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엔진에 '사나운 새벽'이라고 입력하면 검색 결과의 대부분은 판타지 소설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20년 전에 나와 오래전에 절판된 외국 소설이 검색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켄 폴리트의 대표작, '사나운 새벽'. 원제가 'Pillar Of The Earth'인지라 '대지의 (불)기둥', '지구의 표주' 같은 제목이 어울릴 법한데 뜬금없이 '사나운 새벽'이다. 물론 중세 말기의 스산한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지라 코끝 찡하게 추운 새벽의 사나움이 연상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나, 번역자와 출판사의 의도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어쨌든 판타지 소설이 제목으로 차용할 정도이니 제법 그럴듯한 제목임은 분명하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중학교 시절 밤새워 가며 읽었던 정말 재미있던 소설.

몇 년 전에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에 선정되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지만 한국에서는 오래 전에 절판되어 헌책방을 수소문해야 구할 수 있었다. 나는 몇 군데 헌책방을 뒤진 끝에 4권으로 된 절판본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뭐람. 리들리 스콧이 8부작 드라마, 곧 미드를 만들어 인기를 끄니 급기야 모 출판사에서 재발간했다. 이번에는 '대지의 기둥'이라는 원제에 가까운 제목으로. 그런데 권 수는 하나 줄었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 고생하며 절판본을 모으던 기억은 이제 미드 주인공의 얼굴이 박힌 매끄러운 새 판본의 표지와 맞닥뜨린다. 솔직히 별로다.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에 선정되었음에도 절판된 채로 내버려 두었던 책이 미드 붐에 편승해 재발간된다는 게. 반대로 이렇게라도 다시 세상을 보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대표작 '바늘 구멍'이라든가 속편인 'The World Without End'도 출간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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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릿 조핸슨의 농염한 듯하면서도 특유의 어리숙하고 맹한 표정을 커버에 담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사운드트랙의 일본반에는 다른 반에는 없는 50 Floors Up이라는 곡이 추가로 수록되어 있다.

나직하면서 감미롭고 조금은 권태로운 듯 무미건조하게 딩동 거리는 건반 음이 3분가량 흘러나오다 한 8분 정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12분 58초라는 러닝 타임을 볼 때 히든 트랙에서 자주 써먹던 공백 처리가 아닐까 싶었는데, 갑자기 스칼릿 조핸슨이 '레이디스 앤 젠틀먼 블라블라' 하더니 이내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하핫. 영화 본 사람은 알겠지만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록시 뮤직의 More Than This, 그리고 빌 머레이가 가라오케에서 이 곡을 지독히도 못 부른다. 영화 내내 그리고 최근 십여 년 동안 여타의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보여 준 권태의 극에 달한 표정과 자세, 말투 등을 한데 녹여 내어서. 이쯤 되면 제프 버클리가 Songs To No One(1991-92)에서 레드제플린의 Kashmir를 장난친 건지 아니면 조롱한 건지 코믹하게 부른 것과 비등하다.



비디오 버전은 저작권 관계로 짤렸다. 하하. 당연한 거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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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 시절 해외 음악쪽은 에어 서플라이에서 이내 뉴트롤즈나 킹크림슨 같은 프로그레시브 계열 밴드로 관심사가 넘어갔지만, 국내 음악쪽에서는 넥스트 2집에 잠시 눈이 돌아간 것을 빼면 늘 015B가 1순위였다. 뿅뿅거리는 리메이크를 앞세운 5집에 화딱지가 나기 전까지 015B의 음악은 적당히 있어 보였고 적당히 매끄러웠고 적당히 세련됐었고, 적당히 실험적이었다.

뭐 서울대 출신이라는 타이틀에 홀린 감도 분명 있겠지만, 취향상 필연적으로 서태지를 좋아할 수 없는 내게 015B는 하나의 경전이었다. 물론 모든 곡을 다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정석원이 여자에게 채일 때마다 썼다는 매끄러운 멜로디의 발라드 넘버는 싫어하는 척했지만 몰래 흥얼거리기엔 딱 좋은 곡이었고, 지금은 '어장관리'라는 말로 정리되는 개념을 선구적으로 읊은 곡도 좋았다. 그리고 그네들이 있어 보이려고 노력한 연주곡이나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적당히 사탕발림한 곡도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좋아하기는 했다.

인기를 얻어 가면서 이들의 장난질은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고, 급기야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온 5집은 자신들의 곡보다 리메이크 곡을 앞세우는 자기 존재 배신 행위로 영 아니었다 싶었다. 게다가 대학에 올라가서는 산울림과 프로그레시브 계열 음악 듣기조차도 버거웠던 관계로 015B는 차차 관심에서 멀어졌다. 음울한 디스토피아를 좋아하는 내가 좋아할 만한 6집도 거의 들어보지 못하고 일단 패스. 그리고 밴드 해체와 장호일의 개그짓. 하하. 그러고는 015B는 내게서 사라졌다.

나이가 먹으니 옛 노래가 좋아져 한두 장씩 사 보려던 차에 015B도 들어보려 했더니 웬걸 죄다 품절이다. 세월이 흐르면 이렇게 되는 건가? 내 기억으로는 대영기획에서 음반을 냈는데 핑클도 내보낼 정도로 잘 나가던 음반사가 망했나? 그래도 중고는 간간히 볼 수 있었지만 딱히 중고로라도 꼭 사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다 다른 앨범을 중고 시장을 더듬다가 그들의 베스트 컬렉션 앨범과 4집이 있길래 일단 구매했다. 2, 3집은 너무 비쌌고 1집은 없었으며, 6집은 종수가 많아 다음 기회에 사기로 한 만큼 나쁘지 않은 구매. 당연히 파이널 판타지 앨범과 7집, 싱글처럼 완연히 맛 간 앨범과 연주력을 신뢰할 수 없는 라이브 앨범은 살 일이 없다.

중고 음반을 받아들자마자 회사에서 워크숍을 가야 해서 차에서 틀었다. 베스트 컬렉션의 첫 곡 '텅 빈 거리에서'가 나오자마자 옆자리와 뒷자리에서 나오는 탄식. 77년생과 80년생인 회사 후배들에게 015B와 이들을 가장 대표하는 곡인 '텅 빈 거리에서'는 분명 옛 추억을 상기시키는 매개체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곡을 부른 이가 윤종신이라고 하니 안 믿는 사람이 있다. 하하. 뭐 84년생 듀오에게 윤종신의 소싯적 약간 빠다 바른 미성은 이른바 리즈시절일 테니. 뭐 요즘 아해들에게 윤종신은 심하면 라디오스타 DJ일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네들이 코흘릴 적에 나온 노래를 두고 놀라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만큼 015B는 정말 옛스런, 지나간 추억일지도 모른다.

'텅 빈 거리에서'를 두고 탄식했던 77년생 후배는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에 재결성 기념 공연도 친구랑 다녀왔다고 하는데, 둘 다 티켓값 10만원이 아까웠다고 한다. 그럴 만한 게 그들도 이제는 늙어 버렸던 것이다. 설사 그네들의 실력이 아무리 좋다 치더라도 그간의 공백을 메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뭐 실력보다는 당대의 트렌드를 절묘하게 잡아내 세련되게 상품으로 포장한 게 그네들이 히트한 이유란 평도 보긴 했다. 뭐 그래도 오랜 만에 그네들의 음악을 들으니 유쾌했다. 비록 지금 들으니 손가락이 오그라드는 같잖은 가사는 애써 들은 척하지 않았지만. 하지만 두 번은 몰라도 '텅 빈 거리'에서 정도를 빼곤 세 번 이상 듣기는 힘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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