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내와 아이가 일주일 동안 처가에 가 있는 동안, 작년 이사 후 여태 하지 못했던 책 정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격이 안 맞는 책끼리 '가오' 떨어지게 등을 맞대고 있는 일도 참 뵈기 싫기도 하지만, 뭔 책이 어디 있는지 몰라 있는 책을 또 살 것 같은 불안감이 때때로 엄습했다. 매일 야근해야 하는 처지이긴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올지 모를 '그때'[각주:1]까지 책 정리는 언감생심, 그저 꽂힌 순서를 외우는 게 더 나을 게 뻔했다.[각주:2] 하지만 책 정리라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내가 책 사는 패턴을 보면 의도했든 아니 했든 '가오'라는 말을 빼놓을 수 없다. 책의 상당수가 두툼한 양장본이고, 책장에도 안 들어갈 만한 사이즈의 커다랗고 무거운 책도 제법 있다. 사는 책의 분야도 철학이나 역사를 위시한 인문학이나 교양, 미술 분야가 많다. 물론 만화책도 적지 않다. 이러니 책의 권수는 늘어나고 책 한 권 자체가 묵직한 게 많다.

2.
처가에서 돌아오는 날부터 매일 두세 시간씩 책 정리를 했다. 먼저 책을 책장에서 다 끌어내 분류했다. 천 권이 넘는 것으로 측정되는 책을 분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모든 책이 딱딱 분류되는 것도 아니다. 목차라도 읽어 봐야 분류되는 책도 제법 있으니 분류 자체가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내가 분류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망정이지 이 짓 할 짓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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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다가 아니다. 한 절반쯤?


분류 다음 단계는 서가 배치. 아내는 자기가 공부할 철학과 정치사상/철학 쪽은 서재방에 놓아달라고 부탁. 그런데 이 책들이 앞서 말한 '가오'를 뽐내기에 적합한 책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서가에서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는 쪽에는 어떤 책을 놓아야 할까? 미술/사진/건축을 배치할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경제학 책을 꼽기로 했다. 그래 내가 명색은 경제학과에 8년 반이나 적을 두다가 졸업은 한 사람 아니던가. 그리고 대외적으로 폼이 안 나는 만화책은 제일 아래쪽 구석에, 그중에 대여점용 코믹스는 신발장 옆 수납장으로.[각주:3] 그리고 아내의 오래된 잡지는 베란다 구석 수납장으로. 그다음부터는 역사, 교양 책 중심으로 거실 서가를 배치했다. 그리고 문학이나 사회 분석 같은 생각보다 부부의 관심을 덜 받고 의외로 폼도 안 나는 책은 서재 서가로.

3.
물론 이렇게 배치하는 와중에 책의 먼지를 털어내면 좋으랴만, 도저히 그렇게 했다간 일주일 내에 작업을 끝내지 못할 듯. 그래서 손과 발에 먼지 때가 진득진득 달라붙는 것을 눈 감고 일단 꽂아 버렸다. 그런데 이사 와서 버려진 책장도 하나 주어 오고, 책장 외 수납장에도 넣고, 유아와 육아는 아예 서가에서 빼놓고 건넌방에 둘 생각이었는데도, 책장이 부족한 상황 발생. 뭐 그동안 겹겹이 꽂아 둔 책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이럴 수가. 결국 의도와 달리 책을 다른 책 위에 쌓아야 하는 상황 발생.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겹겹이 쌓아 뒤 책이 안 보이는 상황이 발생하면 난감. 다행히 애초에 분류를 포기한 시디와 디비디만 그리 하는 선에서 난감한 상황은 모면했다.

하지만 좀체 계통과 장르를 알 수 없이 마구 꽂아진 시디와 앞뒤로 겹겹이 쌓여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디비디는 이번 정리의 루저들. 좀 불쌍하지만 니들은 정황상 뒷전이다며 달래 주었지만 에휴. 그래도 이것들은 책에 비하면 정리는 껌이니 다시 여유가 생기면 재차 작업을 해야지. 수납박스 같은 것도 좀 구해 봐야 하고.

