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이 말하는 공부법
① 1년 동안 읽을 책을 정한다.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분야에서 가장 기본적인 저작 1권을 정한다.

② 3공 노트와 펜을 준비한다.

 
③ 책을 읽어 나가면서 모르는 개념이 있으면 표시해 둔다.

 
④ 표시해둔 부분에 대한 설명을 사전에서 찾아 3공 노트에 옮겨 적는다. 이렇게 하면 이 책을 읽기 위한 나만의 용어집이 만들어진다.

 
⑤ 이렇게 내용을 정리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다시 읽어 본다. 이전과 비교했을 때 책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깊어졌음을 깨달을 것이다.

 
⑥ 1번 더 읽어 본다. 그렇게 모두 3번을 읽으면 이 책에서 웬만한 것들은 모두 이해가 될 것이다.

 
⑦ 표준저작은 서브저작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다. 서브저작은 1년에 10권 정도를 선정한다. 한 달에 한 권 읽을 정도의 분량이다. 책 선정은 표준저작과 관련 있는 것으로 하는데, 표준저작의 각 챕터에 대응되는 책들로 한다.

 
⑧ 표준저작의 1챕터를 읽은 후에 서브저작을 같이 읽어 나간다. 이해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⑨ 서브저작 역시 노트정리를 한다.

 
⑩ 그렇게 공부하면 정리한 노트들이 쌓일 것이다. 그것이 내 재산이 된다.
 
마감 관계로 마지막 수업을 듣지 못해 포드캐스팅과 필사본으로 개인학습을 해야 하지만, 오독이 있다는 말에 절망 말고 받지도 않은 과제 첨삭에 기죽지 말고 7강에서 언급된 공부법에 의해 조만간 주제 하나를 잡아 찬찬히 파고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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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블로그에 ‘호모아날리티쿠스Homo analyticus’, 즉 ‘분석하는 인간’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이 말은 내가 뭐든지 혹은 누구든지 매번 분석하려 든다는 주위 사람들의 관찰을 토대로 내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 본, 즉 나를 정의하는 개념이다. 내게 ‘왜?’라는 질문은 중요하다. 사건의 인과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설사 그것이 불확정성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에 따라 사람, 사건, 사물, 사상 등을 알려 노력하는 ‘분석하는 사람’인, 내게 이 ‘왜?’라는 질문은 지적활동의 알파이자 그것으로부터 무언가 결과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오메가이기까지 하다. 나는 이 ‘왜?’라는 질문을 통해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한다.
 
이런 내게 정보의 습득은 몹시 중요하다. 이때 정보는 아마 분석의 도구이자 틀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량의 정보를 습득해 왔다. 그것이 책이든, 대화이든, 인터넷 검색이든 간에 나는 다양한 방법으로 지금 이 순간도 정보를 습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아는 것만 많은 ‘잡학다식雜學多識’이라고 하지 현명하거나 깊이가 있는 ‘박학다식博學多識’이라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여러 방면에 걸쳐 체계가 서지 않은 잡다한 지식이나 학문”라는 ‘잡학’의 정의에서 드러난다. 즉 내가 습득하는 지식은 깊이가 얇고 체계가 서 있지 않다는 게다. ‘잡스럽다’는 말이 그리 유쾌하지 않게 들리는 사회통념에 비춰 볼 때 나는 주위 사람들의 이런 평가가 그리 반갑지는 않다. 결국 나는 변화의 욕구를 느낀다.
 
어떻게 하면 ‘잡학’이 ‘박학’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이 점에서 내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습득하는 무수한 정보를 적어도 습득한 이후에는 나름 체계를 세워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단순히 여기에 그친다면 그것은 그저 체계화가 잘 된 지식의 총합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지식 내면에 자리 잡은 근본 원리라든지 그것들의 연관관계를 좀 더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야 ‘잡학’의 단계를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여기서 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박학’으로 보인다고 해서 다는 아닐 게다. 하지만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는 부단한 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한 발자국 더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노둣돌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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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숙제가 있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 덕분에 저녁은 패스... --;
 
 
Q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과 데카르트의 자연관을 간략히 비교 설명하라.
 
A :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라본 자연은 근본적으로 살아 있는 어떤 것으로서 존재하는 우주로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만물을 말한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 즉 운동에는 본질 자체가 변하는 본질적 변환Substantial Change과 본질은 변화하지 않고 표피나 현상만 변화하는 우연적 변환Accidental Change가 있다고 말했다.이런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계절의 변화도 하나의 운동이다.
반면 데카르트가 바라본 우주, 즉 자연의 변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운동 중 우연적 변환만이 이루어지는, 위치만 이동하거나 양이 변하는, 지금으로 보면 물리학적인 변화만을 말한다. 그렇기에 데카르트에게 자연은 총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가 아닌 기계적인 운동/변화만 일어나는 공간이다.
 
이 정도 외어 가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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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선생은 스터디를 "좌장에 대한 절대 복종과 무한 성실을 맹세하고 그 실천을 수시로 점검받아야만 참여할 수 있는, 신체 단련을 겸한 학적 행위"라며 단호하게 정의내렸다. 무엇 좀 공부해 보겠다고 몇 사람 모여 책 한 권 끼적끼적 읽어 봤자 It seems to be...를 남발하기 십상이라 투여하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얻는 소득이 별로 없기에, 좌장의 카리스마 있는 영도 아래 뇌가 근육질로 가득찰 정도로 빡새게 공부해야 애초에 스터디를 통해 각자 공부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일 거다.

허 나 내가 사실상 좌장 역할을 맡고 있는 경제학 스터디 모임은 그렇지 못했다. 경제학사를 기반으로 하면서 주요 사상가의 원전을 함께 읽어 가기로 했던 스터디 모임은 반 년 조금 넘는 동안 툭 하면 바쁘다 해서  미루고, 아프다 해서 빼먹고, 어렵다 해 넘어가고를 반복하면서 실제로 내용도 It seems to be...를 남발했다. 그것도 격주마다 하기로 했던 초심은 어느덧 봄바람에 실려 가고 3-4주에 한 번 하기도 하고 통째로 한 달을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해 반 년 동안 겨우 얻은 성과는 <국부론>의 1, 2권을 읽으며 고전학파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시원을 대충 정리해 보는 데 그쳤다.

이래 선 안 된다 싶어 좌장으로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기 위해 내가 꺼내든 특단의 수단은 고전학파 경제학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이다. 네 명의 모임원이 각자 고전학파 경제학과 관련해 주제를 설정하고 이에 대해 간단한 페이퍼를 쓰고 이를 발표하는 것. 실제 학부 전공과정에서는 일상적인 것이지만 그냥 대학 졸업하고 경제학 좀 공부하려 하는 비전공자들에게 이것은 약간은 가혹한 일. 그래서 여지없이 튀어나오는 반발의 목소리. 하지만 나는 이쯤에서 그동안 공부한 내용 좀 정리해 보자는 마음에서, 그리고 이것을 발판 삼아 향후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야기되는 뇌의 근육질화에 대해 미리 대비하자며 세미나를 강요했다. 결국 모임원들은 마지못해 좌장에게 절대복종 하기로. 다만 무한성실 할지는 모르겠다.

다음 모임에서 각자 준비할 세미나 주제를 발표해야 하는데, 아직 나부터도 주제를 잡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 경제학-철학 수고 강의 때 읽어 가야 할 텍스트를 읽으며 뭔 말인지 헤매는 통에 학부 때 너무 놀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마당 - 수업시간에 아무래도 내가 타겟이 될 터인데 이러다 공만 떨구는 조재진 꼴이 될 듯 - 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그리고 보니 함께 읽어 가던 백승욱의 <자본주의 역사강의>도 읽다 멈춘 지도 꽤 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에어컨 바람 쐬면서 공부하는 게 가장 보람차게 여름을 보내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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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강유원 씨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처음 하는 말이 철학은 암기하는 학문이란다.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 개뿔... 무조건 외어야 한단다. 비판적 창의적은 교사들이 학생들 가르치다 힘이 부치니 지어낸 거란다. 물론 정황상 교사들을 비하하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기본적인 개념과 핵심 텍스트 정도는 철학하는 데 외어야 하는 상황을 설명하는 듯. 아무튼 이 말로 강의를 시작하더니 매 강의마다 쪽지시험을 본단다. 어럽쇼 했는데, 쪽지시험은 아니고 지난 강의에서 핵심 문장을 외워 오고 문간에서 지키고 있다가 외우는 사람만 들여 보낸단다. 못 외우면? 바로 환불처리 해 준단다. 하하...
 
생각보다 유쾌한 사람이다. 사실은 유쾌한 사람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지난 직장에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게 저지른 악행은 치를 떨게 했다. 뭐냐고? 사내 강의실이 있었고, 강유원 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강의를 하러 왔었는데 문제는 강의실 맨 앞, 즉 강사가 떠드는 곳이 벽을 두고 내 옆이었고, 거기엔 벽만 있는 게 아니라 문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떠드는 소리는 문틈 사이로 숭숭 나왔고, 마감 스트레스로 가득했던 나는 그 소리가 몹시 짜증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지금 회사에서 강의실은 위층이라 전혀 무관. 하하...
 
