나 1930년대의 급격한 사회적 형식의 변화를 'great transformation'이라고 부른 의도이기도 하다. 도저히 그전의 상태에서는 예측은커녕 상상하기도 힌든 바향으로 하루아침에 온 세상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 당시에 벌어진 사건이었으니까. (중략) 그런데 이 책에 수록된 루이 뒤몽의 프랑스어판 서문을 보면서 '전환'(轉換)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뒤몽도 이 책의 제목을 글자 그대로의 'transformation'으로 보기보다는 독일어 'Unwandlung'이나 프랑스어의 'retournement'처럼 '반전'(conversion)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나도 용기를 내어 이러한 의미에서 '변형'이 아니라 '전환'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야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변환'이라는 말을 새 번역본에도 그대로 썼으면 하지만, 루이 뒤몽과 홍기빈의 주장도 나름 설득력이 있어 보이며(정확히는 그런 것도 같고...이지만... ^^:), 구 번역본이 참조했다고 하는 일역본 역시 '대전환'(大轉換)이라는 제목을 채택하고 있다. 사실 '변환'이든 '전환'이든 이 자본주의의 빗나간 창조물인 자기조정 시장은 단기간에 인류에게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대표적인 게 허구적 상품, 이른바 토지, 자본, 노동을 상품화한 것이다. 지금의 우리야 돈 주고 땅을 거래하고, 돈을 빌리며 이자를 지불하고, 노동의 댓가로 임금을 받지만, 인류가 이것을 일상화하는 데에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급격한, 또한 대규모의 변환/전환을 남 다른 시선(시장 따위는 우연적 산물이며, 절대적인 준거도 아니다!)으로 찬찬히 설명하는 게 바로 이 책 <거대한 전환>이다. 하지만 경제학에 대한 기초적 개념은 물론 서구 근대 정치/사회의 변화사를 기본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선 쉽사리 진도 나가기 힘들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이따금 펴 볼 때도 당황스러울 정도라서 솔직히 구 번역본을 사고서도 여태 완독은 하지 못하고 중요하다 생각되는 장을 골라 읽었을 뿐이다. 역자 스스로도 "영어권 독자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 최소 학점만 이수한 나는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잠깐 훑어본 바로는 번역의 질은 구 번역본보다 좀 더 읽기 쉬워 보이니 다행이다. 또한 영어본 말미에 실린 폴라니의 추가 설명을 각 장의 뒷부분에 옮겨 배열한 것도 이 책의 난해함을 덜어 내며 읽는 데 도움이 될 듯싶다.

자, 이제는 본격적으로 읽는 일만 남았다.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http://camelian.tistory.com2009-07-20T14:37:100.31010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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