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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22 지만지 고전 선집 14
  2. 2008.09.17 The Snow Goose
지만지 고전 선집이라는 고전 번역 시리즈가 있다. 처음에는 '고전천줄'이라는 이름을 달았다가 언제인가부터 '선집'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천줄'이 가지는 상징성에서 조금 자유로워지고 싶었나 보다.[각주:1] 아무튼 이 시리즈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몇 가지 논란이 있다.

1. 3600종 시리즈 완간이 목표로 (세계 최대의 시리즈인 펭귄 클래식의 두 배 규모로) 다양한 언어권의 인문, 사회, 예술, 자연과학 등 인류사의 거의 모든 고전을 번역하고자 한다.

2. 완역이 아니라 약 천 줄 분량[각주:2](신국판 기준 160쪽 안팎)으로 고전의 주요 부분을 발췌하여 번역한다.

3. 중역이 아니라 해당 언어의 전공자, 관련 분야 연구자가 직역한다.

3번이야 당연 그래야 하는 것이고, 1번의 경우 다소 마케팅적인 수사이긴 하지만 영어권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언어권과 영역에서 책을 펴 낸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문제는 1년에 천 종씩 낸다는 엄청난 계획인데, 실제로 2년 2개월(군대냐~) 동안 한 편집자가 책 백 권 만들고 퇴사했다고도 한다. 출간 2년 전부터 원고를 생산해 왔다고 하지만 저 규모의 책을 펴 낸다는 것은 사람 참 혹사하기 좋은 수준이다. 뭐 이거야 편집자들 문제라 치고.

문제는 2번이다. 저 중 600권은 별도의 시리즈 명으로 완역을 목표로 책을 내고 있다고 하지만, 나머지 3000권은 발췌 번역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가득한데 나 역시 발췌 번역에 대해서는 일단 부정적이다. 3000권 중에는 두루마기나 팸플릿 수준의 짧은 고전도 있겠지만, 수십 권에 달하는 고전도 있고 서문부터 부록까지 저자의 의도에 따라 구조적으로 짜인 고전을 그저 천 줄 분량으로 덜컥 잘라 내 번역한다는 게 뭔 의미가 있겠나 싶은 것이다. 자칫하면 겉핥기만 하고 고전을 잘못 이해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럴 바에는 고전에 대한 해설서[각주:3]가 차라리 낫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이것에 대한 변명은 있다. 실제로 고전은 유명세와 달리 사람들 대부분이 안 읽는, 아니 못 읽는 책이다. 기껏 고전을 읽는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뿐이다. 공부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야 완역된 책을 한 장 한 장 더듬으며 문장을 쪼개어 가며 책 전체를 아우르며 저자의 집필 의도, 당대의 시대/사회상, 오늘에 끼치는 의미 등을 하나하나 깨우쳐 가며 찬찬히 읽겠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차마 그런 것을 하지 못하거나 조금 해 보다 말고 지쳐서 고전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것일 뿐이라며 고개만 절래절래 흔들 뿐이다. 뭐 사실 나도 완역된 고전을 몇 권 가지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다 읽은 적은 별로 없다. 읽다가 내버려 둔 책도 꽤 된다. 공부를 업으로 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교양을 쌓거나 영혼을 맑게 하려 공부하는 수준에 그런 고전 읽기는 자학에 가깝다.

이 시리즈는 그런 점에 포착한 듯싶다. 게다가 3000권이라는 방대한 양으로 기획된 시리즈인 만큼 균일된 볼륨과 레벨을 유지하는 것도 시리즈 기획의 한 일환일 것이다. 또한 방대한 분량으로 독자의 기를 죽이는 게 아니라 이 정도쯤은 읽을 수 있잖습니까 하는 그 나름 배려의 방식일 수도 있다. 더 앞서 나가면 향후 나올 완역에 앞서 발췌역을 먼저 선보여 예수를 기다리던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맡길 수도 있다. 실제로 홍기빈은 칼 폴라니의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에 <거대한 변환>의 핵심 부분 두 장을 먼저 번역하여 내놓아 그동안 절판되어 갑갑해하던 독자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고, 후일 완역본을 내놓기도 했다. 뭐 이 시리즈도 별도로 추진되는 완역 시리즈가 있는 만큼 그런 모양새가 엿보이기도 한다. 거기에 발췌역과 달리 완역은 출판사나 번역자나 엄청난 시간과 자금이 투입된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출간해 봤자 몇 권 팔리지 않는 빈약한 고전 시장을 생각하면 완역은 그저 보기 좋은 떡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출판사는 적자를 감당할 수 없고, 편집자는 정리당한다.