아무튼 어제 강의의 핵심은 철학의 의미를 찾으며, 철학의 어원 중 일부인 sophia의 개념을 설명하며 동시에 과학과 철학의 관계를 재정리하며 철학의 의미를 연관시키는 것. 그래서 다음 강의 때 외워 올 문장은 다음과 같다. 공장장님 외워 오세요. ^^;
 
지혜는 사실의 현상적인 분석과 기술이라기보다는 그 내면적 근거와 본질 및 전체적 의미연관을 통찰하여 보다 근원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강유원 씨는 자신은 이렇게 바꿔 써야 한다고 말했다.
 
지혜는 사실의 현상적인 분석과 기술에 바탕을 두고 그 내면적 근거와 본질 및 전체적 의미연관을 통찰하여 보다 근원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분석과 기술은 철학하는 데 해서는 안 될 게 아니라 기초라는 것이다. 다만 그것만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편집자로서 나는 저 번역투의 문장을 다음처럼 바꿔 보려 한다.
 
지혜는 사실을 현상 그대로 분석하고 기술하는 데 바탕을 두고, 그 내면의 근거와 본질, 그리고 전체 의미 사이의 관계를 통찰해 좀 더 근원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렇게 외어 가면 빠꾸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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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경제학을 공부하려 하는가

어 쨌듯 간에 나는 경제학과를 졸업한 나름 경제학도다. 물론 대학 5년 동안 수업은 빼먹기 바빴으며 시험지는 텅빈 채로 내거나 아예 보지 않은 적도 많다. 남들과 달리 교양과목이나 다른 학과과목을 주로 수강하고 전공과목은 최소학점만 이수한 채로 간신히 졸업했다. 그 결과 남은 것은 졸업장 하나가 달랑이다. 졸업하기 전에도 졸업한 후에도 전공과 상관없는 일을 하며 살면 전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아무 필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졸 업한 지 3년 반 정도가 지났다. 시큰둥했던 대학 시절 전공수업 시간에 배웠던 이야기는 여전히 나와 관계가 있었다. 경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전에서 경제는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물적 기초가 되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 분배, 소비하는 활동과 그것을 통해 형성되는 사회관계의 총체’라고 설명한다. 이런 거창하고 추상적인 정의를 굳이 내리지 않다 해도 우리는 늘 부동산, 주가, 금리, 경제성장률, 국민소득 같은 숱한 경제용어를 들으며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자본주의경제학 따위는 관심 없다고 말할 처지가 못 된다. 그렇다고 마르크스경제학을 비롯한 사회주의경제학에 관심이 있냐 하면, 또 그것도 시큰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경제학이든 사회주의경제학이든 시큰둥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내가 두 경제학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 고작 아는 것은 수요와 공급이라고 하는 자본주의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분석틀뿐이었다.
내 가 이렇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전까지는 거부하고 부인하고 변명을 일삼았다. 그런 것은 관심도 없고 별 필요 없다고. 하지만 무지를 창피하게 여기기 시작한 후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무지를 떨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본주의경제학이든 사회주의경제학이든 가장 기초적인 이론부터 하나하나 공부해 가며, 최소한 그네들이 주장하는 핵심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 비교 분석하고 이들을 지양止揚하며 내 스스로 현실 경제를 분석할 틀을 만들 필요성 말이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 경제학의 테두리 안에서 그나마 관심을 가졌던 칼 폴라니 식의 실재주의적 경제학에 대해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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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탄생 - 8점
콘스탄틴 J. 밤바카스 지음, 이재영 옮김/알마

철학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 알라딘 서평단 도서(자일)

이 책의 표지를 보면 '철학의 탄생'이라는 큼지막한 표제 아래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 인간과 자연에 던지는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의 현장'이라는 부제가 보인다. 그리고 하단에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크세노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가들의 이름이 거론된다. 그렇다면 표지에서 거론되는 10명 철학자들이야말로 철학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서양철학사 책의 대부분은 탈레스를 거론하며 철학자들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10명의 철학자는 흔히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라 일컬어진다. 서양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탈레스부터 테모크리토스에 이르는 철학자들과 소크라테스의 차이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난다. 이 책은 그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다.
 
탈레스부터 테모크리토스에 이르는 철학자들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로 분류한다면 이들을 설명하려면 소크라테스의 철학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필요하다. 간단하게 도식적으로 설명한다면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에 대한 질문이라는 철학의 기본 과제를 설정하고 풀어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중심에 두었느냐이다. 엄밀히 따지면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 무리 가운데 한 명이었기에 소피스트를 이야기해 보면, 이네들은 철학의 대상을 인간에다 두었다. 거꾸로 이 책에서 언급된 탈레스부터 테모크리토스에 이르는 10명의 철학자들은 철학의 대상을 자연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이 책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사유했는지 이네들의 사상의 궤적을 추적한다.
 
알다시피 철학의 어원은 '지혜를 사랑하는 행위 내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철학을 만학의 근원이라 한다. 이는 오늘날처럼 학문이 분화되기 전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학문으로서 탐구하는 일체를 철학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가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인간을 비롯한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같은 일련의 질문이 나왔을 터이고, 이는 곧 철학의 대상이자 주제로서 인류의 '지혜'였다.
 
 
저자인 콘스탄틴 밤바카스는 먼저 이들 철학자들의 핵심 사상을 네 가지로 정리한 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 표면적인 무질서와 다양함의 심층에는 질서와 통일, 지속성의 세계가 있다. 
  • 이 지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근원적인 원소이며, 세계는 이 원소로부터 만들어졌다. 
  • 따라서 이 근원적인 원소와 우주의 현실은 하나이며, 초자연적인 원인이 아니라 자연적인 원인에만 기초하고 있다. 
  • 인간은 스스로의 힘을 통해 우주의 이러한 자연적인 원인들을 합리적으로 규명해 낼 수 있다.(이상 60-61쪽)
 
이런 명제를 세우고 나서 저자는 각 철학자들의 사상 가운데 주요 개념을 뽑아 차근차근 설명하고 이를 후대 철학자들의 평가를 바탕으로 정리한다.
 
흔히 밀레투스 학파라 일컬어지는 탈레스의 무리는 이 책에서 "자연철학자"라 거론했듯이 세계의 근원에 대해 가장 먼저 탐구해 (서양)철학의 시초자라 불린다. 탈레스를 이야기할 때는 도식적으로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정의가 먼저 떠오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탈레스는 "신화로부터 벗어나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세계의 다양한 현상들 속에서 자연적인 통일을 찾"으면서 "자연 속에서 합법칙적인 인과성을 인식"(이상 85쪽)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탈레스는 합리적인 사고를 거쳐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점에서 탈레스는 신화의 틀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한 첫 사람이었다. 이렇게 세계의 근원을 탐구하려던 아낙시만드로스나 아낙세미네스 같은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들은 점차 우주론의 영역으로 그들의 철학을 확장시켜 나갔다. 아페이론이라는 무한의 기원으로 시작해 따뜻함과 차가움, 습함과 건조함 같은 대립쌍이 우주의 구성요소이며 이들의 창조와 파괴의 과정, 즉 만물이 운동하는 법칙을 이야기했다. 뒤이어 저자는 밀레토스 학파의 뒤를 잇는 피타고라스나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같은 철학자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만물의 근원과 운동, 질서와 조화 등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서 있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분석했는지 그 전말을 설명한다.
 
그런데 5세기 중반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자연이 아닌 인간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후대의 우리는 그들을 소피스트라 일컬었으며, 소크라테스 또한 그 무리 가운데 독특한 일인이었다. 책 말미의 <후기>에서 저자는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대립하는 이론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일하고며 불변 부동하는' 파르메니데스으 존재도, '만물이 항상 변화하고 아무것도 유지되지 않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도, '허공과 보이지 않는 원자로만' 구성되는 데모크리토스의 우주도 쉽게 받아들이지기 어려웠다."라고 이야기한 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사유의 핵심은 현상적이고 경험적인 세계의 뒤에 숨어 있는 궁극적 현실을 찾는 데 있었다."(이상 489-490쪽)라며 이네 철학자의 사상과 그것의 학문적 가치("우리의 과학 전체는 합리적이고 비판적이며 따라서 독단적이지 않은 이론 형성 과정과 연구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통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492쪽))를 간략하게 요약한다. 이런 점에서 앞 부분에 실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한 개관>에서 이들 철학자의 사상을 접근하는 방법론을 취한 뒤 <후기>의 정리를 읽는 것만으로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핵심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정리와 목차를 보면서 관심이 가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개론적으로 정리해 가면 이 책을 읽는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분명 후기에 나타난 저자의 요약과 가치 판단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단순한 철학의 시초자로 보기보다는 과학의 시초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싶었는데, 나중에야 저자의 약력을 보니 자연과학을 전공한 뒤 철학과 자연과학의 인접 영역을 연구하는 사람이라 한다. 이를테면 과학철학 연구자라는 것인가? 앞서 말했듯 이 시대 철학은 인문학인 동시에 자연과학으로서 아직 분과 학문으로 나뉘기 전인 마치 혼돈(chaos) 상태 같은 총체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를 포함한 소피스트들이 철학의 대상을 인간으로 돌리기 전까지 철학자드의 주요 연구 주제는 자연 나아가 우주는 어떻게 구성됐으며 어떻게 변하는가였다. 당시만 해도 신화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던 때 그들은 자연을 접하면서 지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시작의 과정을 한눈에 보여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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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 10점
최규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만화, 삶의 단면을 잘라 내 보이다
 
