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을 닮은 방 1 - 8점
김한민 지음/세미콜론

혜성을 닮은 방 2 - 8점
김한민 지음/세미콜론

혜성을 닮은 방 3 - 8점
김한민 지음/세미콜론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가 있다. 일반적으로 대개 대사의 비중이 높고 예술성을 추구한 '고급' 만화로 여긴다. 휙 보고 마는 종래의 만화와 달리 방대하고 굵직한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인물 간의 대사나 복잡한 상황 전개를 묵직하게 풀어낸 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세미콜론이나 시공사 같은 몇몇 출판사에서 펴냈는데 <300> <와치맨> 같은 영화화한 작품이 국내에도 출간되면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았으나, 기존 만화의 전달 방식과는 다르기에 국내에서는 대체로 시덥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듯하다.

일단 그래픽노블의 특징은 '코믹'하지 않다. DC코믹스나 마블코믹스 같은 'comic'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출판사에서 기획해 세상에 선보였지만, 이들은 만화답지 않게 전혀 웃기지 않는다. 이들은 대체로 어둡고 음습하고 우울하며 또한 잔인하고 마초적이다. 내러티브나 인물의 묘사도 앞서 말한 것처럼 복잡하기 그지없으며 방대하다. 게다가 대체역사라든지 (어딘가 있을 법하지만) 가상 현실을 다루면서 현실을 묘사하지도 현실을 초월하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서 만화의 테두리 안에서 출발했지만, 그래픽 노블은 사실상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로 구현한 소설, 즉 그림 소설로 보는 게 외려 적절하다. 사실 그래픽 노블도 직역하면 '그림 소설'이다. 하지만 문학 하는 사람들은 그래픽 노블을 장르 소설의 범주에 넣지 않고 그저 고급스러운 만화로만 여길 뿐이다. 물론 그래픽 노블과 만화의 경계는 상당히 모호하기에 소설로만 보는 것도 쉽지는 않다. <코르토 말테제> 같은 것은 그럭저럭 소설의 범주로 보려는 노력을 할 수 있지만 <땡땡>이나 <아스테릭스>는 어째야 하나? 답은 없다.


DC코믹스나 마블코믹스가 절대 다수이고 이따금 유럽 작품들이 번역돼 출간되긴 하지만 국내작은 손에 꼽을 만하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게 바로 김한민의 <혜성을 닮은 방>이다. 새만화책에서 나온 그의 데뷔작 <유리피데스에게>를 무척 감명 깊게 읽은데다 후속작인 어린이 그림책 <웅고와 분홍 돌고래> 역시 재미있게 본지라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혜성을 닮은 방>은 그의 이름 석 자만으로도 작품을 기대하게 했다.

그런데... 전작에서 드러나는 끊임없이 타자와 겪는 불통을 딛고 소통하려는 갖은 노력은 이 책에서 폭발해 버렸다. 게다가 '혜성'이라든지 '소우주', '에코', '그림자'처럼 우리가 일상에 쓰는 언어와 다르게 쓰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선 작품 안 세계는 모호하기 그지없다. 작품 안 인물들의 묘사나 언행 패턴 역시 독자 따위는 무시할 정도로 복잡하고 생경하다. 그나마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면 독자로서는 그나마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할 수 없었을 듯. 아니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기에 텍스트로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것일까?


전 3권으로 구성된 <혜성을 닮은 방> 시리즈는 혼잣말을 누군가가 몰래 기록해 그것을 도서관에 집적한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한 명의 관찰자는 주인공인 혼잣말의 대상을 몰래 뒤따르며 그의 혼잣말을 녹음한다. 혼잣말은 한 사람의 사유인 동시에 인류가 보존해야 할 유산이며 또한 세계를 가동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혼잣말은 기본적으로 소통하지 못하거나 거부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혼자만의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 엿듣는다면? 그것은 소통을 역으로 거부하는 일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혼잣말 대신 대화할 것을 요구하거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소통'이다. 하지만 자폐증을 겪는 주인공은 쉽사리 소통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역으로 타자가 그와 소통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일방적으로 소통하려 하면서 외려 불통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이는 그의 전작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고립된 자아와 불통하는 세계의 대립의 결정판이다.

