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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31 책은 읽기만 하는 게 아니다 5
세계문학전집 특별판 - 전10권 - 8점
김만중 외 지음/민음사

올초에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200권 돌파 기념으로 10종 특별판을 내놓았다. 인터넷서점에서 제공하는 이미지를 보자니 들쭉날쭉한 판형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끄럼틀 지붕 박스, 그리고 책을 고른 기준의 모호함 따위의 이유로 '얼씨구 씨잘데기 없는 데 돈 썼네'라고 넘어갔다. 그리고 후배가 그것을 살까 말까 물어봤을 때 이 같은 이유로 분명 후회할 거라 했다.

어제 민음사 대표인 장은수 씨의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저 특별판의 아주 일부만 흘겨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강의의 핵심은 책의 정의, 그리고 물성(物性)이었는데, 강사는 그러한 정의와 물성을 파괴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 특별판은 그러한 실험의 일환이라는 거다.

박스 세트라는 상품이 가져다주는 고정관념은 일단 들쭉날쭉한 판형에서 파괴된다. 컬렉터가 아무리 꽂아 두는 것을 좋아한다 해도 쫙 '가오'가 난다 해도 시리즈가 똑같은 판형으로 일률적으로 꽂아 두는 것은 인류가 수백 년째 고수해 오고 있는 '지난' 시대의 방식이다. 물론 나는 가오를 중시하기는 하지만, 발상이라는 것은 전환해 봐야 하는 거고 고정관념은 깨 봐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이 밖에도 이 시리즈는 온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서모컬러 잉크를 사용한다든지, 잉크가 번지지 않는 초고가 용지를 쓴다든지, 고전의 전형적인 텍스트 배치 방식을 바꾼다든지, 자수 기법을 도입해 수제작 장정을 하는 등 다채로운 디자인 방식을 도입했단다. 자세한 것은 민음사에서 제공하는 동영상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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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이 특별판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나처럼 들쭉날쭉한 판형부터 문제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싼 가격에 낱권 판매를 안 한다는 사람에 심지어 책에 쓸데없는 인테리어질한다는 사람도 있다. 책의 선정 기준이나 여전한 오탈자 문제야 출판사를 탓할 만하다. 하지만 책이 이러한 꼴로 나오게 된 맥락을 이해하지 않은 채 그저 돈질한다고 하는 비판은 당최 이 특별판, 나아가 이 출판사의 실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정관념의 틀에 갇힌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아주 당연하게도 이 책은 일반 대중을 위한 책이 아니다. 북리펀드로 책을 되파는 사람이나 도서관에서만 빌려 읽는 사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책을 소장할 만한 자산으로 보고, 수집 가치가 있다 싶으면 과감히 투자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물론 척박한 한국의 출판 시장에 이러한 자는 아주 극소수이다. 하지만 애당초 2000세트 한정판이라 한 것은 그런 사람의 수가 아무리 많게 잡아도 2000명을 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특별판 발행을 최종 결재한 사람의 말을 들어서인지 모르지만 이 책에 대한 호감이 높아졌다. 모든 컨텐츠가 디지털로 전환할 것을 강요받는 이 시기에, 오로지 책만이 가지는 여전한 가치를 지키고 높이는 이 시도의 결과는 앞서 말한 대중의 불평과 출판사의 적자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실험이라는 점에서는 이것은 분명 자산이 될 것이다. 적어도 한국 땅에 이렇게 북디자인을 놓고 적극적으로 실험한 예는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칭찬은 했는데... 저 시리즈를 살 요량은 없다. 값도 비싸고 둘 데도 없고 문학에도 별 흥미가 없다. 산다 해도 다른 책 살 돈 2달치를 떼려 박아야 하는데 그러기도 쉽지 않다. 다음주에 구경이나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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