이쯤 되면 발췌역이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어 보인다. 발췌역 3000권 중에서 겨우 2할뿐인 600권만을 완역하려고 계획을 세운 것은 좀 아쉽지만, 번역 한 번 되지 않은 고전을 일부나마 소개한다는 것은 의미는 '쪼까' 있어 보인다. 물론 비번역작이나 절판작만 내놓은다면 모를까 삼국사기처럼 번역도 여러 차례 된데다가 무엇보다 방대한 분량을 달랑 천 줄로 번역해 소개하는 것은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완역 시리즈가 600권에서 1200~1500권 정도로 확대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 책을 누가 사 준다고...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새는데, 고전 아무리 완역하고 감수해 내놓는다고 해도 몇 권 팔리지 않는다. 뭐 언론 좀 타고 명사가 추천해 개중 몇은 그나마 재쇄를 찍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 많은 고전은 거의 십 년 동안 초판을 구경할 수도 있다. 그러고는 초판이 겨우겨우 다 나가면 품절, 사실상 절판이다. 헌책방을 뒤지고 복사해 저작권법을 이용하고 심지어 도서관에게서 불법적 소유권 이탈을 해야 읽어야 하는 수도 발생한다. 한국처럼 인문학 도서 시장이 협소하고 빈약한 데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도서관에서 그 책을 다 사 주면 좋겠건만 그러기도 힘들다. 이 시리즈도 그런 점에서 내놓은 마케팅 제작 전략이 재미있다.

초판은 달랑 300권만 찍는단다. 2000-3000권 돌려 줘야 채산이 맞는 일반적인 오프셋 인쇄는 애당초 포기하고 복사와 크게 다르지 않는 마스터 인쇄를 한단다. 허긴 컬러로 인쇄해야 하는 고전이 몇이나 된다고. 그리고 초판에 한해서만 양장으로 제본하고, 재쇄부터는 보급판이라는 이름으로 페이퍼백으로 내는데 이마저도 마스터가 아니라 POD[각주:4]로 책을 만든다고 한다. 이러니 고작 160쪽짜리 책이 양장은 1.2만 원, 페이퍼백은 9500원[각주:5] 하는 거다. 가격은 완역 수준, 내용은 발췌역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안 팔리는 종은 그저 시리즈의 이를 맞추는 데 만족한다는 극악의 디마케팅(Demarketing) 전략도 재미있다. 가령 아프리카 문학 같은 분야의 책은 읽을 사람이 워낙 없어 초판 300권 팔기도 힘들다. 그런 책을 애써 팔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3000권을 목표로 하는 시리즈인 만큼 그것의 일부로서 구색을 맞추는 데 의미를 둔다면, 번역자의 속은 탈지언정 시리즈 전체로 볼 때에는 으레 있는 일일 것이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지만지 고전 선집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발췌역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시리즈를 기획하고 상품을 내놓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 기획은 시장을 파악하고 아이디어를 얻는 데 보탬이 되었다. 특히 단행본도 마스터 인쇄와 POD로 책을 만들어 공급할 수 있다는 점, 안 팔고 만다는 디마케팅도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 될 수도 있음은 나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1. 천 줄 분량이 안 되는 책도 있었다고 한다. 책 만들다 보면 천백 줄이 될 수도 있고. [본문으로]
  2. 현대인이 하루 동안 읽는 데 적합한 양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3. http://camelian.tistory.com/55 참조 [본문으로]
  4. 행여나 모를 분도 있을 텐데 Print On Demand라고 해서 수요자 (소량) 주문 생산이라고 보면 된다. 주문을 받으면 책을 인쇄가 아닌 출력(print)한 뒤 제본해 책을 만드는 방식이다. [본문으로]
  5. 출판일 잘 모르는 사람들은 160쪽짜리가 이리 비싸다고 툴툴거리는데, 마스터든 오프셋이든 기계를 돌리는 기본 부수가 있는지라 300부 돌려서는 적정 가격을 맞출 수 없다. [본문으로]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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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레시브락 밴드 Camel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많은 이들은 1975년작 <The Snow Goose>를 꼽는다. 폴 갤리코의 동명 소설 <The Snow Goose>를 모티브로 삼아 가사 없이 연주만 담은(여기에 관해서는 참 비극적인 사연이 있는데 뒤에서 따로 이야기) 앨범인데, 캐멀 라이브의 주된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어제 들은 이들의 첫 번째 라이브 앨범 <A Live Record>의 두 번째 시디에서는 <The Snow Goose>을 통째로 라이브 연주로 들을 수 있다. 캐멀의 연주는 라이브로 들으면 그들의 진가를 좀 더 알 수 있다.

