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니 '전기현의 시네뮤직'에서 '석양의 갱들'이 나온다. 10년 전쯤 본 영화. 엄청나게 반복되는 영화의 테마곡도 무척 아름답고, 멕시코 혁명의 상황 맥락이나 두 주인공의 우정도 멋있게 묘사된 영화다. 후일 걸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나오는 바람에 나중 가서는 '그냥 영화'가 되어 버린 영화. 어쩌면 민중 혁명을 본격 다루는 바람에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려서인지 '갱들'이라는 번역명이 붙고 영화 자체도 평가절하 당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신 세 개가 떠오른다. 출발비디오 여행의 씬세개를 베낀 것 같아 보이지만 그냥 넘어가자. 그냥 우연이다.

첫 번째 신은 혁명군 캠프에서 존과 후안이 혁명에 관해서 토론하는 장면. 존은 폭파라는 전문 기술과 형색으로 보아선 부르주아 출신 인물. 반면 후안은 좀도둑 출신의 말 그대로 가진 거 두 쪽밖에 없는 극빈 프롤레타리아. 후안은 혁명을 이야기하는 존에게 혁명은 가난한 이들은 총알받이로 내놓는다며 일갈한다. 압권인 장면은 후안의 일갈에 존은 데꿀멍하고선 읽고 있던 책을 집어던진다. 아나키스트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의 책.

두 번째 신은 존의 회상 장면. 존은 아일랜드공화군(IRA) 출신으로 멕시코로 망명온 혁명객. 그가 멕시코로 넘어온 것은 고문 끝에 밀고한 절친과 그를 앞세웠던 영국 군인을 사살해서다. 영국군이 바를 수색하는 동안 존의 절친은 IRA 당원을 한 명 한 명 찍었고 존은 뒤돌아선 채로 거울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존과 절친은 거울을 통해 눈길이 마주치고 둘 간에 복잡한 시선이 오간다. 그리고 존은 영국군을 사살하고 밀고자마저 처단한다.

세 번째 신은 영화의 오프닝. 황무지 한가운데서 부자와 성직자가 탄 고급 마차에 올라탄 후안은 가난한 이들과 혁명을 조롱하는 기득권 세력의 조롱을 한 몸으로 받는다. 이때 감독은 음식을 먹으면서 후안을 모욕하는 가진 자들의 입을 노골적으로 클로즈업해 보여 준다. 극장에서 큰 스크린으로 보면 상당히 불쾌감을 주는데 정말 '처묵처묵'이라는 표현이 딱이다.

세 신을 관통하는 것은 좌빨 감독으로 알려진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혁명에 대한 시선이다. 멕시코 혁명은 반쪼가리 혁명으로 끝났고, 그 후로 이어진 10월혁명을 위시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역시 서구 지성인들이 보기에는 그리 탐탁지 않은 결과만 낳았을 뿐임을 레오네 감독은 이 영화에 반영했다. 냉소적 시선으로 혁명의 낭만성을 제거한 감독이 영화에 불어넣은 낭만성은 황무지를 달리는 오토바이로 상징되는 서부의 추억이다. 전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에서 태평양까지 잇는 철도를 통해 서부의 시대를 종결시켰지만, 황무지를 말 달리던 서부의 향수를 존의 오토바이로 되살려 냈다. 사실 영화에 나오는 지금과 같은 스타일의 오토바이는 멕시코 혁명이 끝난 한참 후인 제2차 세계대전 무렵에야 실용화되었다. 하지만 다시 말을 태울 수는 없으니 고증보다는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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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대를 가면서부터 소위 '민가', 민중가요를 들을 일도 부를 일도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민중가요는 듣는 음악이 아니라 부르는 노래이고, 그 노래를 부를 때에는 집회/시위 현장이나 술자리에서였던 만큼 부르던 노래는 다소 '센' 노래였다. 후배들은 세대가 그러하다 보니 그런 센 노래보다는 내 기준으로 말랑한, 서정성 짙은 노래[각주:1]를 좋아했지만, 내 기준으로는 그 노래들은 민중가요일지는 몰라도 '민가'는 아니었다.

복학생 시절에는 예전만큼 집회/시위에 나갈 일도 그리 많지 않았고, 때마침 유행(?)한 촛불집회에서는 일전에 부르던 민가를 부를 일이 거의 없었다.[각주:2] 그리고 직장 생활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부터는 아예 집회/시위에 나갈 일은 거의 없었으니 민중가요와는 그야말로 빠이빠이.


2.