만화가 최규석과 요새 철학사 수업을 함께 듣는데(물론 그와 통성명한 적 없이 그런 사람과 함께 수업을 듣는다는 것을 아는 정도이다), 수업 중 일생 중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경험을 말해 보라는 선생의 말에 최규석은 집 위에 집이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선 정말 충격받았다고 했다. 그가 충격받은 건 강남의 타워팰리스도 신도시의 15층 고층 아파트도 아닌 지방 소도시의 2층 건물이었다. 그는 평야라는 걸 보지 못해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지지리도 가난한 산골 출신에다 형제 많은 집의 막내라는 겹겹의 산에 둘러싸인 그로서는 당연한 충격이었을 게다.
한겨레21에 연재된 만화를 엮은 <대한민국 원주민>에 내비친 최규석과 그의 가족의 삶을 보면, 최규석과 나의 나이 차는 고작 한 살 차이임에도 똑같은 시대를 살아온 나와 그가 살아온 궤적의 간극은 태평양까지는 아니어도 동해 바다 정도 되어 보인다. 나 또한 지방 도시 변두리에서 살면서 용돈 한번 받아 본 적 없고 내 방 한번 가져 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규석이 보낸 어린 시절은 70-80년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50-60년대 한국사회의 풍경과 비슷할 정도로 나와 달랐다.
물론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가난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못하더라도 궁상스런 삶의 흔적은 언제나 기억 속에 도사리고 있다. 당시 우리네 삶은 서울-지방 도시-시골이라는 3단계의 분명한 위계제에 얽매여 있었다. 그나마 나는 최규석보다 한 단계 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거꾸로 내 위에는 서울 사람들이 있었다. 중3 때 세운상가에 컴퓨터를 사러 왔을 때 서울역에서 지하철 패스를 뽑지 않고 지하철을 탔다가 종로3가역에서 망신당했던 기억만 떠올려도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서울과 지방의 경계는 좀 더 명확해진다. 그리고 도시와 시골의 경계 또한 명확해진다.

최규석이 <~원주민>에서 그려 낸 그의 어린 시절의 키워드는 단연코 '가난'이다. <~원주민> 말미에도 실린 시네21 인터뷰 기사에서 시네21의 김혜리 편집위원은 최규석을 이야기하면서 "가난에 익숙하지만 궁상맞진 않다"라고 단언했지만, <습지생태보고서>에서 최규석이 자신을 모델링한 최군을 두고 "3대를 이어온 가난 때문에 온몸에 궁상이 배어 있다"라고 설명했을 정도로 만화 안에서 인물들이 일상적인 생활 모습을 보면 궁상이라는 말 외에는 별 다른 대체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는 비록 매사에 궁상을 떨지언정, 이따금 가난한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낄지언정, 가난을 현대인이 가져서는 안 될 절대악으로 치부하는 성장 만능 사회가 강요하는 일반적인 관념 따위는 무시하고 가난이라는 소재를 정면 돌파한다.
그렇기에 <~보고서>나 <~원주민>에서 그는 가난 때문에 기죽거나 굽신거렸던 모습을 그릴지라도, 그 모습은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링 안의 클린치에 불과하다. 외려 그는 우리네 정서를 작극해 가슴 한 켠을 뭉클하게 만드는 스트레이트 펀치를 수시로 날려 대고, 이따금 한 회의 말미에서는 피식 웃게 만드는 데 그쳐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결정적 어퍼컷을 아주 효율적으로 구사한다. 즉 그는 전형적인 인파이터 복서라 할 수 있다. 궁핍했던 자신의 가족사를 수치심으로 덮어 버리지 않고, 이를 잘라 내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으로 읽어 내는 그의 스토리텔링은 어줍잖은 웹투니스트의 명랑 컨셉과는 애당초 다른 길을 걷도록 했다.

사실 그가 이름을 알린 건 <아기공룡 둘리>를 패러디해 현대 산업사회와 마이너포비아 성향을 고발한 <공룡 둘리>였다. 80년대 군부 독재 시기 어른에게 반말하고 어른의 권위에 대들려고 공룡의 탈을 써야만 했던 아이가 성장했을 때 겪어야만 했던 처절한 삶을 최규석은 무자비할 정도로 어둡게 그렸지만, 그것은 IMF 금융 위기를 겪었던 우리네 소시민들의 일상이었으며, '습지'에서 서식해야 했던 그가 겪은 이 사회의 아주 거친 단면이었다. 가난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아는 그로서는 위선적인 착하고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는 대신 최대한 벼랑 끝으로 캐릭터를 잔인할 정도로 몰아붙인다. 덕분에 사람로부터 찬사를 얻는 동시에 그는 불안한 시선도 함께 받는다. 예켠대 <고래가 그랬어>에서 화화(畵禍) 사건을 일으켰던 <불행한 소년>에서 최규석은 발행인 김규항의 변을 인용하면 "무작정 운명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든가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고 내세에만 관심을 갖게 한다든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저항을 폭력이라 몰아붙인다거나 하면서 힘센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가짜 천사"를 소년이 죽임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는 순응의 허황된 이미지에 속지 말 것을 강변했다.
최규석의 그림 속에서 이렇듯 드러나는 인파이터 기질은 우리의 미시적 삶에 천착하면서 삶의 단면을 뭉텅 잘라내 버린다. 물론 그의 방식은 만화의 익숙한 관습을 차용하거나 화사한 기교를 쓰기보다는 다소 투박한 선과 퍽퍽한 색채를 주로 쓴다. <~원주민>에 실린 그림을 보면 색감은 음습하거나 어둡다. 펜터치도 사실적인 듯하면서 구체적인 디테일을 살리지 않고 어느 순간 뭉개 버린다. 말하자면 예리한 횟칼보다는 묵직한 고기 써는 칼로 내리쳐 살덩이를 부러트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가 써는 칼질은 아프다. 그만큼 그의 만화는 우리를 아프게 한다. 하지만 삶은 고통의 씨앗으로부터 자라는 나무이다. 그래서일까? 최규석의 만화는 우리에게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며, 우리의 삶을 가장 절실하게 드러내 보인다. 단지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다는 측면에서 리얼리스트가 아니라 삶의 진정한 모습을 그대로 그려 낸다는 점에서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실된 리얼리스트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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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에게 '신'이라든지 '선'이나 '정의'라든지 하는 추상적 개념을 가르치기란 쉽지 않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재간도 없거니와 어른 또한 그것을 정확히 언어로 표현하기란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기껏 하는 일이란 '믿으라' 내지는 '그런 게 있어' 정도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구드룬 파우제방의 소설 <하느님, 한 번 더 기회를 드릴게요!>는 한 아이의 하루 일상을 따라가며 질문을 던지고 동시에 답을 내리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아홉 살 니나는 하굣길에 차에 치어 죽어가는 고양이를 목격한다. 목숨이 아홉 개라는 시쳇말처럼 고양이는 바로 죽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게다가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는 새끼 고양이는 어미의 사정도 모르고 배 고프다 칭얼거린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아홉살 소녀는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느님, 너무 해요! 누가 하느님한테 기도를 하거나 뭘 빌어도 하느님은 신경도 안 쓰시죠?"
니나가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고양이가 누구한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왜 고양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해요? 하느님은 선하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아요! 거지 같은 하느님이라고요!"
...
"하느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더 드릴게요. 제발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세요."
...
이제 더는 못 참아요.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시라고 했죠? 지금부터 저는 하느님을 안 믿을 거예요!"
독 실한 기독교 신자라면 펄쩍 뛸 불경(?)스러운 말이 소녀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아이가 이제껏 알아 온 또한 믿어 온 '하느님'은 공정하고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하느님'은 어미 고양이를 살려달라는 니나의 요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어른이라면 말로는 반응을 요구할지라도 실제로는 그것이 실현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니나는 이제 아홉 살 어린이일 뿐이다. 어른들이 이제껏 설명해 온 자비로운 하느님을 믿어 왔으나, 니나는 이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즉 불신의 순간에 처했다.
의심은 자신을 괴롭게 한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이 정작 현실에서는 일그러지는 건 더더욱 괴롭다. 지진과 태풍으로 아무런 잘못 없는 이들이 죽어가는 현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보다 부덕하게 사는 사람들이 더 잘사는 현실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이든 그저 보편적인 세계이든 이것이 옳냐고 항변한다. 어른도 이럴지언대 아이라고 못할까? 외려 아이들은 더더욱 큰 혼란에 처하기 마련이다. 니나는 혼돈의 상태에서 신을 의심하고 절망하고 부정한다.