이제 남은 건 유아와 육아 책을 건넌방 수납 박스에 꽂아 두기만 하면 된다. 물론 집안 전체가 책에서 떨궈진 먼지로 가득해 가족 건강이 심히 위태로우므로 쓸고 닦고 해야 하지만, 그리고 은근히 발생한 정체 불명의 잡동사니도 정리해야 하고. 남은 건 오늘 밤 하루 달랑. 그래도 가능할 듯싶다.

3.5.
남은 유아와 육아 책도 정리. 잡동사니 상당수를 정리하고 청소까지 완료해도 정리할 것은 여전히. 그리고 기약할 수 없는 시디와 디비디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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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된 거실 책장. 저거 4칸치 서재방 책장도 완료. 정리는 해도 '가오'와는 거리가 좀 멀다.




4.
다시는 이사 가기 싫다.
책 좀 그만 사야겠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을 결심.

  1. 심지어 다음 이사, 나아가 몇 번의 이사를 끝내고 나서일 수도 [본문으로]
  2. 실제로 가오선생은 이렇게 한단다. [본문으로]
  3. 때마침 박쥐가 아이디어를 주었다. 그런데 수납장 사이즈가 그지같아서 겹겹이 쌓아야 하는 상황 발생. 하지만 이게 어디냐? [본문으로]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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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디를 사다 보면 좀체 못 구하는 것들이 좀 있다. 뭐 해외에서 구해 보려면 어느 정도는 해 볼 만하지만, 환율 탓에 돈이 꽤 들고 무엇보다 예전에 아마존에 사기당한 게 있어 해외 구매에는 극소심해져 있다. 결국은 중고 음반몰을 곁눈질하거나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는 수입품을 노려야 하지만, 이것 역시 언제 가능할지 모르는 것.

언제쯤 구할 수 있을지.

Camel
- Never Let Go  
- Pressure Points - Camel Live In Concert
- Paris Collection
- On The Road 1972
캐멀의 스튜디오 앨범은 모두 갖추었고, 이제는 라이브 앨범을 하나 둘 모으고 있다.

Renaissance
- Turn Of The Cards    
- Live At Carnegie Hall
르네상스 공연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국내에서 르네상스 신품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중고도 거의 안 나온다. 카네기홀 실황은 아깝게 놓쳤다.

Pink Floyd
- Delicate Sound Of Thunder
핑크플로이드 정도는 언젠가는 수입되어 들어올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다.

Richard Wright
- Wet Dream
하지만 일개 멤버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앨범은 언제 볼 수 있을까?

Patrick Moraz
- Windows Of Time  
사실 이거보다는 빌 브루포드와 함께한 "Flags"가 땡긴다. 어쨌든 시디로 Karu를 듣기란 좀체 쉽지 않다.

Klaatu
- Sun Set: 1973-1981
중고로 나왔을 때 미적거렸더니 놓쳤다. 언제 재회할 수 있을까?

Trace
- Trace   
- Birds
영국도 이태리도 아닌 네덜란드 프로그레시브 밴드의 앨범 누가 수입할까?

Mauro Pelosi
- La Stagione Per Morire
정녕 구할 수 없단 말인가?

Dalton
- Riflessioni : Idea D'infinito  
중고가 나올 법도 한데 좀체 보이지 않는다.

Ibis
- Ibis
역시... 중고도 수입도 보이지 않는다.

Banco Del Mutuo Soccorso
- ...Di Terra
- Io Sono Nato Libero
- Come In Un'ultima Cena
아주 못 구하는 건 아니지만 가격이 ㅎㄷㄷ하다.

Jeff Buckley
- Diamonds From The Pavement: The Ultra Rare Tracks, Vol.1
- Screaming Down From Heaven: The Ultra Rare Tracks, Vol.2
- The Live Show, The Life In Between (BOOTLEG)
생전 스튜디오 앨범은 꼴랑 한 장 냈는데 별 희한한 앨범이 다 있다. 그리고 강렬하게 땡긴다.

Eric Burdon And The Animals
- Roadrunner
이 앨범에 실린 Paint It Black 라이브 버전을 강력히 듣고 싶다오.