전작의 고대 그리스의 한 폴리스, 정글 같은 단일하고 좁은 세계와 차원이 다른 작가가 새롭게 창조해 낸 복잡 모호한 가상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관찰자는 얼핏 그 밖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는 애당초 소통할 수 있을까? 그 역시 불통스러운 관계를 맺는다. 관찰자는 자꾸 개입하려 하지만 연구소라는 모종의 집단은 그것을 방해한다.


이 작품은 이러한 소통과 불통, 자아와 타자, 그리고 세계의 대결을 전혀 흥미지진하지 않게 이야기한다. 알 듯 모를 듯한 모호한 개념 설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적지 않은 인물들이 얽힌 창조된 세계 한가운데에서 독자는 갈피를 잃기 십상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앞서 말했듯 그래도 그림으로 이 모든 게 설명된다. 그런데 여기서 묘한 매력이 드러난다.

저자는 애당초 자신이 설정한 세계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싶어 하지 않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독자와 불통하려든다는 건데... 하지만 그림이라는 하나의 단초를 제시하면서 또한 소통의 장치를 마련하기도 한다. 텍스트로만 되어 있으면 독자 스스로도 제멋대로 작품을 이해하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왜곡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점에서 '그림 소설'이라는 한국 출판계에서는 독특한 방식은 적절한 표현 방식일 수도 있다.




Posted by Enits
,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상세보기
피터 박스올 지음 | 마로니에북스 펴냄
최고의 고전과 문제작을 집대성한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1001편 . 다양한 분야의 책 중에서도 소설 문학의... 인류의 정신적 지도를 그려온 1001편의 작품들을 망라하였다. 이 책에서는 소설가, 시인, 평론가,...

알라딘에서 사은품으로 온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1권>. 마로니에북스에서 나온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을 국내 발간작 중심으로 추려 사은품으로 제작했다는데... 맨 뒤편에 나온 체크리스트를 보다가 문득 발견한 사실.

'이거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소설 101권' 아냐?'

아이작 아시모프의 <나는 로봇>(이 책에 이미지도 쓰인 우리교육에 나온 번역작은 <아이, 로봇>인데...)부터 존 밸빌의 <바다>에 이르는 101권의 책은 모두 소설이다. 앨런 무어의 <왓치맨>은 만화로도 보는 사람이 많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래픽 노블'이라는 소설의 한 유형으로도 보기에 소설로 봐야 한다. 따라서 이 사은품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소설' 101권>이라 해야 옳다.

그런데 원작인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은 어떨까? 국내 비발간작도 꽤 되는 1001권의 목록을 일일히 확일할 수 없지만, 대충 훑어보니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소설' 1001권>이라 해야 옳을 듯.

이쯤 되면 문학에 별로 관심이 없는(국어 교과서 편집자 맞나?) 나로서는 눈쌀이 찌뿌려진다. 젠장 문학만 책인가? 문학 가운데서도 소설만 책인가? 투덜투덜. 가뜩이나 작년에 만든 교과서 심사본에 문학 작품이 적다는 불평을 듣고 기분이 언짢은데(문학=국어는 아니잖소!) 뭐 이래?

책 소개에는 "소설 문학 작품 1001편을 담았다" "소설이 왜 주목받는지, 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 되었는지에 대한 대답이 효과적으로 담겨 있다."라는 문장이 적혔지만, 글쎄... '책'이라 해 놓고 '소설'만 이야기하는 책은 한마디로 눈꼴시렵다. 원제 자체가 <1001 Books You Must Read Before You Die>이라 하지만, 번역해 내놓으면서 출판사에서 '편집'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뭐 일단 소설과 책을 구분 못하는 피터 박스올이라는 '문학' 교수에게 육두문자를 퍼부어야겠지만...

사족: 내가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지만, 인문학의 한 축인 문학의 영향력과 위상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소설(문학)=책으로 놓은 사고방식이 마음에 안 들 뿐이다.
Posted by Enit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