2.
새끼 고양이를 돌보겠다고 어미 고양이에게 약속한 니나는 어미 고양이가 끝내 죽자 집으로 돌아가나 어머니는 냉혹하게 고양이가 싫다 하신다.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니나는 집을 나가 무작정 폴란드로 향한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선하기는 하지만 니나를 이해 못하는 할머니, 니나를 이용해 도둑질을 하는 소년, 노래를 잘하는 걸인 할아버지, 니나를 유괴하려는 남자, 자기 잘못을 애써 외면하려는 이기적인 할아버지등 니나가 만나는 숱한 사람들은 의심과 혼돈에 둘러쌓인 니나에게 아무런 답도 내려주지 못하고 외려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가진 것 없는 가출 소녀 니나는 춥고 배고프다. 새끼 고양이 아하에게 먹일 우유를 달라 하는 니나에게 어른들은 처음에는 불쌍해하는 듯 대하지만, 니나와 아하에게 본질적으로는 관심이 없다. 그저 니나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어른의 입장에서 가출한 아이를 훈계할 뿐이다. 오히려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정치적 망명해 온 물루네만이 그나마 니나를 도와주고, 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것을을 설명해 주지만, 그네들은 독일 땅에서는 낯선 이방인이라 섣불리 니나를 대하다 추방당할 것을 걱정한다. 니나를 도와줄 사람, 정확히 어른은 아무도 없다. 니나는 춥고 어두운 길거리를 헤매며 불안과 의혹의 하루를 보낸다.
3.
니나가 마지막으로 만난 이는 아하의 어머 고양이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니나가 믿는) 돼지신을 그린 거리의 화가. "착한 일을 하면 상을 주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주고, 모든 사람들을 친절하게 보살펴 주고,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는" 산타클로스처럼 우리네 의식 속에서 박제화된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이 아닌 진짜 신, 인간신을 그려 달라는 니나에게 거리의 화가는 신의 존재 유무와 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신과 정의의 관계, 그리고 지금 니나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준 사건인 어미 고양이의 죽음을 니나 스스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대화로써 일러준다.
"어미 고양이가 혹은 사람이 자식만 남겨 두고 갑자기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고 치자. 이건 정의랑은 관계가 없어. 그런 일이 있으면 인간은 절망에 빠져서 왜 이런 일이 생겼을가,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묻곤 하지. 인간은 그 까닭을 모르고 누가 설명해 주지도 않아. 우리 인간은 신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없으니까. 우린 상황을 바꿀 수 없고 그저 이런 사실을 견디는 수밖에 없어."
자못 신과 정의의 관계를 허무적이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듯하지만, 거리의 화가는 밤하늘을 빛내는 별을 바라보며 니나에게 좀 더 너른 시선으로 우주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우리도 지금 저런 별에 앉아 있는 거야. 그것도 아주 아주 작은 별에. 말하자면 저기 있는 저 은하수 가운데 하나에.”
스프레이 화가가 안개처럼 보이는 별무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렇게 앉아 있는 동안 우리는 이 별을 타고 다른 별들 둘레를 도는 거지. 다른 별들은 또 다른 별 둘레를 돌고. 상상해 봐!”
니나는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중략)
“그래. 어지러울 수도 있어. 그래서 이 우주에 있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신이 만든 모든 것 가운데 인간이 가장 위대하다고 믿는 걸 거야.”
“우린 작은 먼지 알갱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말이에요.”
“하지만 거대한 설계도 속에 들어가 있는 존재지. 그러니까 꼭 있어야 하는 존재라고.”
(중략)
" 네가 잘 못 지내고, 추위에 떨고, 스스로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너를 좋아해 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 너는 한가운데에 있는 점이 돼. (중략) 그럼 넌 이 점이 되어 중심의 둘레를, 말하자면 신의 둘레를 돌게 되지."
"신이 한가운데에 있는 점이라고요?"
니나가 생각에 잠겨서 물었다.
"중심점이지. 그게 아니면 뭐겠니?"
스프레이 화가는 말했다.
"아하는 어디에 있어요?"
"내가 너를 아주 크게 그렸기 때문에 아하도 네 점에 들어갈 수 있어. 너희 엄마는 물론이고 네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도 다 들어갈 수 있어."
(중략)
" 넌 돼지신을 알아봤잖아. 그걸 알아본 사람은 너뿐이야. 그렇게 영리한 사람이라면 인간이 신을 인간과 다른 모습으로 상상할 수 없다는 것쯤은 이해하고도 남을 텐데. 말하자면 인간의 얼굴과 인간의 성품을 지닌 신을 상상하는 거지. 우리가 신이어야만 신을 정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러니까 정말 신다운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는 거야."
4.
동화는 어른들의 세계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어른들의 세계를 보자. 세상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픔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하지만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순간 그것은 남의 일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르면 몰랐지, 아픔과 슬픔을 아는 순간 함께 괴로워한다. 그리고 묻는다.
"왜 그(들)는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요?"
설명해 주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어른조차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된 인간 근원의 질문이다. 저자는 신의 존재, 정의, 약속과 책임, 생명 같은 다소 난해한 철학적 주제에 대해 아홉살 니나의 시선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니나가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대답으로써 차근차근 답을 내려 간다. 다소 숱한 등장인물들이 말한 것에 비하면 거리의 화가가 너무 많은 것을 한번에 말하는 느낌을 주긴 하지만, 저자는 도그마적인 '하느님'을 설명하는 데로부터 벗어나 인간 스스로가 신과 소통하면서 인간의 본질적인 의문을 스스로 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괴테가 말했듯 신을 통해 세상을 내면에서 결속시킬 수 있다.
니나처럼 아홉 살배기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그리 쉽지 않게 이야기하지만, 또한 그 아이 입장에서는 니나의 질문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을 내렸는지는 다소 의심이 가긴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빤한 정답을 내려주기보다는 니나의 여정을 독자가 함께 따라가며 자기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만들어 가는 데 있다. 사실 철학에는 애당초 정답이 없다. 사실 답이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저 철학에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며 서로 생각을 나누는 일련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이 스스로 "내가 만일 니나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이라는 가정을 제시하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답을 내리도록 이끄는, 이 책은 섣불리 철학적 주제에 섣부른 어른의 대답을 주입하기보다는 아이 스스로 답해 나가도록 일러주는 일종의 나침반 같은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동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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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고아 - 8점
모리 에토 지음, 고향옥 옮김/생각과느낌
 
짜릿한 이웃집 지붕 오르기
 
1.
내가 기억하는 첫 집이자 열네 살 때까지 살았던 집은 단층 혹은 이층 단독주택들이 밀집한 동네 한가운데 있었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 시 외곽에 위치한 중산층도 저소득층도 아닌 말 그대로 서민들이 주로 살던 신흥 주거지에, 일명 '집장사'들이 비슷한 설계도에 따라 집을 지어 수요자들에게 팔았던 집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기에 이웃한 집은 대개 집의 구조나 모양새가 비슷했다.  '국민학교' 시절 - 분명 초등학교라 해야 하지만 왠지 '국민학교'가 더 어울린다 - 성격상 동네 친구들과 몰려 노는 데 한계가 있었던 나는 책을 읽거나 몽상으로 부모님이 일하느라 계시지 않은 시간을 많이 때웠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뒷집 지붕에 올라가는 데 재미를 붙였다. 이웃한 바로 뒷집은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딱 붙어서 어린아이도 쉽게 집을 건너다닐 수 있었는데, 온전히 옥상으로만 된 우리 집과 달리 뒷집은 장독대 놓는 공간을 제외하곤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 나는 그 뒷집 기와가 덮인 지붕에 자주 올라가 어딘가 멀리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각종 담을 타고 옆집과 앞집을 가리지 않고 넘나들었고, 이따금 동네친구들까지 꾀어 옆집 안에 있는 공터에서 놀기까지 했다. 내게 그럼 담타기 혹은 지붕 올라가기는 넘는다는 희열감과 함께, 어딘가 멀리 본다는 기대감, 동네 누구보다 높은 데 선다는 우월감 같은 여러 복잡한 감정을 뒤섞은 묘한 정서를 가져다줬다.
 
2.
인쇄소를 운영하는 부모가 일이 많아 거의 둘만 지내다시피 하는 연년생 중학생 남매 요코와 린은 남의 집 지붕에 오르는 데 재미를 붙인다.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오르다 차츰 지붕 오르는 데 원칙을 세우고, 난이도를 높여 가며 슬슬 재미를 붙여 갔다. 부모의 실질적인 부재와 재미없는 학교 생활, 친구들 사이에 존재하는 따돌림에 이르기까지 내내 갑갑하게 때로는 우울하게 청소년 시기를 보내야 했던 남매에게 일탈이 주는 묘한 쾌감은 삶의 팍팍함을 날려보내는 에너자이저였다. 그리고 여기에 친구들로부터 은근히 따돌림당하던, 요꼬네 반 아야코가 함께한다. 이들에게 지붕을 오르는 행위는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탈 행위이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가 흔히 대중매체에서 접하는 흡연, 음주, 가출, 약물, 섹스 은 일반적인 범주에서는 다소 벗어난 다소 '얌전한' 일탈을 감행한다. 물론 남의 집 지붕에 집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오르는 행위는 가택침입죄에 해당하는 불법 행위이다. 아직 '성숙'되지 못한 중학생이기에 설사 이들을 교도소로 보낼 만한 건수는 아니라 해도 어른들, 에컨대 집주인이든 부모이든 하다못해 우연히 이들의 행동을 목격한 이웃의 어른들이 이러한 아이들의 불법 행위를 보면 길길이 날뛸 것이다.
 