Pete Ham
- Golders Green
위다츄의 원형을 시디로 듣고 싶은데 사라져 버렸다.

Badfinger
- Ass
중고가 있긴 한데 좀 비싸다. 그래도 살 만은 한데...

Tindersticks
- First Album
- Second Album
- Curtain
- BBC Sessions
초창기 컴필이면 될 줄 알았는데 부족하다.

Shearwater
- Everybody Makes Mistakes
- Palo Santo
- Thieves
- Golden Archipelago
은근한 매력. 딱 사기엔 망설여지지만 막상 사면 만족하는데 살 수가 있어야지.

Explosions In The Sky
- How Strange, Innocence
- The Earth Is Not A Cold Dead Place    
- Those Who Tell The Truth Shall Die    
그래도 그나마 종종 수입되는 거 같은데 최근엔 잘 안 보이네.

Eugen Cicero
- Jazz Bach
인벤션 4번에 뻑 갔지만 언제까지 MP3로 들어야 하는지.

David Darling
- Eight String Religion
맥아리 없는 다른 버전이 아니라 이 앨범의 버전을 듣고 싶다고.

High Fidelity Soundtrack
괜찮다는 썰은 무성하나 사라져 버렸다.

Pi Soundtrack
클린트 맨셀의 후속작을 들으니 이 앨범이 몹시 궁금해졌다.

하이 미스터 메모리 (Hi, Mr. Memory)
- 1집 안녕, 기억씨
정작 뮤지션조차도 한 장밖에 없다고 했던가?


추가
Focus - Moving Waves
햄버거 콘체르토 앨범 갖춰 놓고 까먹고 있었다. 포커스의 앨범은 한 장도 없었다는 것을. 컴필레이션이라도 한 장 있어야 하는데. 물론 컴필레이션 앨범에는 Eruption이 없긴 하다.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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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립워커 님의 음반몰을 뒤지다 한 앨범에 시선이 멈추었다. Darryl Way's Wolf의 데뷔 앨범 "Canis Lupus". 늑대의 학명을 타이틀로 한 이 앨범은 커버에도 늑대(개처럼 보이지만 뭐 둘은 사촌이니까)를 담았다. 오래 전에 "아트록 음반 가이드"에서 이름만 보았는데, 호기심이 생겼다. 그의 이전 밴드인 Curved Air는 몇 번 듣기는 했으니까 비슷한 스타일이 아닐까 싶었다. 마침 슬립워커 님이 국내에서 인기 얻은 곡이라며 McDonald's Lament를 소개한지라 유튜브에서 검색, 그리고 청취.

오옷! 이런 느낌 참 오랜 만이다. 바이얼린인지 비올라인지(도대체 음악 몇 년을 들었는데 둘의 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다니) 아무튼 대릴 웨이의 애절한 연주는 '만가'라는 제목을 그대로 살려 주며 심장을 저며 버렸다.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연주에 술 생각만 간절. 아, 남들 다 휴가 가는 시즌에 평생 여름 휴가 한번 못 가 본 설움이 북받치는 이런 건. 아무튼 한번에 뿅 가 버린 탓에 원래 사려고 마음먹었던 배드핑커의 "애스"를 장바구니에서 삭제. 그런데 아뿔사 며칠 지난 뒤에 다시 보니 누가 사가 버렸다. 슬립워커 님 말대로 중고는 한번 마음이 동할 때 서슴없이 카드를 긁어야 하건만.

그래도 간만에 한 장 건졌다. 물론 앨범 전체적으로 보면 이 곡 정도의 임팩트를 주는 곡은 없지만 그래도 못 들을 만한 곡은 하나 없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더군다나 이 앨범은 국내에 그리 많이 들어오지 않은 앨범인 만큼 잘 사기는 잘 산 거다.




덧.
제목의 맥도널드는 앨범을 프로듀싱했다는 이언 맥도널드를 말하는 건가? 그런데 그의 만가라고 하면 왠지 그가 죽었을 것만 같다. 물론 이언 맥도널드는 이후에 포리너로 히트쳤으니 그가 죽었을 리는 없고. 흠...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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