불렀던 것과는 달리 '듣는' 음악으로서 민중가요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그래도 '천지인'과 '노래마을'를 꼽을 수 있다. 노찾사, 안치환, 정태춘은 좀 애매... '천지인'은 아직 테이프를 가지고 있고, 더럽게 비싸긴 하지만 중고 시디를 수배할 수 있는 데 반해, '노래마을'은 시디는커녕 테이프도 좀체 구경을 할 수가 없다.[각주:3]

사정이 그러다 보니 듣는 음악으로서 또는 서정적인 민중가요로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한줌 햇볕이 될 수 있다면'을 듣기란 힘들다. 물론 피엘송 등을 통해 mp3파일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시디든 테이프든 실재하는 미디어로 들어야 음악 같은 내 관점에선 아쉽기 그지 없다.


3.

그러다 발견한 게 노래마을을 비롯해 노찾사, 정태춘, 안치환 등의 다소 서정적인 민중가요를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우리시대의 노래>이다. 솔직히 수록곡 면모를 보면 '우리 시대'라기보다는 '그 시대'이겠지만, 내가 그토록 찾던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한줌 햇볕이 될 수 있다면'이 수록되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었지만, 발견했을 때에는 그마저도 이미 품절 상태. 그 후 꽤 시간이 지나서 중고라도 겨우 구할 수 있었으니 다행.

노찾사의 '그날이 오면'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시디를 들으니 가물했던 옛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집시 판의 유일한 승리의 기억이었던 95년 가을에 정말 질리게 불렀고 그 후로도 꽤 불러 댔던 '오월의 노래', 민중의례 때마다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 노동자 집회의 페이버릿 송 '철의 노동자', 진뱀형의 절규가 기억에 박혀 있는 '잠들지 않는 남도' 등 익숙한 노래가 이어진다. 의외의 발견은 정말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백두산'. 예전에는 지나치게 경쾌하다고, 감상적인 통일 타령은 별로다고 불러야 할 때 부르긴 해도 좋아하지 않았던 곡이었지만, 간만에 들어보니 무척 신선하다. 부를 때마다 함께하던 율동이 기억 날 리는 만무하지만...


4.

운동권이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지금은 더더욱 동떨어진 채 살고 있지만, 남들 보기에는 운동권 티 팔팔 나는 내 모습을 보건대 <우리시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더더욱 티 낼 것만 같다. 하지만 응4를 보면서 열광했듯이 <우리시대의 노래>는 술자리 뒷담화처럼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90년대를 기억하게 하는 소중한 매개체이다. 물론 단절의[각주:4]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우리 시대'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민망하지만... 



덧.

'백만년'만의 블로그 포스팅. 계정도 휴면 상태였고, 웹서점의 서지 정보 가져오는 것도 까먹었다.

페북에 올릴까 하다가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블로그에 포스팅한다.

  1. 예를 들면 조국과청춘의 '우산'이라든가... [본문으로]
  2. '아침이슬'이 어찌 민중가요던가? [본문으로]
  3. 테이프는 아직도 개인 소장하는 사람이 있긴 할 테지만 1, 2집 시디는 발매나 되었나? [본문으로]
  4. 사실 한때 좋았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맥락의 '리즈시절'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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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완벽하고 풍요로운 도시 경제를 발전시켰다. 수많은 노예가 없었다면 로마 제국의 경제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게르만족 전통에는 축노畜奴 제도가 없었다. 게르만족은 전통적으로 민주와 평등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같은 종족을 노예로 부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게르만족이 부린 소수의 노예는 모두 이민족이었다. 또한 게르만족 노예는 자기 집에서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 살 수 있었다. 중세 봉건 시대의 농노가 영주로부터 땅을 얻는 대신 세금과 부역의 의무를 지는 것과 같은 형태였다.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처럼 노예를 때리거나 가두거나 혹사시키지 않았다. 노예에게 잔혹한 형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노예제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자연히 막대한 부의 병력을 소유한 귀족이 등장하기 어렵다. 그래서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중심지를 점령했지만 선진 상업 경제와 노예제를 활용하는 도시 경제에 적응하지 못했다. 재산도 노예도 없었던 게르만족은 다시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 경제 방식으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중략)

게르만족 대이동 이후 중세 유럽이 암흑기에 빠진 이유는 게르만족 대이동이 수많은 전쟁을 촉발하고 로마 문명을 파괴했기 때문이 아니라, 게르만족이 점령한 유럽 중서부의 로마 문명지가 게르만화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로마 문명은 게르만족의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경제 및 정치 제도의 기반이 무너진 로마 문명이 게르만족에 동화되었다. 이렇게 유럽 문명이 당시 야만인이라고 불리던 게르만족 수준으로 떨어졌으니 문명의 암흑기가 찾아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동양을 대표하는 중화 문명은 노예제 경제가 아니라 장원제를 기반으로 하는 자연 경제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중원에 진출한 야만족들이 중화 문명에 쉽게 적응하고 동화될 수 있었다. 중화 문명은 여러 이민족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풍요로운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 경제와 상품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탓에 끊임없이 이민족에게 시달려야 했다.

- 역사를 뒤흔든 7가지 대이동 / 베이징대륙교문화미디어 엮음 / 현암사 / 20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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