만약 붙잡혔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밤중에 아무 볼일도 없이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간 것이다. 용서를 비는 일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고 울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색을 하고 놀이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아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요코는 이리 말하지만 이들은 차츰 지붕 오르는 일에 중독된다. 대부분의 일탈은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또는 호기심으로 시작되지만 이내 중독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모종의 질서와 어긋날 경우 발생하는 묘한 불협화음은 여느 스릴러 영화보다 짜릿한 재미를 선사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웃집의 담은 내게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출입구였으며 넘기 힘들수록 고단함이 가중되는 통과의례였다. 또한 그렇게 통과의례를 밟으며 오른 이웃집 지붕은 새로운 세계를 내다보는 전망대 내지는 갑갑한 현실과 동떨어진 나만의 해방구였다. 조심조심 기와를 밟을 때 발에 느껴지는 묘한 감촉과 뿌지직하는 소리 때문에 느낀 짜릿함은 그것의 덤이었다. 나 또한 담타기와 지붕 오르기에 중독됐었다.
 
3.
소설 속 아이들은 함석지붕을 잘못 디뎌 소리를 내 주인을 깨우긴 했지만 끝내 적발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창밖의 '등산객'을 요코네 반 왕따 키오스코가 맞닥뜨리면서 이들의 지붕 오르기는 위기에 봉착한다. 어른이 아닌 친구, 그것도 왕따 친구에게 적발된 이들은 친구를 자기네 패거리로 꾀어 내는 수법으로 자신들의 불법 행위를 만회하려 한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거나 재미있으면 놀이가 되는 거라고!"
"지붕에 올라가는 게 재미있니?"
"글쎄 재미있다니까!"
"이해가 안 가."
절망, 내가 넌덜머리가 나서 발밑의 낙엽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옆에서 린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올라가 보면 알아."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극히 소심하기 일쑤이고, 키오스크 또한 그렇다. 비록 일탈을 위한 불법 행위일지라도 아이들에게는 "뭔가를 시험한다든가, 극복한다든가, 그런 거창한" 행위가 아닌 그냥 놀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세기말의 우울함을 떨치지 못하던 왕따 소년 키오스코 - 그의 본명은 가즈오이지만 역내 매점인 키오스크처럼 아이들에게 이용만 당하다 보니 어느덧 별명으로 자리 잡았다 - 는 일탈과 안주, 스릴과 공포 속에서 지붕 오르기를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키오스크는 등교를 3주 넘게 거부하다 어느 날에는 자살하다 실패했다는 소문이 돈다.
 
4.
키오스크를 포함해 네 명의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지붕에 오르던 날, 키오스크는 인도로 떠나 버린 전임 담임교사인 스미레가 한 말을 다른 이들에게 읊어 준다.
 
"우리는 모두 우주의 고아이기 때문에, 따로따로 태어나서 따로다로 죽어 가는 고아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반짝반짝 빛나지 않으면 우주의 어둠 속으로 삼켜져 버린대."
 
지붕에 오르는 '비행청소년'을 다루는지라 자못 뜬금없던 소설의 제목인 '우주의 고아'는 누구나 힘들 때 헤쳐 나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이들은 갑갑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려 기꺼이 불법 행위를 감행했다. 또한 자살하려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친구의 오해를 풀어주려 기꺼이 자신들의 행동을 고백하려 한다. 직장, 돈, 연애 같은 어른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오리 아줌마와 대화를 나누며 위안을 얻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반면 직접적으로 뒷집 지붕을 비롯해 이웃집 담을 넘던 내 행위는 적발되지는 않았더 하더라도 이웃들이 그것을 몰랐을까? 아마도 부모님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압박을 넣었을 게다. 그래서였는지 어머니에게 혼난 기억도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즉 내 스스로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인지했더라도 부조화를 일으키며 내 행동에 제동을 걸지 못했고, 결국 나는 그저 일탈을 감행한 문제아가 돼 어른들의 제재를 받은 수동적인 존재가 돼 버렸다. 반면 소설의 네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혼날 것을 각오하고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한다.
 
5.
 이 소설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성장소설의 일반적인 공식과 관습을 충실히 이행한다. 이 시대 아이들이 겪는 성장통을 지나치게 극단적인 상황을 부각시키며 풀어가는 방식 대신 소소한 일탈을 보여 줌으로써 무겁지 않게 풀어간다. 때문에 오늘날 아이들에 당면한 왕따 같은 심각한 문제도 자못 가볍게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갈등상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데다 너무나 쉽게 해결하는 인상을 주어 소설을 읽는 맛인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데는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껏 일탈한다는 게 남의 집 지붕 오르는 거라는 아이들의 귀여움, 그리고 어떻게든 문제상황을 스스로 해결할 것을 선포하는 외유내강적인 그네들의 꿋꿋함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알라딘 이 주의 TTB리뷰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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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 8점
이택광 지음/아트북스 
그림을 읽는다는 것은 시대를 읽는 것이다

1.
많은 이들에게 그림은 '보는 것'이겠지만, 그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면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는 것'으로 대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림을 단순히 보지 않고 읽어야 한다. '그림을 읽는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그림이라는 하나의 텍스트, 즉 원전 속에 파묻혀 있는 콘텍스트, 즉 맥락을 파악한다는 말이다.
본디 '맥락'은 "사물 따위가 서로 이어져 있는 관계나 연관"을 뜻하는데, 대체로 시대적 배경, 사상적 조류, 창작자(군)의 의도와 심리상태 같은 다양한 무형의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림을 읽으려면 그림을 둘러싼 혹은 그림 안에 담겨 있는 여러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그림을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수동적 행위가 아닌 그림을 세상의 움직임과 연계시켜 그 속에서 그림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 파악하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행위이다.

2.
근대 미술 사조 중에서 '인상파'라는 말을 처음으로 등장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끌로드 모네의 <인상-해돋이>를 보자. 붉은 해가 뜨는 새벽녘의 바닷가 풍경을 캔버스에 유채 물감으로 흐릿하게 칠해 그린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해돋이 때 화가가 느낀 인상, 즉 사물과 빛의 색감을 화가 스스로 받아들인 감흥을 그림으로 옮긴 것인데,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의 저자 이택광은 이 그림은 노동 혹은 노동자의 삶을 그렸다고 단언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림의 왼쪽 상단부의 흐릿하게 그려진 푸릇푸릇하게 삐죽 솟은 형상은 부둣가의 크레인이라 말한다. 저자가 말하기 전에는 그것이 크레인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실 그것이 크레인이 아니라 부둣가에 정박한 배의 돛이라 해도 상관없다. 또한 화가인 모네 스스로 노동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정말로 부둣가에서 맞은 해돋이의 인상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림이라는 텍스트에 한정해 그림을 보면 누구나 능히 해 볼 만한 감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택광은 모네가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 모네가 미술계 안에서 취했던 행동과 가졌던 사상 같은 일련의 맥락을 파악할 것을 주문한다.
한창 인상파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19세기 말은 격동의 시기였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등이 폭풍우처럼 밀고 지나간 시기 정치사상은 물론 미술사조에 이르기까지 백화쟁명의 시기였고, 인상파는 그중 하나의 흐름이었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뭉뚱그려서 편의상 인상주의자들 또는 인상파라 불려서 그렇지, 인상파 화가들을 하나로 묶을 도리는 없"는지도 모른다. 인상파 안에는 노동자들의 자치정부 파리코뮨을 찬양한 좌파에서부터 파리코뮨의 가담자들을 80년 광주의 시민들처럼 밀어 버린 공화 정부를 지지하는 우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런데 끌로드 모네는 이들 중에서 좌파 내지는 중간 즈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였던 만큼 아무리 자연을 주로 그린 화가라 해도 그의 그림 속에는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면서 '세계'를 만들어 가는 노동자의 애환이 담겨 있다는 뜻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3.
물론 모네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오바'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근대 시기 그림 속에 담긴 맥락을 파악하는, 즉 그림을 읽는 행위를 설명하는 하나의 실례일 뿐이다. 자, 이 책의 표지에 쓰인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그린 <유럽의 다리>를 보자. 저자는 멀리서 솟아오르는 수증기, 다리 바깥을 바라보는 행인의 시선, 길을 걷는 두 남녀의 행색, 그리고 하다못해 강아지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 보면서 익숙해 보이는 그림을 해석하며, 아울러 이 그림이 지닌 맥락을 이야기한다.
결론은 근대의 산물 중 하나인 기차의 등장이다. 익히 알려졌듯 기차는 근대를 상징하는 지표이다. 당시 그 어떤 교통/운송수단보다 빨리 가면서 공간은 물론 시간을 압축해 버린 기차는 속도와 생산성 지향의 근대성을 무엇보다 대변하는 핵심 지표이다. 그런 기차를 구경하는 평범한 파리 시민의 모습을 그림에 담으면서 카유보트는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인 소비 지향의 중산계급의 도래를 이야기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우리가 보기에 화가는 일상적인 풍경을 본 대로 그렸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당시의 세계를 오늘에 투영하며 그 세계를 읽어야 한다. 저자는 카유보트는 과학에 근거한 세계관을 가진 이로 평가한다. 당시 인상파를 위시한 화가들에게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은 중세기 종말로 설명됐던 유토피아를 자신들이 사는 현재를 좀 더 풍요롭고 다채롭게 변화시키는 하나의 지향점으로 여겼다고 한다. 따라서 그림 속의 기차를 구경하는 파리 시민은 새로운 변화를 눈으로 구경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하는 만인 중 일인이라는 말이다.