캐멀의 <The Snow Goose>를 들은 지도 한 십 년이 넘는데, 오늘에서야 이 앨범의 원작 소설인 <The Snow Goose>에 관심이 갔다. 'A Story of Dunkirk'라는 부제를 단 폴 갤리코의 <The Snow Goose>는 영국 동부 에섹스 지방의 해안가 습지의 버려진 등대에서 세상 사람들과 절연하며 사는 외로운 장애인 레이아더(사람마다 발음이 다른데 책에는 '리야더'라고 나온다)와 그에게 상처 입은 흰기러기(스노 구스)를 데려온 어린 소녀 프리다의 우정을 다룬 어린이 단편소설이다. 영국 전역에서 100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스테디셀러란다. 하지만 이탈리아 출신의 영국 작가라는 누군가의 말에 영국식 발음인 '폴 갈리코'로 알라딘에서 검색하니 절판된 책과 일러스트가 없을 것만 같은 외서 한 권씩 딱 걸린다. 이런... 오기가 생겨 아침에 아마존을 검색했던 김에 다시 찾아보니 역시 주루룩까지는 아니어도 몇 권 나온다. 하지만 표지 일러스트가 공포물이다. 웩. 이것은 교보 외서 코너에서도 구할 수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구글로 검색하니 원문에 일러스트 몇 컷이 함께한 PDF를 구할 수 있었다. 역시 오래된 해외저작물은 PDF로 공개된 게 가끔 있다. 한 문단 정도 읽어 보니 호기심이 살살 발동한다. 이참에 이걸 한번 번역해 봐? 아내가 거의 수업료라 할 수 있는 과제로 얄팍한 책 한 권을 번역해 선생에게 제출해야 하는데, 아이 돌보는 것도 힘든데다 번역이라는 게 쉽지 않아 거의 손도 못 되고 있는데, 옆에서 함께 번역하는 것도 아내에게는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적 소양은 개나 줄 정도라 말끔한 번역은 못 되겠지만, 스토리를 보니 교과서에 실어도 될 듯싶기도 하고...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폴 갤리코'로 검색하니... 아놔 욕나온다. 있다. '갤리코'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등록돼 몇 권 검색되는 데다 내가 찾던 <The Snow Goose>도 <흰기러기>라는 이름으로 모 출판사에서 작년 말에 딱 내놓았다. 이런...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나 전에 다니던 회사를 꼬셔 출간까지 생각했던 나의 철없던 꿈은 이렇게 무너져 버렸다. 나도 용접하고 모래주머니 채워 넣고 철심까지 박아 놓을 걸.... 하여튼 이미 출간된 책이 있으니 쓸쓸한 마음은 소주 대신 커피 한 잔으로 달래고 주문. 교과서 지문으로 검토라도 해야 하니까. 그래도 호기심이 서린 책을 영문이 아닌 한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책을 읽으며 다시 캐멀의 연주를... 이번에는 스튜디오 버전으로 들어볼까?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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