4.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을 보면 이러한 인상파들이 근대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또 알 수 있다. 파리 근교의 한적한 지역인 아르장튀유를 그린 여러 그림을 보면 배경인 물빛은 쪽빛이다. 이는 파리 코뮨 이후 도심 재정비 때문에 근교로 쫓겨난 염색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의 색깔이다. 아르장튀유는 이런 염색공장의 집결지였고 그 일대 강물은 폐수로 오염됐으며 하늘로는 매연이 뿜어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에 개의치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보트놀이를 즐긴다. 마네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저자는 "마네에게 아르장퇴유는 여가를 즐기기 위한 곳이며 동시에 근대의 산업화가 자연을 침범해 오는 모순의 공간"이라 말한다. 마네는 강이 더럽고 냄새날지언정 놀이를 즐겨야 하는 근대인을 그려 낸 것이라 말한다. 이는 매음녀의 누드와 흑인 하녀를 도발적으로 그려 낸 <올랭피아>처럼 지금 화가가 처한 시대의 모습을 금기를 넘어 현상 그 자체를 사실적으로 그려 낸 행위라는 것이다. <폴리베르제르의 주점>이나 <풀밭 위의 점심>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같은 인상파라 불리었던 모네는 똑같은 아르장튀유의 풍경을 그리면서 마네와 반대로 공장의 매연이나 폐수로 오염된 강물을 제거한 채 근대의 산업화가 가져다준 풍경을 그의 그림에서 지워 버린다. 왜 그랬을까?
저자는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을 빌려 "모네는 마네보다 더 강렬한 '유토피아 충동'을 갖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자연과 대립되는 것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완전히 소거해 버림으로써, 그 경험 자체를 아예 그림의 제작 과정에서 분리"해 회화에 대한 인습과 규정을 부정하고, 기법과 전통을 분리함으로써 실험과 혁신에 대한 '자의식'을 색채에 기탁해 표현했다고 한다. 마네와 모네의 이런 대립된 화풍은 예술가가 현실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고 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마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파리의 중간계급은 모순된 현실을 폐수 위에서 보트놀이를 함으로써 모르쇠하며 현실을 냉담하게 외면한다. 반면 모네는 아예 현실의 모순을 그림 속에서 드러내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풍경, 허구적인 자연 풍경으로 바꿔치기 했다. 이는 열정적 공화주의 지지자의 대열에 서 있기도 한 모네의 모순적인 저항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마땅히 현실의 모순을 사실 그대로 하다못해 에둘러서라도 담아야 한다는 기존의 관습을 거부한 예술가였다. 그와 반대로 노동계급의 삶과 근대의 파괴적 풍경을 정면으로 그려 낸 마네는 노동의 상품이 돼 버린 현실을 그대로 그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상품'을 그려 낸 이로 평가된다.

5.
우리는 이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읽으면서' 그들의 삶과 그림 속에 투영된 근대의 모습, 그리고 근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읽을 수 있다. 단순히 그림을 미적 측면에 한정돼 '본다'면 화가의 사상과 시대적 배경 등까지 알아야 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미술을 좋아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따라서 평범한 시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시대를 읽어야 한다. 과거를 들여다봄으로써 현실을 읽고 나아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해야 할 과제이다. 물론 이는 먹고살기에 바쁜 세상에 밥 먹고 할 짓 없어 궤변을 늘어놓는 행위로 치부된 지 오래됐다. 하지만 밥만 먹고 사는 삶, 그것이 아름다운가? 소수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것도 사전에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는) 미술관에 고가의 그림을 걸어놓고 잰 체 하는 것보다는 인터넷에 굴러다니는 조막만한 사이즈의 디지털 코드로 된 그림을 '읽음'으로써 자신을 넘어 인류가 닥칠 미래를 조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예술을 사랑하는 행위가 아닐까?


잡설
글에 거론된 그림의 이미지를 찾아 붙일까 하다가 너무 '구차나' 포기했다. 언젠가는 할지도 모르나 그럴 확률은 테제가 밤에 한 번도 안 깰 확률과 비슷하다. 또한 이 책은 인상파 이외에 라파엘전파를 아울러 다루나 그들을 다룬 부분은 솔직히 잘 이해가 안 간다. 물론 인상파 부분이 다 이해 가는 것도 아니지만, 인상파는 그동안 들은 게 쬐금이나마 있어 선무당이 돼 작두 타 봤다. 그다지 책 읽을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 처했다가 마침 울산에 결혼식이 있어 장거리 여행을 하는 바람에 책 한 권 읽을 시간, 그리고 팀장이 외근이라 마음놓고 블로그질할 시간이 있어 리뷰를 간만에 써 봤다. 이런 게 낙이라면 낙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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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우리말 달인 - 8점
엄민용 지음/다산초당(다산북스)

엄민용 한국어문교열기자협의회 부회장이 쓴 <건방진 우리말 달인>은 다소 반말투로 건방져 보이긴 하지만 그동안 일간지 교열기자를 하면서 배운 교열의 스킬을 유감없이 내뿜는다. 그것의 주 대상은 국어의 금과옥조라 일컬어지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과 국어 교과서이다. 물론 우리네 언중이 자주 혼동하고 틀리기 쉬운 일반적인 맞춤법과 띄어쓰기, 외래어표기법에 대한 안내는 기본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잘못된 사례의 나열이거나 순수 우리말 사용이라는 취지 아래 그렇게 쓰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부터 불러일으키는 데 충실했다. 그에 이 책은 조금 가볍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화체로 사례 하나하나를 코믹한 일러스트와 함께  자세하게 설명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은 국립국어원의 어문규정대로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발음 나는 대로 생각 내는 대로 말을 하고 글을 쓴다. 점점 더 사람들은 자신이 쓰는 말과 글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를 검증하고 부족하거나 잘 모르는 점을 배우려기보다는 뭐 그런 게 중요하냐 내지는 다들 그렇게 쓰는데 왜 피곤하게 따지냐, 라며 배움을 회피하고 유류를 수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는 언어의 고착화이다. 사회가 변해 가면서 언어 또한 변하기 마련이고, 국어사전과 어문규정은 그를 반영해 가면서 나름 지표를 세워야 하는데, 너무나 급격하게 그리고 잘못되게 언어가 바뀌는 통에 사전과 규정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더더욱 예외가 난무해 원칙이 힘을 얻는 지경에 처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일반적인 언중도 아닌 그렇다고 국어학자도 아닌 일종의 경계선인 일간지 교열기자 입장에서 잘못된 언어 사용의 예를 짚어내고 또한 잘못된 규정 또한 짚어내려 한다. 그의 고민은 변화된 언중의 언어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규정 사이의 간극이다. 때로는 사투리가 때로는 북한어가 때로는 외래어가 널리 사용되면서 표준어와 동격 혹은 그 이상으로 쓰이는 판에 한 가지 표준어만 고집하는 국립국어원의 사전 표기에 대해 그는 자주 지적한다. 예컨데 우리가 자주 쓰는 까탈스럽다, 또아리, 개기다, 나래, 과실주 등은 어법상으로 큰 문제가 없음에도 표준어로 인정받지 못한다. 또한 뜨락, 연신 같은 말도 북한어라는 이름으로 잘못이라 규정받는다. 그러나 그는 교열기자의 입장에서 악법도 법이라고 되뇐다. 일단 사회적으로 정해진 것은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는 약속을 지켜면서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데 애써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국립국어원에 펴낸 표준국어대사전과 교육부가 펴내는 국정 국어교과서의 잘못된 표기와 교조적인 규정 적용에 대해서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사실 국어사전 또한 인간이 만드는 것이기에 실수도 많고 오류도 적잖이 있다. 간단하지만 치명적인 오자는 물론, 일률적이지 않는 규정 적용, 언중과 괴리된 표제어 등재, 어색한 순화어 적용 등 숫하게 지적된다. 또한 심심하면 외래어표기법을 바꾸는 관계기관도 지적 대상이다. 물론 언중에게서 관습화된 표현을 이제는 사전에 등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요새 누가 '자장면'이라고 하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언중 대다수가 쓰는 '맨날'을 써야 할지, 어원의 의미 형태소가 분명한 사전에 등재된 '만날'을 써야 할 것인지. 이때 분명 경계할 것은 규정에 얽매인 언어교조주의내지는 언어순혈주의이며, 또한 언중이 쓰면 다 인정해야 한다는 언중추수주의이다. 그 지점에서 저자는 앞서 말했듯 악법도 법임을 자인한다. 그것은 정확한 말을 쓰되 사회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의 선에 근거한다. 책의 뒷표지에는 이런 우리네 언어현상에 대해 주시경 선생의 말을 빌어 의지를 밝히고 있다.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

알라딘 이 주의 TTB리뷰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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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 8점
조윤정 지음, 김정열 사진/대원사

모 시사주간지에 믹스커피를 끊고 원두커피만 마시는 사람으로 소개되긴 했지만, 실제로 원두만 마시기 시작한 건 아직 만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이전 직장 - 지난해 부로 퇴사했으니 이전 직장이 맞다! - 으로 옮기면서 상사가 드립커피 마니아였고, 사무실이 있던 건물 옆 건물에는 선배가 하는 커피하우스 - 몇 차례 이야기한 적 있는 지금은 너무 유명해진 커피하우스 - 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연히 드립커피를 접했고, 이내 그 매력에 빠져들어 필요한 장비를 갖추고 어깨 너머로 배운 지식으로 커피를 내려 마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원두커피를 마시는 데 불을 붙인 것은 직장과 유관단체에서 실시한 커피강좌에 반강제적으로 수강을 하면서부터이다.

당시 강좌는 광화문에 자리한 커피하우스 '커피스트'에서 이루어졌다. 8주 동안 속성이긴 하지만 커피의 기본 배경지식과 핸드드립과 에스프레소 추출법, 베리에이션 조리법 등 배워야 할 것은 그래도 고루 배웠다. 그리고 그 강좌는 커피스트의 조윤정 대표가 직접 가르쳤기에 결과적으로 그는 내 커피사부이다. 해가 지나면서 인터넷서점에서 사부가 쓴 책이 나온다는 광고를 보고선 사야겠다 싶었는데 구입하기에 앞서 실장이 증정받은 책을 보니 이래저래 짜임새 있게 구성돼 있어 반드시 사야 할 책으로 선정해 이달의 구입도서로 구매했다.

(!! 여기서부터는 알라딘 리뷰로 쓰임)
오늘 책을 받아들고서 대략적으로 훑어 보니 대체로 원두커피를 처음 마셔 보는 초급자보다는 초중급자에서 중급자 정도가 읽으면 좋은 책이다 싶다. 커피의 역사와 종류, 재배과정 같은 기초 배경지식과 핸드드립/에스프레소 추출법과 베리에이션 조리법 등이 짜임새 있게 실려 있어 초보자들이 보고선 따라해 봐도 무난하지만, 로스팅과 블렌딩, 테이스팅처럼 어느 정도 원두커피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돼 있어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지 않은 중급 단계 진출자들이 읽으면 좋도록 구성돼 있다. 뭐 이 책을 살 정도의 사람이라면 대개 이 단계에 속하는 이들이겠지만.

이 책은 전체적으로 커피하우스를 직접 운영하고 여러 곳에서 전문강좌를 진행하는 커피전문가가 쓴 책답게 구성이나 설명은 충실하다. 강좌의 교육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하면 될 듯싶다. 또한 커피 전문 사진가가 찍은 사진 재료도 매우 충실하다. 핸드피킹 중에 골라낸 결점두의 사진이라든지 로스팅한 원두의 배전 정도, 그라인딩한 원두의 굵기를 단계별로 찍은 사진은 굳이 별도의 전문강좌를 듣지 않아도 중급 단계 정도 수준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기에 충분하다.

다만 이 책은 커피 생두를 구매해 로스팅하고 블렌딩한 뒤 추출해 마시는 단계에 충실한 원두커피 음용 매뉴얼에 그치는 한계가 있다. 말하자면 철저한 실용서로서 역할을 다한다는 것인데, 커피의 역사적 문화적 접근에는 이르지 못한 채 관련 부분은 기본적인 정보 전달이나 서문 기입 정도에 그친다는 아쉬움을 준다. 커피를 잘 만들어 마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커피가 가져다주는 우리 현실의 문제 역시 중요하다. 커피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도착하는지, 커피가 대중화되면서 변화된 우리의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만드는 법 만큼 쓰여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저자의 다음 책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쓰일 거라는 광고를 보면  다음 책을 기다리기에 앞서 커피부터 잘 만들어 마시는 데 충실하는 게 이 책이 목적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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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기행 - 8점
박종만 지음/효형출판

부산 가는 고속전철 안에서 박종만의 <커피기행>을 꺼내들다가 문득 생각났다. '아차차 커피 안 사고 탔구나.' 모 시사주간지에서 믹스커피를 끊고 원두커피만 마시는 커피광으로 취재원이 될 만큼 커피를 좋아하는 내게 약 세 시간 동안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는 것은 형벌에 가깝다. 그러나 어쩌겠나? 이미 기차는 떠나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세 시간 동안 커피를 참는 것, 아니면 맛대가리 없는 커피를 3천 원이나 주고 사 마시는 것이다. 원두커피라고 해서 팔지만, 그 커피는 500원 넣고 먹는 사무실의 유사-에스프페소 자판기보다 맛이 떨어진다. 처음에는 좀 참다가 부산역에 내려 커피를 사 마시자 하고 책을 다시 펴들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커피 생각만 더 간절해졌다. 결국 나는 항복했다.

박종만의 이력이야 커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으니 더 이야기하는 것은 사족이다. 하지만 그가 커피의 발생지부터 전파 경로를 따라간다고 떠난 커피로드 기행은 제법 흥미로운 일이다. 커피가 처음 발견됐다는 에티오피아의 짐마에서 출발해(여행 경로상 케냐와 탄자니아를 먼저 들렀지만 애초 이 기행의 시발점은 에티오피아부터이다.) 아비시니아고원을 지나 지부티에서 홍해를 건넌 커피는 예멘의 모카항에서 터키의 이스탄불을 거쳐 유럽으로 전파됐다. 저자는 이 과정을 약탈당하거나 입국을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차를 빌리고 얻어타면서 갖은 고생을 다한다.

애초 이 기행은 험난함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단 돈 백 원부터 오육천 원 내면 편하게 또는 우아하게 그윽한 향과 맛을 즐길 수 있는 커피라는 품이 아닌, 아프리카인들 삶 속에 뿌리 깊게 내린 부나(에티오피아에서 커피를 부르는 말)을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익히 알다시피 커피는 카파라고 불렸던 짐마에서 칼디라는 소년이 처음 발견한 뒤 이슬람을 거쳐 유럽의 유입됐다. 하지만 칼디가 발견한 커피와 유럽에서 음료로 만들어 준 커피는 분명 다르다. 이는 단순히 커피를 끓여 마시는 방식이나 첨가하는 재료가 달라서가 아니다. 커피는 그것을 마시는 곳마다 다른 문화양식을 만들어 냈다. 박종만은 그러한 모습을 제대로 포착해 냈다.

흔히 스타벅스 카페라테 한 잔을 팔 때 그것에 들어간 원두를 재배한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단돈 50원 정도라는 말이 있다. 박종만을 비롯한 커피탐험대는 바로 그 모습을 접한다.

"케냐 농부들은 아침 8시에 나와서 저녁 6시 반까지 일하지만, 대우는 썩 좋지 않다. 하루 100케냐실링의 돈을 받는데, 79케냐실링이 약 1달러이므로 우리 돈 1,000원이 조금 넘는 셈이다. ... 이마저 벌지 않으면 구걸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커피는 이들에게 삶의 버팀목이나 다름없다."(39쪽)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원두를 사거나, 생두를 사 로스팅을 한 뒤 추출하고 마시는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파종, 재배, 수확, 제조, 집산/등급화, 수출/거래, 유통/제조, 굽기/섞기, 분쇄/추출, 음용의 10단계를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앞의 7단계는 생략돼 있다. 하지만 이 7단계는 커피로 먹고사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삶 그 자체이다.

커피나무는 기후나 토양에 민감하다. 일조량과 강우량에 따라, 가지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커피나무는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게다가 이런 재배는 일일이 사람 손을 타야 한다. 게다가 고도의 집중력과 기술이 요구된다. 커피열매의 과육 부분을 제거해 이른바 생두를 뽑아내는데는 그래도 기계화가 돼 있으나 모든 농장이 기계화되지는 않았다. 아프리카의 만성적인 물 부족은 함부로 기계를 돌릴 수 없어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말리고 벗겨내고 골라내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그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아주 일부분이다. 그나마도 먹고살으려 아프리카인들은 오늘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

저자가 또 하나 이 기행에서 천착하는 것은 커피를 음용하는 문화이다. 세계대전 와중에 만들어진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던 문화는 이제 이탈리아에서 발원한 에스프레소 방식으로 추출해 마시는 방식으로 다변화됐다. 하지만 이 모두는 서구의 문화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이 커피일 줄 안다. 신선한 원두를 스트레이트로 혹은 잘 블렌딩된 것을 맛과 향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으로 추출해 여유롭게 마시는 것. 이것은 유럽식 커피 문화일 뿐이다. 아프리카, 정확히는 커피를 재배해 먹고사는 사람들에는 그런 커피는 없다.

아프리카인들은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 궁금해한 탐험대는 한 농가에서 커피를 끓여달라고 주문한다. 농가의 한 아주머니는 어둡고 좁은 부엌에서 흙탕물을 아궁이에서 끓인 뒤 언제 사뒀는지도 모르는 곱게 갈린 커피가루를 물의 양보다 적은 분량을 한웅큼 넣는다. 거기에 정제되지 않은 설탕을 쏟아붓고는 잔이라고 할 수 없는 그릇에 담아 내놓는다. 하지만 이 커피를 마시려 동네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커피는 비록 손수 재배할지라도 쉬이 마실 수 없는 귀한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은 생강이나 약재를 듬뿍 넣어 커피를 기호식품이 아닌 약으로 마신다. 또한 에티오피아인들은 복잡하면서도 고단한 과정을 거치며 커피 세레모니를 진행한다. 이는 손님에게 음료를 대접하는 것을 넘어 손님을 맞는 하나의 의식이다. 이렇듯 아프리카인들의 커피 문화는 서구의 그것과 무척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원두의 신선도나 추출방식 등을 이야기하며 '틀리다'고 말한다. 그렇게 보면 설탕이  듬뿍 든 달짝지근한 다방커피는 서구와 다른 한국식 커피 문화일 게다. 커피의 맛과 향을 살리지 못했다고 말할지언정 그것이 잘못된 커피 음용 방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또한 저자는 에티오피아의 분나에 초점을 맞춘다. 앞서 말했듯 분나 혹은 분나는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를 부르는 말이다. 짐마의 옛 이름 카파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지만 커피의 고향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커피를 반드시 분나라고 부른다. 물론 이렇다 해서 전 세계에 통용되는 커피를 분나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김치와 기무치, 인삼과 진셍을 분나와 커피에 오버랩시킨다. 무엇이 옳은 것일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이전에 적어도 분나가 지니는 의미를 우리는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저자와 커피탐험대는 커피 그 자체를 넘어 아프리카땅에서 커피의 기원과 그것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문화를 탐방한다. 이 기행에는 일반적으로 커피가 가져다주는 낭만적인 면모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저 커피를 수입해 자기네들 방식으로 가공해 하나의 그들만의 문화로 만들어 낸 서구의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 서구의 커피 문화는 전 세계에 펼쳐졌다.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는 서구식 커피하우스가 등장하고 처음으로 바리스타 경연대회가 열렸다. 커피농장의 고단한 삶 속에서는 아프리카인들의 커피 문화가 남아 있다고 하지만, 그들 또한 값싼 로부스타종으로 만들어진 인스턴트커피를 사 마실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들만의 소중한 커피 문화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불행한 변화를 세계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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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날들의 철학 - 8점
베르트랑 베르줄리 지음, 성귀수 옮김/개마고원

이 리뷰는 알라딘 서평단으로 선정돼 작성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존재한다. 누구나 기쁨을 생각하는 것은 쉽게 편하게 여기지만, 슬픔은 절래 손을 젓기 일쑤다. 그런데 살다 보면 우리는 기쁨보다는 슬픔을 더 많이 접한다. 오늘 하루만 봐도 우리는 출근하기 싫어하며, 집안 살림하기를 힘들어하며, 재미없는 TV 프로그램에 짜증을 내며, 인터넷 답글에 격분한다.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더 슬픔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기 십상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세상은 얼마든 즐거울 수 있다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것은 우리네 인생에서 잘 포장돼 진열장에 놓인 비싼 케이크 같은 것이다.

실제로 철학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고 겪는 부정적인 것을 들여다보는 데서 그 의미를 지녀 왔다. 인류 문명이 번영할 때보다 혼란과 파괴가 준동하는 데서 철학은 자신의 임무를 시작한다. 예컨대 ‘이놈의 세상은 왜 이리 각박하단 말인가’라는 질문에서 철학자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무관심과 탐욕을 논파해 왔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의 이면에 잠복해 있는 부정의 근원을 탐구하는 인간 정신의 파수대이다. 그런 철학은 당연히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슬픔 또한 들여다봐야 한다. 무엇이 인간을 이토록 괴롭히는가? 그런데 그것은 왜 인간을 괴롭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간은 즐겁고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바로 철학의 존재 목적 그 자체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슬픔의 요소 하나하나에 돋보기를 가져다 든다. 물론 메스를 들 목적은 아니다. 인간의 정신이란 게 그리 후딱 제거하거나 바로 잡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저자는 생각을 한다. 그 슬픔의 근원이 무엇이며, 무엇과 연관돼 있으며, 그것을 인간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섬섬히 들여다보면서 슬픔의 의미를 끄집어낸다. 저자가 다루는 슬픔의 주제는 다양하다. 시험, 시간, 질병, 부당함, 죽음, 절망, 비극, 악, 소외, 고통…. 하나같이 우리 인간들의 정신에 잠복하면서 우리의 영혼을 흔드는 것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섣불리 이것을 나쁘다거나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다 존재하는 이유가 따로 있으며, 인간은 그것이 품고 있는 나름의 의미를 이해하고 담담히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힘겨움에 쉽사리 굴복하기에 슬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철학함을 통해 우리를 괴롭히는 슬픔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고 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다양하면서도 병렬적이라 목차에서 읽고픈 마음이 든 주제라면 무엇이든 하나 펴 보고 읽어 나가면 된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이야기하는 슬픔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식으로 자리 매김을 다시 하느냐이다. 자, 책을 펴고서 마음이 동하는 것 하나를 읽어 보자. 가령 과거에 집착하느라 힘든 이는 150쪽의 〈후회에 관하여〉를 펴 보면 된다. 저자는 글 초반에서 ‘후회’와 ‘미련’을 구분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전자는 가책이라는 방식으로 우리를 도덕과 대면시키는 반면, 후자는 회상이라는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시간과 대면하도록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둘을 구분하기보다는 혼동한다. 그런데 그 혼동의 결과는 자못 심각하다. 어떤 일을 다시 행하기 원치 않는다는 미명 아래 우리는 과거의 행위 모두를 지워 버리려 한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저자는 “우리는 우리가 경험해 온 것의 총체”라고 말한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미련과 후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경험해 온 것의 누적값인 자기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신의 삶을 완성해 간다. 다시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 다시 해 보면서,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을 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완성해 간다. 저자는 여기서 나아가 용서와 오만, 양심과 가책을 이야기하며 용서를 “참다운 후회와 회한을 이끌어 내는 자세”라며, 잘못에 대한 책임 회피가 아닌 일종의 투쟁에 동참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그 투쟁은 슬픔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 “명징한 의식과 단순 명료한 현존성의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저자가 다른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이와 대동소이하다. 저자는 말한다. “삶 속에는 슬픈 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해명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런 날들의 존재를 가릴 수 있다. 반면 그것에 함몰돼 자신을 불행의 늪으로 내몰 수도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단호히 말한다.
“슬픈 날들이란 하나의 숙명이 아니다. 그것들은 미처 체험되지 못한 삶을 표현할 때 드러나는 우리의 무지와 한계의 결과일 뿐이다. 그 점을 이해하는 즉시 슬픈 건 아무것도 없게 된다. 슬픔 그 자체조차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슬픔 속에는 아직 뭐라 말할 수 없는 미래의 삶을 향한 모색이 담겨 있다.”
이러한 저자의 말은 자못 높은 곳에서 삶을 관조하는 듯한 빤한 경구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 자체를 수동적으로 바라볼 때, 정확히는 체념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다. 삶의 한 부분으로서 슬픔은 늘 우리와 함께 있다. 저자가 이런 슬픔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는 태도이며, 동시에 그것을 해명하는 일이다.

이 책은 ‘차 한 잔과 함께하는 철학 에세이’라는 제목을 단 ‘포즈필로’ 시리즈 중 하나이다. ‘차 한 잔과 함께한다’는 말에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접하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철학하기를 시도한다는 말일 게다.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와인, 쇼핑, 걷기 같은 역시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한다. 시리즈의 다른 책보다는 자못 무거워 보이는 주제를 달았지만, 이 책은 앞서 말했듯 슬픔이라는 타이틀을 달아 조금은 무거워 보이지만, 우리가 하루에도 여러 번씩 내뱉는 일상의 개념 하나하나를 잡고 철학하기를 시도한다. 물론 이 책 한 권 읽는다고 철학하기가 일상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철학이라는 게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어려운 개념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을 게다.


Posted by En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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